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39><colcolor=#fff> 현미 玄美|Hyunmi | |
본명 | 김명선 (金明善) |
출생 | 1938년 1월 28일[1][2] |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3] | |
사망 |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공주 김씨 |
학력 |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 / 명예학사[4]) |
혈액형 | O형[5] |
가족 | 아버지 김진감[6], 어머니 박영빈 언니 김화선, 오빠 김명준, 남동생 김명순, 여동생 김명자, 김길자, 김명옥, 김명희 아들 이영곤(1962년생)[7], 이영준(1964년생)[8]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 노사봉, 노사연, 한상진[9] |
종교 |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10] |
데뷔 |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
이력 | 한국전통문화예술협회 명예고문 前사천군 관광홍보대사 前한국자유총연맹 홍보대사 前현미먹기운동 홍보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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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11]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다.
2. 생애 및 가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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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
2.1. 유년기
1938년 1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시 박구리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12] 태어난 지 8~9개월 때 우량아 대회에 나가 상을 탈 만큼 체격과 건강 상태가 좋았다고 한다.언니이자 노사연의 어머니인 김화선은 최승희의 1기 문하생 출신으로, 현미는 이런 언니의 영향을 받아 무대에 서는 일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또한 직접 콩쿠르 대회에 나가 상을 탈 정도로 명망있는 가수였다. 원래 현미는 노래가 아닌 언니인 김화선의 영향을 받아 무용을 좋아했고, 매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1945년 해방 직후 소련이 한반도 북반부를 점령하면서 3년 뒤 북한 정권이 세워지게 된다. 이듬 해인 1949년, 당시 경림인민학교 4학년생이던 현미는 소년단 단장으로 뽑혀 평양 시내에서 선전 선동 시위에 동원된 적도 있었다. 단장이었던 현미는 시위대와 함께 '이승만을 때려잡자! 미제는 물러나라!' 등 선전 구호를 외쳤는데, 훗날 남한으로 피난온 뒤 이 시위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13]
또 현미는 김일성을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공산당 환영행사에 동원된 현미는 공산당원 간부 한 사람으로부터 무대 위 단상에 앉아있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에게 꽃다발을 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꽃을 받자 환하게 웃었던 남자가 바로 김일성이었던 것이다.[14]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 해 1.4 후퇴가 일어나면서 평양을 탈출해 대구까지 300km가 넘는 긴 피난길에 올라 월남했다. 당시 평양에 살던 집이 망가지자 부모가 두 여동생을 10km 떨어진 강동에 위치한 조부모댁에 맡겼는데, 부모는 피난 갈 준비가 끝나면 자녀 2명을 데리러 오려고 했지만 중공군이 빠르게 남하하면서 결국 현미의 두 여동생은 북한에 남겨지게 된다. 현미의 여동생은 가족들이 떠난 이후 부모가 남겨놓은 이불에서 부모의 체취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하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공산당 간부들이 조부모님 댁을 차지하고 두 여동생을 내쫓는 바람에 길거리에 고아로 남겨졌다고 한다. 다행히도 두 사람을 불쌍히 여긴 학교 선생님이 이들을 거두어 숙식을 제공했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로동당 당원이 되어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98년 MBC가 주최한 남북이산가족 상봉 특집에서 현미의 가족들과 헤어진 여동생 중 1명인 길자씨는 2박 3일간의 만남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기 이전이라 정부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민간업체 주선으로 $5000을 내고 이들을 만났다고 하며, 평양이 아닌 중국 장춘시에서 이들과 접선했다. 두 여동생은 너무 굶고 고생을 하서 발톱이 다 빠져있는 등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호텔에서 함께 잠을 잘 때 현미에게 "언니... 다 좋은데 배고파서 못 살겠어"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다큐멘터리 2000년 남보원과 함께 이산가족 특집을 촬영하러 평양에 직접 방문한 적도 있는데, 이 때 북한 당국은 남보원과 그의 누나와의 상봉만 허락하고 현미의 이산가족 상봉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현미는 헤어진 다른 여동생인 명자씨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길 전쟁 당시의 경험으로 현미는 반공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피난길에 이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김백봉의 꽃초롱 오페라단을 찾아갔다고 한다. 김백봉은 최승희 무용단의 무용수로 있던 현미의 언니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반갑에 맞이해 주었고 김백봉의 제의로 오페레타 '을지문덕'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가장 큰 극장 무대에 올랐고 이덕화의 부친 이예춘, 김백희가 주연으로 활동하는 희망가극단의 가극공연에 출연해 용돈벌이를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언니 김화선이 김화선 무용연구소를 차리자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무용을 더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화선은 결혼과 함께 친정 식구들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현미는 홀로 서울에 남아 덕성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하게 되며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돈벌이 삼아 김진걸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며 활동하던 현미는 당시 작곡가 김희조 선생을 만나 미 8군 무대에 출연해 학비를 벌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받았고, 당시 보수가 일반 사무직보다 후했기 때문에 현미는 이 제의를 받아 이난영이 단장으로 있던 김시스터즈의 무용수로 취직하게 되었다.
2.2. 미8군 무대 데뷔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로 취직해 활동하던 현미는 우연히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무대에서 아 목동아!와 베사메 무초를 연달아 불렀는데 미군들의 반응이 뜨거워 악단장의 제의로 월급을 3배로 받는 조건으로 현시스터즈를 결성하게 된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그룹의 센터를 담당했다. 그 외에도 솔로로 '벨라'라는 예명으로 주로 팝을 부르며 무대에 서는 일도 잦아졌다.현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던 재즈카페 은성살롱에 현시스터즈가 특별 출연하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본명이나 벨라로 활동했으나, 우연히 미8군 장교클럽에서 손석우 선생과 현인 선생으로부터 '학생은 어떻게 그리도 노래를 잘 부르는가?'라는 격려를 받고나서 당대 최고 가수였던 현인의 현을 따서 현시스터즈 모두 현미, 현애, 현주로 '현'자 돌림 예명을 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현미'가 된다.
이후 현미는 미 8군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악단 소속 가수 중에서 개런티가 제일 좋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10만환대의 개런티를 받았으나 현미는 당시 35만환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악단장의 배려로 쌀가마나 쇠고기, 생선 등을 사서 집으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미 8군 무대에서 당시 드물었던 여대생 프리미엄으로 현 시스터즈의 센터로 인기몰이를 했고, 진석규 단장이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밴드 마스터였던 이봉조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관계가 가까워질 것을 우려해 진석규 단장이 둘을 갈라놓으려하다가 이걸 알아챈 이봉조의 권유로 현미는 진석규 단장과 결별했다고 한다.
이후 존 스타크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사업차 내한했다가 '헐리우드 쇼'라는 대규모 버라이어티 쇼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봉조와 현미를 특별 섭외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디션 합격 얼마 후 4.19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존 스타크는 파산하게 되었고, 현미의 정식 음반 발매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봉조의 아이를 갖게된 현미가 출산과 더불어 일을 쉬게 되었고, 수입이 끊겼던 현미는 당시 미 8군 쇼 기획업체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던 화양 프로덕션에서 '세계의 휴일'이라는 라이브 쇼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최희준과 같이 무대를 서게 된다. 이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유명한 의사 가문의 아들이 현미에게 호감을 느껴 몇번 동행을 제의했는데, 당시 이봉조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후에 쓰리 보이로 명성을 날린 신선삼이라고 한다. 후에 그가 현미에게 '그 때 너무 멋있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라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2.3. 밤안개와 60년대 전성기
밤안개(1962) 1979년 라이브 |
사실 본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이 아니었으나 '밤안개'가 타이틀 곡이었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보다 인기가 많아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재발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작곡가 길옥윤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내 사랑아'가 수록 되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당시 밤안개를 녹음하면서 현미는 이봉조와 심하게 다퉜고 사실 밤안개의 성공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석우 선생의 곡들을 취입하고 곡이 부족해 급하게 끼워넣은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곡 레코드는 잊어버리고 시민회관에서 한차례 공연을 한 후에 한명숙과 제주 공연을 위해 떠나버렸다.
제주 공연은 무산되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방문했는데, 영화 시작 전에 '인기 가수 현미 양이 시민회관에서 '밤안개'를 열창하고 있습니다'라며 이름이 나왔고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해 현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확인했다고 한다. 시민회관 무대에 tv에 방영되면서 반응이 폭발적으로 이어졌고 이후 밤안개 열풍이 불었고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가요계 사상 최초로 5만장이라는 베스트 셀러의 기록을 세우며 전국 각지에서 밤안개가 휘몰아쳤다. 이후 앨범은 8만장까지 팔려나갔고 이 기록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10만장을 판매하면서 기록이 교체된다.
이후 각 방송사에서 드라마 및 영화 주제곡을 불러달라는 러브콜을 보냈고 '아빠 안녕'이라는 곡을 제일 먼저 이봉조가 작곡했다. 이후 드라마는 대성공했고 주제가도 밤안개 못지 않게 히트하면서 곧 영화화로 이어졌다. 이로써 60년대의 히트 공식인 이봉조 작곡 현미 노래의 공식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이후 '태양은 외로워'라는 주제가를 부르며 연달아 히트했고, 이때 처음으로 영화음악 전곡을 맡아봤다고 한다. 처음인지라 공들여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달아 히트작이 쏟아지자 방송출연을 비롯한 행사무대에 바빴고 다음 작품이 연달아 대기중이었기 때문에 쉴틈없이 이봉조와 공동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1964년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보고싶은 얼굴'의 주제곡,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곡 그 밖에도 '애인', '외로워 외로워서'를 불러서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보고싶은 얼굴로 인기몰이를 하던 중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현미는 바쁜 와중에 둘째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고, 임신사실을 숨기며 활동을 해야만 했다. 하루는 무대에 서기 전에 MC였던 서영춘이 현미를 소개하면서 '두 달 후면 현미 양의 '보고싶은 얼굴'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라며 임신 사실을 알렸고, 이에 창피해 울고불면서 무대를 뛰쳐나왔다고 한다.
이는 당시 60년대의 히트 공식이었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를 이봉조-현미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와 주제곡이 동시에 히트하면서 60년대의 스타 공식을 이어온 것이다. 실제로 떠날 때는 말없이는 이미자가 선정한 60년대를 대표하는 3곡 중 하나로 선정된 곡이다. 또한 '보고싶은 얼굴'은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징적인 곡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현미는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을 부르며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는다.
다만 이 시기에 빠른 템포와 재밌는 가사가 돋보이는 '몽땅 내 사랑'과 '두사람', '애인'도 연달아 히트했으며, 한국적인 엔카풍의 '무작정 좋았어요'도 부르며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60년대 초중반에 이어 후반까지도 최고의 스타 반열을 유지했다.
무작정 좋았어요(1965) 1967년 라이브 |
내 사랑아(1962) 길옥윤 고별 콘서트 |
2.4. 별, 그리스 국제가요제 수상
당시 주로 이봉조가 만든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에 제 4회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 받았다. 참가번호 9번으로 노래를 불렀던 현미는 영어로 가사를 번역한 '별' 1절과 번역된 2절을 긴장한 상태로 불러서 음을 일부 틀리게 불러 예선통과도 포기한 상태였으나 결과는 미국 가수에게 1점 차로 가창상 수상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베스트 10을 수상했다.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이봉조는 국제가요제에 출전할 때마다, 사실상 부인이었던 현미와 출전하기 보다는 주로 정훈희와의 파트너로 출전해 주요 상을 수상했다. 국제가요제는 음정의 피치가 높아야 수상에 유리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현미의 허스키하고 저음이 강한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다른 가수들과 협업을 하다 현미에게 "니도 가요제 한번 안나가야겠나?"라고 물었고, "나가도 노래가 있어야 나가지!"라고 대답한 현미에게 건낸 노래가 '별'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봉조가 최초로 도전하는 서구권 가요제였기 때문에 수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실제론 수상에 성공했다.
이러한 경력을 인정받아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인지도가 전무했던 동양인 중년 가수가 한복을 입고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연달아 기립박수와 앵콜이 이어져 계획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곡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연은 주로 가스펠 위주로 불렀다고 한다. 무대반응이 너무 뜨거워 취임 파티 이후에도 주변에서 현미를 계속 찾았고 미국 체류중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2.5. 전성기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이봉조와의 관계 청산과 더불어 가수 생활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엄앵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엄앵란의 이름으로 쇼를 진행해 현미가 게스트로 참여하거나 무대를 중개해주는 등 엄앵란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돈을 벌기위해 야간업소를 하루에 여덟 군데씩 뛰어다니며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일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명숙 최희준 등과 함께 폐국 전까지 TBC 동양방송 전속 가수로 활동했으며,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예능 출연을 통해서 재치있는 입담을 선보이며 다시금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19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봉조의 곡들이 워낙 많았고, 주로 이봉조와 협업을 했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부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새부터인가 곡을 줘도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주지 않았다고 한다. 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에서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데뷔 앨범이래로 처음 불렀다고 한다. 2001년 '아내' 앨범은 중년 여성들의 삶을 담은 노래를 담았고, 수록곡들은 주로 본인이 운영하는 노래교실에서 다른 가수들의 곡들 중에 주부들이 애창하는 곡을 추려서 편곡하고 녹음했다고 한다.
보고싶은 얼굴, 아내, 떠날때는 말없이, 밤안개 (2003 라이브) |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처음으로 이봉조의 유작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을 공개했다. 이 앨범에 수록 된'회상' 또한 반응이 좋았고, 주로 기존 히트곡들을 편곡해 재녹음했지만 '밤안개'와 '별'은 그 의미를 담아 당시 녹음 버전을 수록했다. 기념 앨범 발매와 함께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50주년 기념 앨범과 공연을 발표하자 실제로 패티김이 전화를 걸어 "형님은 노래하는 게 질리지 않냐?"며 "대단하다"고 축하했다고 한다.
이후에 2011년에는 '가라지'를 2017년에 '내 걱정은 하지마'를 발매하며 활동했으며, 이 곡들의 가사에서 노년기에도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과거엔 주로 재즈, 소울 풍의 보컬로 한국 팝을 불러왔던 것과는 다르게 노년기에 들어 트로트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현미 자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라 종종 밝혔으며, 2017년에는 60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싶어 했으나 여러 악조건에서 무산되었고, 최소 90세까지는 노래를 하며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을 해왔다.
2022년에 KBS 불후의 명곡에 레전드 디바로 출연해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불러 최종 우승했다. 동시대 활동했던 한명숙의 건강회복과 응원을 담아서 이 곡을 불렀다고 한다.
2.6. 사망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본인의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시신은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1 #2촬영차 미국에 있던 조카 한상진은 인터뷰에서 "이모가 어제까지 정정하셨다고 한다.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시는 이모가 그렇게 쓰러져,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밝혔다. #[16]
현미의 장례식장은 오는 7일 서울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다. 빈소에는 고인의 생전 히트곡들이 재생되었다. [단독] 故현미, 7일 빈소 차려진다…중앙대병원 장례식장 미국에서 귀국한 그녀의 두 아들과 조카 한상진과 노사연이 상주를 맡아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는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지며, 큰아들 이영곤 씨에 따르면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후 미국에 안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생전에 나중에 죽게 되면 미국에 있는 이모 옆에 안장되고 싶다고 tv에서 여러 번 밝힌 바가 있다. #
한지일 배우가 촬영한 영결식장 전경.
화장 후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 가족과 지인들만 모여 또 한 번 장례를 치렀다.
3. 이봉조와의 관계
이봉조와 현미의 관계는 흔히 애정관계에 치중되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음악적으로도 협업관계였다. 1960년대 이봉조가 작곡하고 현미가 부르는 형식의 히트공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봉조의 곡들 또한 이봉조가 피아노로 작곡을 하면 옆에서 현미가 곡을 부르며 가사와 음정을 수정하고 더 나은 멜로디가 있으면 추천하는 방식이었다.실제로 김추자와 정훈희가 불러 유명했던 '무인도'도 현미가 먼저 불러보고 탐이 나서 이 곡은 내가 꼭 해보고 싶다고 이봉조에게 요청했으나, 이미 선약이 되어있어서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 곡은 이미 김추자에게 가기로 되어있었고, 김추자와의 관계는 사실관계가 확인이 되지 않으나 이봉조와 김추자와의 관계에서 루머가 퍼지자 현미가 극구 반대해 결국 도쿄 국제가요제는 '무인도'로 정훈희와 출전하게 되었다.
이봉조는 결혼생활 전부터 현미의 목소리를 듣고 재즈와 소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데 왜 대중가요를 부르고 싶어하냐고 자주 물었다고 한다. 이런 현미의 장점을 살려서 히트친 곡이 밤안개였다.
밤안개(1962) 2007 라이브 |
3.1. 첫만남
현미와 이봉조와의 관계는 미 8군무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21살 덕성여대 재학중이었던 현미와 26살 밴드 마스터였던 이봉조와의 첫만남은 상당히 안좋았다고 한다. 여대생 프리미엄과 인기로 악단장이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들었던 현미가 보기엔 아무리 밴드 마스터라해도 본인이 받는 월급에 절반도 못받고 검은 얼굴에 깡 마른 이봉조가 난민 같은 이미지로 보였다고 한다. 반면에 이봉조는 언젠가는 현미의 기를 꺾어놓겠다고 주변 지인들에게 떠들었다고 한다.메인 가수와 밴드 마스터가 매일같이 으르렁 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석규 단장과 이해연의 남편인 베니 킴이 중재를 했고, 당시 유행하던 나이트 클럽에 데리고 가서 사교춤을 추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봉조의 제안으로 만남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현미는 이봉조가 첫 연애 상대였다고 한다.
3.2. 연애기간
1958년 데이트 중 피아노 소리가 들리던 남산 여관 앞을 지나가 이봉조가 피아노를 치자며 같이 들어갔고 이후 몇번의 방문 끝에 이봉조는 관계를 요구했고, 현미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게 해달라며 대치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결혼하자며 약속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봉조의 질투심이 대단해서 현미가 무대 후 관객들과 악수를 한다거나, 미군 트럭에서 미군 옆에 앉는다거나 하면 곧바로 집으로 가는 군용 트럭에서 아무도 모르게 꼬집고 깨물어 온통 멍투성이로 지내야했다고 한다. 결혼 생활 중에도 밤안개로 히트하며 주변에서 청혼하는 남자들이 많아지자 이봉조는 이제 노래를 못하게 하겠다며 주저 앉히려고 했다고 한다. 이봉조의 집착은 결혼 생활에도 진행되었는데 행사차 영화배우 신영균과 극장 쇼에 나갈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빨간 마후라', '대니 보이' 등의 노래를 알려줬는데 이 모습이 다정해 보였던지 이봉조는 요강까지 가져다 놓고 문을 걸어잠그고 심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영균과의 관계를 의심한 이봉조는 흉기를 꺼내들고 다그치는 통에 그 자리에서 벌벌 떨면서 사정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남자와 놀고 있는 꼴을 도저히 볼 수가 없다며 차를 몰고 떨어져 죽자며 언덕배기에서 핸들을 꺾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현미는 다급한김에 앞뒤 사정 설명할 틈 없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미는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계속 여관을 전전하는게 싫어 특히 시어머니 될 분을 만나뵙고 '참 복스럽게 생겼다며' 흡족해하시자 그 뒤로는 빨리 결혼을 하자며 졸랐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받아들여 1960년 3월 25일 결혼식 날짜로 정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봉조는 처가가 있는 강원도에 인사 가는 것은 차일피일 미뤘고 이 와중에 현미가 임신하게 된다. 이에 이봉조는 "고마 아들 하나만 낳아주그라!"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집안 사정이 있다며 계속해서 뒤로 미뤘고 현미는 배가 계속 불러오고 있어 난감해졌다고 한다.
결국 현미 친정에 알려지게 되었고, 현미의 부모님이 상경해 이봉조와 담판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는 결혼식은 언제든 올릴 수 있으니, 일단 아이만은 낳게 해달라며 사정사정 했다고 한다. 만남 후 현미의 아버지는 '너무 잘 생기고 여자들이 많이 따를 상이라 믿을 수가 없다. 웬만하면 결혼도 안 하는게 좋겠다. 다 네 몸 간수 못한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잊어버려라' 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현미가 울면서 버텼고 이봉조 또한 6.25로 인해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혼인신고는 불가능하다며, 아이부터 일단 낳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결국 결혼 날짜는 계속 미뤄졌고 이 와중에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이 현미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미 만삭에 가까워지던 현미는 충격을 받았고 노전숙에게 "나는 몰라요 미스터리하고 얘기 하세요" 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을 피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노전숙이 찾아오지 않아서 둘의 관계가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의 언론 인터뷰 기사를 보자. >>>https://blog.naver.com/kjkimbest/222879274808
3.3. 결혼생활
그럼에도 현미는 6.25로 인해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는 이봉조의 말을 믿었던 것 같다. 노전숙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을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첫째 아들이 리라초등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호적이 없어 입학허가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결국 현미는 이봉조의 본적으로 호적을 떼어보니 이미 몇달 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부인 사이에서 딸만 둘이라고 했는데, 그 사이에 아들까지 생겼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현미가 이봉조에게 따지자 이봉조는 '이미 세상이 우리가 부부인걸 아는데 그깟 종이가 뭔 소용이냐'라며 반응했다고 한다. 아들들이 사생아가 되는 꼴을 보게 생긴 현미는 급하게 자신 앞으로 입적시키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다퉜고 이봉조는 처제가 보는 앞에서 이혼을 하고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어떤 여자와 법원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한 처제가 현미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현미도 그대로 믿었다고 한다. 이봉조는 '그 쪽에서 위자료를 너무 많이 요구해서 당장 이혼은 못하고 서류는 아직 못만들었다.'고 안심시켰으며, 이후에도 위자료 명목으로 노전숙 측에 돈을 보냈고 본인들이 전세집에 살았지만 신촌에 집까지 장만해줬다고 한다. 그 돈들은 모두 현미가 받은 전속금의 일부였다고 한다. 현미는 인간적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노전숙에 대한 연민도 있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을 끊지말라고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결혼생활을 이어나갔던 20년간도 시기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루머가 돌았던 이봉조는 끊임없이 이 문제로 현미와 다퉜고 심지어 현미가 벌어온 봉급 전부를 도박으로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미8군 무대 친구가 이봉조에게 현미와의 결혼 반지를 내밀며 이 것도 가져가 노름하라고 하자 이 말에 충격을 받고 도박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 2년이 지나서야 경제적으로 원상 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현미가 옆에서 지켜보는 조건으로 또다시 카지노에 갔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현미 본인이 4시간에 걸친 뇌수술까지 받았다고 한다. 며칠간 뇌 손상으로 주변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입원중에 흘러나오는 '딜라일라'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봉조가 본격적으로 바람을 피며 여러 여자를 만났고 심지어 바람을 피웠던 여자가 이봉조가 일하던 클럽에 찾아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현미가 뒷마무리를 해야했었다는 경우도 전해진다. 심지어 현미가 일터로 전화를 했을때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라고 묻는 물음에 '여기 집인데요'하자 '댁이 어디시죠?'라고 되물었고 '원서동인데요'하자 '여기도 집이라는데? 도대체 어디가 진짜 집이야?'라고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한번은 가수 장선희가 이봉조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는데 '사랑해요 당신을 만난건 행운이었어요'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 쪽지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파이널 쇼를 마치고 다같이 무대로 나아가 인사를 할 차례에 현미와 이금희 이미자가 중앙에 서고 장선희는 옆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무대가 끝나자 이봉조가 불같이 달려와 왜 옆자리에 서게 했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에 이금희와 이미자가 '언니에게 왜 그러세요 이 선생님. 선배가 가운데 서는 게 당연하죠'라며 응수했고 이봉조는 씩씩거리며 분장실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뒤에 장선희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이금희와 이미자가 장선희를 보며 분해하자 현미는 오히려 그들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현미는 잘난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반쯤은 포기하며 살았고 본인이 알게되어 정리하라는 요구를 하면 이봉조 또한 군말없이 정리했다고 한다.
3.4. 파경
그러다 1974년 이 둘은 파경을 맞게 되었는데, 당시 이봉조와 김추자의 염문설이 크게 보도된 직후로 이봉조 현미의 파경 원인이 김추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봉조가 시댁 근처에 고마담이라고 알려진 여성 집에 새살림을 차렸다는 제보가 현미 팬의 제보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이에 현미는 '말씀은 고맙지만 팬이라면 이런 말씀 삼가주십쇼. 제 남편은 제가 관리합니다.'라며 끊었다고 한다. 여기에 끊이지 않고 주변 지인들까지 시인하며 현미를 위로하자 실제 현미는 그 집을 찾아가 이봉조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이에 현미가 파경을 결심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찾아와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노전숙과 여전히 법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합의 이혼서를 보여주며 현미를 안심시키며 위자료 문제가 해결될때까지 기다려달라 했으나, 하루는 노전숙이 딸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오자 현미가 자리를 비켜줬는데 고성과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노전숙을 배웅하며 '나는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떠나보려고도 했고, 제발 나를 놓아달라고도 했으나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아서 이혼도 못한다. 그러니 당신이 법에 호소해서라도 이 일을 매듭지어 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법적인 권리를 갖고있는 노전숙의 권리인 간통 혐의로 고소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으나 노전숙은 이에 '걱정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남동생을 시켜 노전숙 쪽 가정상황을 알아보니 딸만 둘이라던 이봉조의 말과 다르게 밑으로 남매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리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노전숙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이봉조가 칼을 들고 같이 죽자며 현미를 폭행했고 헤어질 수 없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세간살이를 부수며 아들들에게도 폭력적인 분위기를 행사했는데, 현미는 살려달라며 집을 뛰쳐나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까지하고 있었으나 이봉조는 현미의 머리채를 잡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이에 맨발로 파출소로 달려가 몸을 피했고, 경찰관이 이봉조를 진정시키고 돌아가자 다시 밤새도록 난동을 부리다 잠에 들었다고 한다 이 틈을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 정릉 이모집으로 피신했고 이 때쯤엔 이봉조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고 현미는 회상했다. 이봉조를 피해 이모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 시기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는 현미와 화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으나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노전숙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몇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3.5. 화해와 이봉조 사망 이후
이후 시누이로부터 이봉조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니 꼭 한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만나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했던 현미는 이봉조와의 만남을 계속 피했기 때문에 아들 이영곤이 유학중에 잠시 이봉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현미가 찾아왔는데 이가 다 빠지고 당뇨 합병증으로 상당히 심각한 상태임에도 노전숙과의 재결합을 거부하고, 틀니를 낀 상태로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서로 오열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다시 재결합을 약속하며 날짜와 기자회견 장소까지 정했는데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실상 현미와의 관계가 정리된 이후로 이봉조는 혼자 살았다고 한다. 별거 중 현미가 한 잡지사와 했던 인터뷰에서 이봉조에 대한 언급을 좋게하자 그걸 본 이봉조는 가정부에게 자랑하며 하루종일 싱글벙글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들은 현미는 이 모습에 진심을 확인하고 이봉조에 대한 연민으로 화해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봉조의 사망 이후 노전숙 측은 종교가 기독교인 관계로 제사 모시기를 거부했고 이 문제를 시댁, 노전숙 측과 논의하던 끝에 현미의 큰 아들이 장손으로 제사를 모시겠다고 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비롯한 유품들은 대부분 노전숙 측 자녀에게 돌아갔고,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게 양복 한 벌만 달라고 요구한 현미의 큰아들 이영곤의 요청도 거부되었다고 한다. 이후 노전숙 측에서 합장을 원하자 이봉조는 생전에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며 이봉조 형제들이 반대했지만 현미는 같은 여자로써 연민이 느껴저 합장하도록 배려 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를 추모하는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진주에서 개최되었던 이봉조 가요제도 현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최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봉조 가요제 제1회 마지막 무대에 이봉조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였다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현미가 마지막 무대로 부르다 2절 시작 부분에서 울음이 터져서 후배 가수들이 이어서 부르며 마무리지었다.
4. 대표곡
- 1962년 - 밤안개
- 1962년 - 내 사랑아
- 1963년 - 보고 싶은 얼굴
- 1964년 - 떠날 때는 말없이
- 1966년 - 무작정 좋았어요
- 1966년 - 애인
- 1967년 - 몽땅 내 사랑
- 1968년 - 바람
- 1971년 - 별
- 1991년 - 왜 사느냐고 묻거든
- 2001년 - 아내
- 2017년 - 내 걱정은 하지마
5. 가족오락관
생전 가족오락관 단골 출연자 중 한 명이었다. 가족오락관에 출연하면 많이 웃을 수 있어 10년은 젊어지는 것 같고, 특히 고요 속의 외침에서는 정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손미나 아나운서가 진행한 회차는 굵게 표시.
- 1991년 9월 10일
- 1992년 5월 10일
- 1993년 12월 24일
- 1995년 6월 15일
- 1996년 5월 15일
- 1997년 5월 14일
- 1997년 9월 3일
- 1998년 7월 22일
- 1999년 6월 16일
- 1999년 9월 1일
- 2002년 9월 14일
- 2003년 3월 1일
- 2003년 7월 26일
- 2003년 12월 6일
- 2004년 4월 10일
- 2004년 10월 30일
- 2005년 3월 12일
- 2006년 7월 15일
- 2006년 11월 18일
- 2007년 4월 14일
- 2007년 8월 25일
- 2007년 11월 10일
- 2008년 5월 3일
6. 여담
- 2014년 12월 19일 건강보험공단이 공개한 상습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랐다. # 사람들을 잘 믿어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하며 2015년엔 빚이 7억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집에 도둑이 드는 등 30년 가까이 살고있는 집까지 잃어 악재가 겹쳐 경제상황이 힘들어지자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타고 행사를 뛰기도 하며, 조카인 매니저가 투잡을 뛰는 바람에 운전면허 취득에 도전하기도 했다.
- CNN의 취재에 따르면, 정부와 협업하는 VR전문 회사 Tekton Space의 도움으로, 가상현실로나마 어릴 적 살던 고향을 체험하는 기회를 받았다고 한다. 현미 본인도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감회가 새로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분 45초
- 김숙이 성대모사를 자주 했는데 한 번도 불쾌해 하지 않고 재밌다며 응원해줬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은 절대 초라한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며 자신을 방문해주면 드레스를 선물해주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 이봉조가 당뇨와 심장병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큰 아들이 이런 가족력을 물려받아 세 차례 이상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현미는 이 때문에 항상 큰아들의 건강을 걱정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혼자 지낼만 했지만, 명절 때와 연말만큼은 미국에 있는 자녀들을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 유명한 연예인 집안으로 알려져있다. 우선 본인부터가 유명한 가수이고 남편인 이봉조 또한 작곡가이다. 아버지부터가 그 당시에 콩쿠르 입상자였고, 언니 김화선은 최승희의 1기 수제자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그의 딸들이 노사연 노사봉이다. 노사연의 남편 이무송 또한 가수이며, 다른 조카로는 배우 한상진, 농구선수 박정은 부부가 있고 첫째 아들 이영곤이 '고니'라는 예명으로 잠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둘째 며느리가 가수 원준희다. 또한 현미의 올케가 이시스터즈 2기로 활동한 가수 김상미이며 그 딸이 가수 아일리이다.
- 노사연이 이모인 현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학생 때부터 현미의 '애인', '무작정 좋았어요' 등을 자주 부르며 꿈을 키웠다고 한다. 노사봉과 함께 시스터지 결성해서 이모처럼 멋지게 살자고 했다고 한다. 이후 노사연이 유명해지면서 kbs 빅쇼에 같이 오르기도 했다.
- 2014년 고부스캔들이라는 방송 프로에서 며느리인 가수 원준희와 동반 출연했다.
- 평양에서 살던 박구리 85번지 일대는 지금 헐리고 없어진 동네라고 한다. 북한에서 도시계획 일환으로 정리하고 지금의 김일성 광장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 CBS에 나와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이름은 가네와마 요시코라고 한다.
[1] 음력으로는 1937년 12월 29일이며, 2022년 10월 9일 방송된 '스타다큐 마이웨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37년생 86세임을 밝혔다.[2] 주민등록상으로는 1938년 1월 21일생.[3] 어린 시절은 평양시 경림동에서 보냈다. 기사[4] 1955년 덕성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했으나 가수 활동 때문에 2학년 1학기까지 수료한 후 중퇴하였고, 이후 2004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5] #[6]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깡패 조직인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다.[7] '고니'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다.[8] 두 아들 모두 작곡가 이봉조와의 사실혼 관계로 얻은 것이다.[9] 8남매 중 셋째로 노사봉, 노사연 자매는 언니 김화선의 딸이고, 한상진은 일곱째인 여동생 김명옥의 아들이다.[10] 예수사랑교회 권사이다.[11] 번안곡으로 원곡은 냇 킹 콜의 'It's a Lonesome Old Town'이다.[12] 현미네 집안은 딸만 8명으로 동네에서도 딸 부잣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13] 한창 체제 경쟁을 하던 1980년대까지는 대한민국에서도 북한과 소련, 중국을 규탄하는(보통 중공이라고 불렀다) 선전 시위를 수시로 갖곤 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고, 한국 정부 역시 북방정책의 영향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를 하게 되면서 국가차원에서의 선전시위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북한은 2020년대에 접어든 현재까지도 선전 시위를 대규모로 진행하고 있다.[14] 당시 어린이 대표 자격으로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고 한다.[15] 시신은 싱크대 앞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편안한 얼굴로 있었고 2년 전인 2021년 크게 넘어져 삼과골절 수술을 받고 회복에 전념해 있어서 사인은 골다골증으로 인한 부상으로 추측되었으나, 이후 사인이 심장마비로 밝혀졌다.[16] 기사에 따르면, 한상진과 상주인 두 아들이 미국에 있어서 이들이 귀국하는대로 장례 절차가 진행될 것이다. 다만 직항편이 없어서 빠르게 돌아온다고 해도 7일 이후에야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