<colbgcolor=#339><colcolor=#fff> 현미 玄美|Hyunm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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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명선 (金明善) |
출생 | 1938년 1월 28일[1][2] |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3] | |
사망 |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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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공주 김씨 |
학력 |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 / 명예학사[4]) |
혈액형 | O형[5] |
가족 | 아버지 김진감[6], 어머니 박영빈 언니 김화선, 오빠 김명준, 남동생 김명순, 여동생 김명자, 김길자, 김명옥, 김명희 아들 이영곤(1962년생)[7], 이영준(1964년생)[8]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 노사봉, 노사연, 한상진[9] |
종교 |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10] |
데뷔 |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
이력 | 한국전통문화예술협회 명예고문 前한국전통문화예술협회 고문 前사천군 관광홍보대사 前한국자유총연맹 홍보대사 前현미먹기운동 홍보대사 |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11]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다.
2. 생애 및 가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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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이봉조와의 관계
이봉조와 현미의 관계는 흔히 애정 관계에 치중되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음악적으로도 협업 관계였다. 1960년대 이봉조가 작곡하고 현미가 부르는 형식의 히트 공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봉조의 곡들 또한 이봉조가 피아노로 작곡을 하면 옆에서 현미가 곡을 부르며 가사와 음정을 수정하고 더 나은 멜로디가 있으면 추천하는 방식이었다.실제로 김추자와 정훈희가 불러 유명했던 '무인도'도 현미가 먼저 불러보고 탐이 나서 이 곡은 내가 꼭 해보고 싶다고 이봉조에게 요청했으나, 이미 선약이 되어있어서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 곡은 이미 김추자에게 가기로 되어있었고, 김추자와의 관계는 사실관계가 확인이 되지 않으나 이봉조와 김추자와의 관계에서 루머가 퍼지자 현미가 극구 반대해 결국 도쿄 국제가요제는 '무인도'로 정훈희와 출전하게 되었다.
이봉조는 결혼 생활 전부터 현미의 목소리를 듣고 재즈와 소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데 왜 대중가요를 부르고 싶어하냐고 자주 물었다고 한다. 이런 현미의 장점을 살려서 히트친 곡이 밤안개였다.
밤안개(1962) 2007 라이브 |
3.1. 첫 만남
현미와 이봉조와의 관계는 미 8군무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21살 덕성여대 재학중이었던 현미와 26살 밴드 마스터였던 이봉조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안좋았다고 한다. 여대생 프리미엄과 인기로 악단장이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들었던 현미가 보기엔 아무리 밴드 마스터라해도 본인이 받는 월급에 절반도 못받고 검은 얼굴에 깡 마른 이봉조가 난민 같은 이미지로 보였다고 한다. 반면에 이봉조는 언젠가는 현미의 기를 꺾어놓겠다고 주변 지인들에게 떠들었다고 한다.메인 가수와 밴드 마스터가 매일같이 으르렁 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석규 단장과 이해연의 남편인 베니 킴이 중재를 했고, 당시 유행하던 나이트 클럽에 데리고 가서 사교춤을 추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봉조의 제안으로 만남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현미는 이봉조가 첫 연애 상대였다고 한다.
3.2. 연애 기간
1958년 데이트 중 피아노 소리가 들리던 남산 여관 앞을 지나가 이봉조가 피아노를 치자며 같이 들어갔고 이후 몇번의 방문 끝에 이봉조는 관계를 요구했고, 현미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게 해달라며 대치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결혼하자며 약속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봉조의 질투심이 대단해서 현미가 무대 후 관객들과 악수를 한다거나, 미군 트럭에서 미군 옆에 앉는다거나 하면 곧바로 집으로 가는 군용 트럭에서 아무도 모르게 꼬집고 깨물어 온통 멍투성이로 지내야했다고 한다. 결혼 생활 중에도 밤안개로 히트하며 주변에서 청혼하는 남자들이 많아지자 이봉조는 이제 노래를 못하게 하겠다며 주저 앉히려고 했다고 한다. 이봉조의 집착은 결혼 생활에도 진행되었는데 행사차 영화배우 신영균과 극장 쇼에 나갈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빨간 마후라', '대니 보이' 등의 노래를 알려줬는데 이 모습이 다정해 보였던지 이봉조는 요강까지 가져다 놓고 문을 걸어잠그고 심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영균과의 관계를 의심한 이봉조는 흉기를 꺼내들고 다그치는 통에 그 자리에서 벌벌 떨면서 사정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남자와 놀고 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다며 차를 몰고 떨어져 죽자며 언덕배기에서 핸들을 꺾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현미는 다급한김에 앞뒤 사정 설명할 틈 없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미는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계속 여관을 전전하는게 싫어 특히 시어머니 될 분을 만나뵙고 '참 복스럽게 생겼다며' 흡족해하시자 그 뒤로는 빨리 결혼을 하자며 졸랐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받아들여 1960년 3월 25일 결혼식 날짜로 정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봉조는 처가가 있는 강원도에 인사 가는 것은 차일피일 미뤘고 이 와중에 현미가 임신하게 된다. 이에 이봉조는 "고마 아들 하나만 낳아주그라!"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집안 사정이 있다며 계속해서 뒤로 미뤘고 현미는 배가 계속 불러오고 있어 난감해졌다고 한다.
결국 현미 친정에 알려지게 되었고, 현미의 부모님이 상경해 이봉조와 담판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는 결혼식은 언제든 올릴 수 있으니, 일단 아이만은 낳게 해달라며 사정사정 했다고 한다. 만남 후 현미의 아버지는 '너무 잘 생기고 여자들이 많이 따를 상이라 믿을 수가 없다. 웬만하면 결혼도 안 하는게 좋겠다. 다 네 몸 간수 못한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잊어버려라' 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현미가 울면서 버텼고 이봉조 또한 6.25로 인해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혼인신고는 불가능하다며, 아이부터 일단 낳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결국 결혼 날짜는 계속 미뤄졌고 이 와중에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이 현미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미 만삭에 가까워지던 현미는 충격을 받았고 노전숙에게 "나는 몰라요 미스터리하고 얘기 하세요" 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을 피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노전숙이 찾아오지 않아서 둘의 관계가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의 언론 인터뷰 기사를 보자. >>>https://blog.naver.com/kjkimbest/222879274808
3.3. 결혼 생활
그럼에도 현미는 6.25로 인해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는 이봉조의 말을 믿었던 것 같다. 노전숙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을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첫째 아들이 리라초등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호적이 없어 입학허가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결국 현미는 이봉조의 본적으로 호적을 떼어보니 이미 몇달 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심지어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부인 사이에서 딸만 둘이라고 했는데, 그 사이에 아들까지 생겼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현미가 이봉조에게 따지자 이봉조는 '이미 세상이 우리가 부부인걸 아는데 그깟 종이가 뭔 소용이냐'라며 반응했다고 한다. 아들들이 사생아가 되는 꼴을 보게 생긴 현미는 급하게 자신 앞으로 입적시키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다퉜고 이봉조는 처제가 보는 앞에서 이혼을 하고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어떤 여자와 법원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한 처제가 현미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현미도 그대로 믿었다고 한다.
이봉조는 '그 쪽에서 위자료를 너무 많이 요구해서 당장 이혼은 못하고 서류는 아직 못만들었다.'고 안심시켰으며, 이후에도 위자료 명목으로 노전숙 측에 돈을 보냈고 본인들이 전세집에 살았지만 신촌에 집까지 장만해줬다고 한다. 그 돈들은 모두 현미가 받은 전속금의 일부였다고 한다.
현미는 인간적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노전숙에 대한 연민도 있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을 끊지말라고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던 20년간도 시기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루머가 돌았던 이봉조는 끊임없이 이 문제로 현미와 다퉜고 심지어 현미가 벌어온 봉급 전부를 도박으로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미8군 무대 친구가 이봉조에게 현미와의 결혼 반지를 내밀며 이 것도 가져가 노름하라고 하자 이 말에 충격을 받고 도박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 2년이 지나서야 경제적으로 원상 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현미가 옆에서 지켜보는 조건으로 또다시 카지노에 갔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현미 본인이 4시간에 걸친 뇌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며칠간 뇌 손상으로 주변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입원중에 흘러나오는 '딜라일라'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봉조가 본격적으로 바람을 피며 여러 여자를 만났고 심지어 바람을 피웠던 여자가 이봉조가 일하던 클럽에 찾아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현미가 뒷마무리를 해야했었다는 경우도 전해진다. 심지어 현미가 일터로 전화를 했을때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라고 묻는 물음에 '여기 집인데요'하자 '댁이 어디시죠?'라고 되물었고 '원서동인데요'하자 '여기도 집이라는데? 도대체 어디가 진짜 집이야?'라고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한번은 가수 장선희가 이봉조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는데 '사랑해요 당신을 만난건 행운이었어요'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 쪽지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파이널 쇼를 마치고 다같이 무대로 나아가 인사를 할 차례에 현미와 이금희 이미자가 중앙에 서고 장선희는 옆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무대가 끝나자 이봉조가 불같이 달려와 왜 옆자리에 서게 했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에 이금희와 이미자가 '언니에게 왜 그러세요 이 선생님. 선배가 가운데 서는 게 당연하죠'라며 응수했고 이봉조는 씩씩거리며 분장실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뒤에 장선희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이금희와 이미자가 장선희를 보며 분해하자 현미는 오히려 그들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현미는 잘난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반쯤은 포기하며 살았고 본인이 알게되어 정리하라는 요구를 하면 이봉조 또한 군말없이 정리했다고 한다.
3.4. 파경
그러다 1974년 이 둘은 파경을 맞게 되었는데, 당시 이봉조와 김추자의 염문설이 크게 보도된 직후로 이봉조 현미의 파경 원인이 김추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봉조가 시댁 근처에 고마담이라고 알려진 여성 집에 새살림을 차렸다는 제보가 현미 팬의 제보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이에 현미는 '말씀은 고맙지만 팬이라면 이런 말씀 삼가주십쇼. 제 남편은 제가 관리합니다.'라며 끊었다고 한다. 여기에 끊이지 않고 주변 지인들까지 시인하며 현미를 위로하자 실제 현미는 그 집을 찾아가 이봉조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이에 현미가 파경을 결심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찾아와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노전숙과 여전히 법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합의 이혼서를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며 위자료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기다려달라 했으나, 하루는 노전숙이 딸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오자 현미가 자리를 비켜줬는데 고성과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노전숙을 배웅하며 '나는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떠나보려고도 했고, 제발 나를 놓아달라고도 했으나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아서 이혼도 못한다. 그러니 당신이 법에 호소해서라도 이 일을 매듭지어 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법적인 권리를 갖고있는 노전숙의 권리인 간통 혐의로 고소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으나 노전숙은 이에 '걱정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남동생을 시켜 노전숙 쪽 가정상황을 알아보니 딸만 둘이라던 이봉조의 말과 다르게 밑으로 남매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리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노전숙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칼을 들고 같이 죽자며 현미를 폭행했고 헤어질 수 없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세간살이를 부수며 아들들에게도 폭력적인 분위기를 행사했는데, 현미는 살려달라며 집을 뛰쳐나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까지하고 있었으나 이봉조는 현미의 머리채를 잡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이에 맨발로 파출소로 달려가 몸을 피했고, 경찰관이 이봉조를 진정시키고 돌아가자 다시 밤새도록 난동을 부리다 잠에 들었다고 한다 이 틈을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정릉 이모집으로 피신했고 이 때쯤엔 이봉조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고 현미는 회상했다. 이봉조를 피해 이모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 시기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는 현미와 화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으나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노전숙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3.5. 화해와 이봉조 사망 이후
이후 시누이로부터 이봉조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니 꼭 한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만나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했던 현미는 이봉조와의 만남을 계속 피했기 때문에 아들 이영곤이 유학중에 잠시 이봉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현미가 찾아왔는데 이가 다 빠지고 당뇨 합병증으로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노전숙과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시 재결합을 약속하며 날짜와 기자회견 장소까지 정했는데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실상 현미와의 관계가 정리된 이후로 이봉조는 혼자 살았다고 한다. 별거 중 현미가 한 잡지사와 했던 인터뷰에서 이봉조에 대한 언급을 좋게하자 그걸 본 이봉조는 가정부에게 자랑하며 하루종일 싱글벙글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들은 현미는 이 모습에 진심을 확인하고 이봉조에 대한 연민으로 화해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봉조의 사망 이후 노전숙 측은 종교가 기독교인 관계로 제사 모시기를 거부했고 이 문제를 시댁, 노전숙 측과 논의하던 끝에 현미의 큰 아들이 장손으로 제사를 모시겠다고 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비롯한 유품들은 대부분 노전숙 측 자녀에게 돌아갔고,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게 양복 한 벌만 달라고 요구한 현미의 큰아들 이영곤의 요청도 거부되었다고 한다. 이후 노전숙 측에서 합장을 원하자 이봉조는 생전에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며 이봉조 형제들이 반대했지만 현미는 같은 여자로써 연민이 느껴저 합장하도록 배려 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를 추모하는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진주에서 개최되었던 이봉조 가요제도 현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최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봉조 가요제 제1회 마지막 무대에 이봉조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였다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현미가 마지막 무대로 부르다 2절 시작 부분에서 울음이 터져서 후배 가수들이 이어서 부르며 마무리지었다.
4. 대표곡
- 1962년 - 밤안개
- 1962년 - 내 사랑아
- 1963년 - 보고 싶은 얼굴
- 1964년 - 떠날 때는 말없이
- 1966년 - 무작정 좋았어요
- 1966년 - 애인
- 1967년 - 몽땅 내 사랑
- 1968년 - 바람
- 1971년 - 별
- 1991년 - 왜 사느냐고 묻거든
- 2001년 - 아내
- 2017년 - 내 걱정은 하지마
5. 여담
- 2014년 12월 19일 건강보험공단이 공개한 상습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 사람들을 잘 믿어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하며 2015년엔 빚이 7억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집에 도둑이 드는 등 30년 가까이 살고있는 집까지 잃어 악재가 겹쳐 경제상황이 힘들어지자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타고 행사를 뛰기도 하며, 조카인 매니저가 투잡을 뛰는 바람에 운전면허 취득에 도전하기도 했다.
- CNN의 취재에 따르면, 정부와 협업하는 VR전문 회사 Tekton Space의 도움으로, 가상현실로나마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체험하는 기회를 받았다고 한다. 현미 본인도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감회가 새로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분 45초
- 김숙이 성대모사를 자주 했는데 한 번도 불쾌해 하지 않고 재밌다며 응원해줬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은 절대 초라한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며 자신을 방문해주면 드레스를 선물해주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 이봉조가 당뇨와 심장병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큰 아들이 이런 가족력을 물려받아 세 차례 이상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현미는 이 때문에 항상 큰아들의 건강을 걱정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혼자 지낼만 했지만, 명절 때와 연말만큼은 미국에 있는 자녀들을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 유명한 연예인 집안으로 알려져있다. 우선 본인부터가 유명한 가수이고 남편인 이봉조 또한 작곡가이다. 아버지부터가 그 당시에 콩쿠르 입상자였고, 언니 김화선은 최승희의 1기 수제자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그의 딸들이 노사연 노사봉이다. 노사연의 남편 이무송 또한 가수이며, 다른 조카로는 배우 한상진, 농구선수 박정은 부부가 있고 첫째 아들 이영곤이 '고니'라는 예명으로 잠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둘째 며느리가 가수 원준희다. 또한 현미의 올케가 이시스터즈 2기로 활동한 가수 김상미이며 그 딸이 가수 아일리이다.
- 노사연이 이모인 현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학생 때부터 현미의 '애인', '무작정 좋았어요' 등을 자주 부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노사봉과 함께 시스터지 결성해서 이모처럼 멋지게 살자고 했다고 한다. 이후 노사연이 유명해지면서 kbs 빅쇼에 같이 오르기도 했다.
- 가족오락관 단골 출연자 중 한 명이었다. 가족오락관에 출연하면 많이 웃을 수 있어 10년은 젊어지는 것 같다는 소감을 전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고요 속의 외침에서는 정말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 2014년 고부스캔들이라는 방송 프로에서 며느리인 가수 원준희와 동반 출연했다.
- 평양에서 살던 박구리 85번지 일대는 지금 헐리고 없어진 동네라고 한다. 북한에서 도시계획 일환으로 정리하고 지금의 김일성 광장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 CBS에 나와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이름은 가네와마 요시코였다고 한다.
- 세상을 떠난 후 2024년 9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되었던 아이유의 HEREH 앵콜 콘서트에서 <Shh..> VCR에 아이유가 존경하는 선후배 및 동료 뮤지션들의 사진이 쓰였는데, 현미의 사진도 해당 VCR에 등장하였다.
[1] 음력으로는 1937년 12월 29일이며, 2022년 10월 9일 방송된 '스타다큐 마이웨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37년생 86세임을 밝혔다.[2] 주민등록상으로는 1938년 1월 21일생.[3] 어린 시절은 평양시 경림동에서 보냈다. 기사[4] 1955년 덕성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했으나 가수 활동 때문에 2학년 1학기까지 수료한 후 중퇴하였고, 이후 2004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5] #[6] 정치깡패 조직인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다.[7]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다.[8] 두 아들 모두 작곡가 이봉조와의 사실혼 관계로 얻은 것이다.[9] 8남매 중 셋째로 노사봉, 노사연 자매는 언니 김화선의 딸이고, 한상진은 일곱째인 여동생 김명옥의 아들이다.[10] 예수사랑교회 권사이다.[11] 번안곡으로 원곡은 냇 킹 콜의 'It's a Lonesome Old Tow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