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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1년 5월 23일 전원집합의 오프닝 장면[1][2]
일본의 전설적인 오와라이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주도하던 TBS의 공개 콩트 프로그램이자 일본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예능 프로그램 이다.
1969년 10월 4일 첫 방송을 개시한 이래 매주 토요일 저녁 8시마다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며 1985년 9월 28일까지 약 15년 6개월간 총 803회가 방영되었다.[3] 약칭은 전원집합.
수시로 회전하면서 바뀌는 대규모 무대 장치와 대야가 머리 위로 떨어지거나 책상 또는 문짝에 얼굴을 부딪혀 나자빠지는 것으로 대표되는 호쾌한 몸개그, 치밀하게 연출되어 있는 콩트, 도리후 멤버들의 뛰어난 연기력, 평소 이미지는 팽개치고 기꺼이 망가지면서 폭소를 유발하는 게스트 등이 적절히 조화된 이 프로그램에 일본의 시청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광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무한도전이나 1박 2일 1기에 동급으로 맞먹는 전설적인 예능 프로그램이었으며,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대에 생방송으로 송출된 점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와도 비교된다. 같은 시대 MBC TV에서 방영한 웃으면 복이와요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 일본 TV 코미디의 대부격인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1980년 방영된 TBC(현 JTBC)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4]은 제목부터 포맷, 심지어 방송 시간대까지 전원집합을 모조리 카피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통합된 이후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역시 이름을 카피한 '전원집합 토요대행진'을 방했으며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토요일 전원출발'을 방송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전자는 음악 버라이어티였고 후자는 스타들이 게스트로 출연한 1990년대 전형적인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다.
2. 기획 의도
당시 토요일 저녁 8시 시간대에 드라마를 방영하던 TBS는 경쟁사 후지 테레비의 콩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コント55号の世界は笑う)[5]에 밀려 시청률이 바닥을 긁고 있었고, 대책으로 콩트 55호에 대항할 새로운 오와라이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검토를 거듭한 끝에 오와라이 밴드로 이름을 날리던 더 드리프터즈(이하 도리후)를 끌어들여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개 방송을 만들게 되었다.타이틀인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은 광고 스폰서인 라이온유지의 광고부장이 "토요일 저녁 8시가 되면 모두가 TV 앞에 집합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제시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붙였다고 한다.
3. 프로그램 구성
- 오프닝
오후 8시 정각, 무대 중앙에서 이카리야 쵸스케가 카메라를 향하여 크게 검지손가락을 내밀면서 "8시라구!"라고 소리지르면 관객석 계단에서 도리후의 나머지 멤버 4명이 주먹 쥔 오른손을 위로 뻗으며 관객들과 "전원~집합!"이라고 외치면서 무대로 뛰어 올라와서 오프닝이 시작된다. 이때 도리후 멤버들 특유의 의상도 시그니처다.[6] 이후 도리후 멤버와 출연진들이 무대에서 오프닝 곡을 부르면서 프로그램의 막이 오른다. 메인 게스트가 거물급인 회차에서는 게스트가 오프닝에 참여하지 않고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프닝 음악이 끝난 뒤 이카리야 쵸스케의 소개 멘트에 따라 비로소 게스트가 무대 중앙으로 등장하였다.
- 전반 콩트
통칭 '전반'. <8시라구! 전원집합>의 메인 코너. 8시 4분경 이카리야 쵸스케가 관객을 향해서 "오잇스(おいっす, 안녕)!"라고 인사를 하며 콩트가 시작된다. 이때 관객이 "오잇스!"라고 맞받아치면 이카리야가 "힘이 좋다! 다시 한번, 오잇스!"(학교 선생님 등 착한 역할의 경우 등) 또는 "목소리가 작다!! 오잇스!"(악역의 경우)로 재차 인사를 한다. 콩트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보통은 도리후의 다른 멤버들이 보케짓을 하면 이카리야가 이들에게 츳코미를 날리는 방식이 많았다. 전반 콩트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것은 이카리야 쵸스케가 선생님으로 나오고 여자 아이돌 게스트들이 모범생으로, 도리후의 나머지 멤버들이 사고뭉치 학생으로 나오는 교실 콩트였다. 대체로 8시 26분 경에 콩트가 마무리되며 배경음악이 흐르는 사이에 많은 스태프가 무대에 올라가 30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재빨리 콩트의 세트와 소품류를 스테이지 옆으로 철수시켰다. 단시간에 철수가 가능하도록 큰 세트는 모두 움직이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시무라 켄의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는 거의 시무라(보케), 이카리야(츳코미)의 투톱 체제로 갔다. 특히, 나머지 도리후 멤버들이 '시무라 켄 혼자 바보 만들기' 식의 개그를 하면서 그의 캐릭터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주로 '문이 열려있다.→시무라 켄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다.→시무라 켄이 문을 닫고 오면 문이 자동으로 다시 열린다.→이카리야 쵸스케가 시무라 켄에게 핀잔을 준다. '라는 식. 또는 이카리야 선생이 일본 지도를 펴놓고 다른 멤버들에게 각 지역을 설명하라고 하는데, 시무라만 홋카이도를 "기타카이도"로 읽고 시코쿠는 "욘고쿠"로 읽어서 나머지 멤버들이 어이가 없어 발랑 나자빠지게 만든다.[7] 참고로 이러한 시무라 보케 - 나머지 멤버들의 츳코미 포맷은 이후 1980년대에 심형래가 자신이 주연이 된 코너(변방의 북소리, 동물의 왕국 등)에서 그대로 베껴서 써먹었다. 봉숭아 학당의 맹구 캐릭터도 교실 콩트에서 나온 수업시간에 나대는 시무라 군 캐릭터를 일정 부분 차용한 것이다.
- 게스트의 노래 1
신인 아이돌 가수, 아이돌 그룹이나 실력파 싱어송라이터 등이 나와서 자신의 히트곡을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중간 광고가 방영되었다.
- 소년 소녀 합창단
1972년부터 시작된 도리후 멤버들과 게스트가 함께 하는 <8시라구! 전원집합>의 전통 코너. 계단 모양의 무대가 설치되고 파이프 오르간이 아베 마리아의 연주를 시작하면 지휘자 역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가톨릭 사제 같은 복장, 나머지 출연자는 하얀 겉옷에 흰 베레모, 즉 소년 성가대의 양식으로 등장하며 코너가 시작된다. 코너의 기본 형식은 이카리야의 지휘에 맞추어 동요 등을 도리후 멤버들하고 게스트들이 한 소절씩 맡아 부르는데 노래가 이어질수록 가사가 점점 엉뚱하게 바뀌면서 관객들을 폭소시키는 것이었다. 카토 챠가 주도하던 하야구치코토바도 아주 인기가 많았으며, 게스트로 출연한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코너는 참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연예인들이 많았을 정도로 전원집합의 인기 코너였다.
1976년 시무라 켄이 이 코너에서 불렀던 히가시무라야마 온도(東村山音頭)가 대박을 치면서 시무라 켄이 코너의 중심을 맡게 됐으며 히가시무라야마 온도 외에도 시무라 켄의 많은 유행어가 이 코너에서 탄생했다. 1983년 2월 19일을 마지막으로 종영되었고 1년 7개월 후인 1984년 9월 29일에 특집으로 방영된 "15주년이다! 전원 집합"에서 한번 부활했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실제 소년 소녀 합창단이 출연한 적도 있었다. 이 코너가 끝난 뒤 바로 게스트의 노래 2와 짧은 콩트가 이어졌기 때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가수 및 도리후의 멤버들은 코너가 끝나고 무대 시작 시간에 맞춰 재빨리 옷을 갈아 입어야만 했다.
- 게스트의 노래 2
게스트로 출연하는 가수들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얻거나 제일 고참 격인 가수가 담당하는 무대. 10년 이상 톱 클래스의 실적을 쌓고 있는 아이돌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다.
- 짧은 콩트
통칭 '후반'. 이카리야 쵸스케를 제외한 도리후의 나머지 4명과 게스트가 출연하여 짧은 콩트를 선보인다. 진행자 역을 맡는 이카리야 쵸스케가 "네, 후반 갑시다. 후반 출발!"이라고 말하면 콩트가 시작되었다. 짧은 콩트는 기본적으로 1회 방송에서 2개가 진행되었으며, 소년 소녀 합창대 코너가 폐지된 말기에는 4개의 짧은 콩트가 방영되었다. 짧은 콩트 종료 후 엔딩 시간에 맞춰서 세트의 철수를 단시간에 재빠르게 실시해야만 했기에 세트에는 전반 콩트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철수하기 위한 장치가 붙어 있었다.
나카모토 코지의 체조 코너, 카토 챠의 『 조금만이에요(チョットだけよ) 』, 우유 광고 콩트, 시무라 켄의 수염 댄스, 부부 콩트, 나카모토 코지와 시무라 켄의 가위바위보 결투는 모두 이 코너의 일부로서 방영되었다. 또한, 1970년 중반까지는 여성 레귤러와 도리후 멤버 중 1명이 출연하는 라인 댄스 풍 단막극이 존재했다.
프로그램 말기에는 중간 광고가 끝난 뒤 방송되었으며, 전반 콩트 종료 후에 게스트의 노래 1을, 짧은 콩트 종료 후에 게스트의 노래 2가 나오는 구성으로 변경되었다.
- 엔딩
짧은 콩트 후 중간 광고가 방영되고 프로그램의 엔딩 시그널이 방영되었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프로그램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에 따라 엔딩 시간이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남으면 도리후의 멤버들이 어린이들을 겨냥하여 "감기 조심해라", "숙제는 꼭 해라", "이는 꼭 닦고 자라" 등의 멘트를 치기도 했다.
4. 전성기
초기에는 도리후의 콩트 외에 노래 공연, 게스트를 초대하는 토크 코너와 대형 미끄럼틀을 이용한 퀴즈 코너 등을 주된 내용으로 방영하여 시청률은 10% 초중반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고 시청자들도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경쟁자인 콩트 55호가 여전히 막강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어 그 아성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프로듀서 이즈쿠리 요시미(居作 昌果)는 고민 끝에 '결국 시청자는 습관적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된다. 먼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오는 것이 급선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이후 이즈쿠리 PD는 여러가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도리후의 콩트와 슬랩스틱 코미디 위주로 틀을 뜯어 고쳤고, 대담하게도 1시간 가까운 공개방송을 전부 생방송으로 편성하는 파격을 행사했으며[8] 당시 TBS의 인기 드라마에 출연 중이던 탤런트들을 게스트로 초빙하여 콩트에 참여시키는 등의 볼 거리를 제공하며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4~15%로 시작한 시청률은 1970년대 들어 쑥쑥 올라가면서 1973년 4월 7일 방영분[9]은 50.5%라는 일본 역대 예능 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고 한창 시절엔 평균 40~50%, 못 해도 30%는 기본으로 찍으면서 전원집합은 이른바 괴물 프로그램이라 불릴 정도로 토요일 밤 8시라는 황금 시간대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10]
덧붙이자면 당초 TBS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후지 테레비의 콩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는 급 부상한 전원집합에 밀리며 방송시작 1년 9개월 만인 1970년 4월 콩트 55호의 할거야 봐달라구!(コント55号のやるぞみてくれ!)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이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하며 불과 2개월 만에 아예 문을 닫고 말았다(...).
1974년 도리후의 레귤러 멤버인 아라이 츄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면서 위기가 찾아왔지만,[11] 후임으로 들어온 시무라 켄이 적응기간을 거쳐 1976년 히가시무라야마 온도(東村山音頭)를 히트시키며 프로그램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1970년대 내내 TBS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간판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대의 유명한 여성 아이돌 스타들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스가와라 분타, 타미야 지로, 고 히로미 등의 거물급 게스트들도 전원집합에 출연하여 콩트에서 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전원집합의 생방송은 일본 각 지역의 극장이나 시민회관, 체육관 등에서 매주 전국을 순회하는 형식으로 전파를 탔지만, 시청률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간토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방송 말엽에는 TBS 스튜디오를 사용하게 되었다.
5. 시청률 하락, 그리고 종영
1981년 멤버인 나카모토 코지가 시무라 켄과 함께 불법 경마 도박사건에 연루되어 약식 기소당한 후 벌금형에 처해지며[12] 도리후와 전원집합 이미지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터졌고,[13] 그 해 10월 10일 토요일 밤 8시의 콩라인이란 쓴맛을 보며 칼을 갈고있던 후지 테레비가 비트 다케시, 아카시야 산마, 시마다 신스케를 앞세워 작정하고 방영 개시한 오와라이 프로그램 우리들은 익살족(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전원집합의 시청률은 하락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14] 도리후 내 멤버간의 갈등마저 표면으로 떠올랐다.[15]1982년 9월, 전원집합의 창시자인 이즈쿠리 요시미 PD가 인사 이동에 따라 제작국 차장 겸 연출 3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선에서 물러나며 후임 프로듀서인 다카하시 토시아키가 분위기를 쇄신하려 했지만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그램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83년 8월 13일 방영분은 9.2%로 방송개시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수 시청률이라는 굴욕을 당했고[16] 이후로도 줄곧 10% 대에 그치면서 전원집합은 갈수록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17]
1985년에 접어들며 전원집합은 시청률 경쟁에서 완전히 나가 떨어졌고, 결국 TBS는 7월 19일 "생방송을 공개 형식으로 계속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넌센스 개그도 소재가 바닥을 드러냈다"라는 이유로 전원집합을 종영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원집합은 그 해 9월 28일, 고별 방송을 마지막으로 총 15년 6개월, 803회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전원집합 마지막 방송에 출연한 도리후. 맨 우측에 전 멤버인 아라이 츄도 있다.
이후 도리후도 완전 해체는 아니지만 거의 와해 상태가 되어 오와라이 계에는 시무라 켄과 카토 챠만 남아 활동하고, 이카리야 쵸스케는 연기[18], 타카기 부는 음악, 나카모토 코지는 주로 무대 행사 쪽으로 각자 집중하게 되었다.
6. 여담
- 이즈쿠리 요시미 PD가 전원집합을 기획할 당시 메인 멤버로 도리후를 영입하려 한 이유는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무뚝뚝하고 말주변은 없지만 개그를 짜는 능력만큼은 탁월하다는 것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TBS의 고위층들은 "도리후보다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더 인지도가 높지 않은가?" 라며 지적했고 도리후와 크레이지 캣츠의 소속사인 와타나베 프로덕션 또한 "그런 공개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크레이지 캣츠가 적합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즈쿠리는 "크레이지 캣츠는 멤버 각각의 스케줄을 맞추는 것이 어렵지만,[19] 도리후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라며 도리후 기용에 대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TBS는 이즈쿠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원집합의 도리후 출연을 재가하였다고 한다.
- 이즈쿠리는 도리후에게 전원집합 출연을 제의하고자 아카사카의 TBS 본사 근처 초밥집으로 도리후 멤버들을 초대하여 상견례를 겸한 회식 자리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이카리야는 "지금 콩트 55호의 기세가 막강합니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승산이 없지 않겠소?" 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이즈쿠리는 "확실히 지금의 콩트 55호와 도리후라면 달과 자라[20] 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자라가 달을 이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라며 맞받아쳤고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이카리야는 도리후 동료들에게 "이즈쿠리 씨를 찍 소리 못하게 해주자!"라면서 전원집합에 출연하기로 결정하였다.
- 1971년 3월, 도리후의 소속사 와타나베 프로덕션이 "도리후는 다음 달부터 6개월간 닛폰 테레비의 일요일이라구! 드리프터즈!!(日曜日だョ!ドリフターズ!!)에 출연할 예정이니 전원집합 방영을 반년간 중지시켜 달라. 대안으로 전원집합의 시간대를 메꿀 방송에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를 출연 시키겠다" 라고 TBS에 요구했다. 와타나베 프로덕션은 소속된 간판 그룹 둘을 전부 주말 황금 시간대의 프로에 출연시켜 이득을 좀 보겠다는 속셈이었는데, 물론 이에 격분한 TBS 측에서는 와타나베 프로덕션 소속 연예인들을 전부 퇴출시키자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즈쿠리 PD는 방송국 상부에 "그렇게 해 줍시다. 아무리 닛폰 테레비가 도리후로 새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전원집합 만큼은 안 될 겁니다. 도리후만으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겨우 반 년인데 그 정도는 넘길 수 있습니다."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결국 TBS는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요청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3월 27일 방송분을 끝으로 도리후가 닛폰 테레비로 일시 이적한 뒤, TBS는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의 8시라구! 출발진행(8時だョ!出発進行)을 그 해 4월 3일 부터 9월 25일 까지 방영하며 전원집합의 공백을 채웠다. 시청률은 최고 38%, 평균 15%로 제법 나쁘지는 않았으며 도리후가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도리후의 새 프로그램 일요일이라구! 드리프터즈!!는 같은 해 4월 25일부터 10월 17일까지 방송된 후 예정대로 종영되었고, 전원집합은 10월 2일부터 재개되었다.
- 1984년 6월 16일 사이타마현 이루마 시민회관에서 전원집합 생방송 때 이카리야 쵸스케가 "8시라구!", "전원집합"이라고 외치며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시민회관에 정전이 발생하는 방송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정전 1분 30초 뒤에 다시 전기가 들어와서 다시 "8시라구!", "전원집합"을 외쳤는데 다시 정전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나가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전원이 완전히 나가는 바람에 스태프들이 가져온 손전등을 비추는 임시 조명으로 때우는 도중에도 이카리야는 프로 정신을 발휘해 어둠 속에서도 관객들에게 농담도 하고 게스트를 소개하는 등 방청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정전 7분여 만에 스태프들이 비상 발전기로 조명을 돌리면서 이카리야가 "8시 9분 30초라구!" 라고 오프닝을 속개해서 마무리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문에 출연진과 제작진은 평소보다 빠른 페이스로 방송을 진행했어야 했는데, 웃기게도 후반의 한 단편 콩트 코너에서 카토가 실수로 시무라를 주택 세트의 마루 한 가운데가 아닌 지붕을 받치던 기둥에 던져버리는 바람에, 목각 굵기의 기둥이 부러지자마자 세트가 폭삭 무너져 전개도 하기 전에 콩트를 강제로 종료해 버렸다.
- 시무라 켄은 말년에 한 인터뷰에서 "8시다 전원집합을 찍을 당시에 PD라는 양반들은 대학만 좋은 대학을 나왔을 뿐 코미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드리프터즈 멤버들이 PD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고 심지어 녹화장에서 멤버들이 PD들을 가르쳤다. 지금 PD들도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데 요즘은 PD들이 갑의 위치에 서서 일방적으로 개그맨들 위에 군림한다." 면서 직금의 방송국 풍토에 불만이 많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다만, 시무라 켄은 동시에 "요즘 젊은 개그맨들은 시마다 신스케 처럼 칸무리 방송을 여러개 갖는 것에만 목표를 두면서 신스케 처럼 되지 못하면 개그맨을 그만두고 젊었을 때의 추억으로 남기자는 식으로 개그맨 생활을 한다. 개그맨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웃겨서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밑바탕에 두고 평생 개그를 해서 먹고 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후배들은 개그맨을 하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개그계에 입문하고 자기 일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는 것 같다."면서 직업정신이 부족한 후배 개그맨들도 같이 비판하였다.#
- 무명 코미디언이던 이주일이 하룻밤만에 인기 코미디언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라 불리던 김경태의 연출로 1980년에 TBC에서 방영한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 인기를 얻은 것 덕분인데, 이 프로그램은 제목부터 포맷, 심지어 방송 시간대까지 8시다 전원집합을 모조리 카피해 온 것이었다.* 시무라 켄은 70년대 후반부터 프로그램의 에이스 역할을 도맡아했는데 이주일이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에서 맡은 역할들 역시 시무라 켄이 주연한 콩트를 카피한 것이었다. 1977년에 8시다 전원집합에서 시무라 켄이 카토 챠와 같이 정장을 입고 가짜 수염을 달고 나와서 음악에 맞춰 춤과 판토마임과 기예를 선보였던 '수염 댄스'라는 코너를 베껴서 이주일과 이상해[21]가 나오는 복사판 코미디가 만들어졌고, 여기서 이주일이 팝송 '수지 큐'의 기타 연주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그의 시그니처 무브가 탄생했다. 8시다 전원집합의 코너인 소년소녀 합창단 역시 여의도 합창단이란 코너명으로 카피되었다.
- 열혈 시리즈 다운타운 스페셜 쿠니오군의 시대극이다 전원집합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비틀어 나온 것이다.
- 2001년경? Be-Music Script의 악곡 이벤트중 익명 참여가 조건인 콘테스트[23]의 우승곡이 어느 개그 BMS였는데[24]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주로 이 예능의 장면들을 패러디했다. BGA는 본 프로그램의 몇몇 장면들을 캡쳐해 정신사납게 편집한것 위주인데 시작부터 특유의 손을 뻗으며 '8시라구!'라고 외치는 부분으로 시작하며 주변의 얘애애애애~~~ 하면서 호응하는 함성소리가 왜곡되더니 개버 곡조가 나오는 식. 중간에 뜬금없이 루팡 3세 염력진작전 영화 포스터가 나오거나 야가미 이오리의 팔치녀 모션이 나오기도 한다. 루팡 3세 실사영화가 언급된건 바로 윗 문단에서 연유된것일지도.
- 전설적인 프로그램이었다보니 종영 이후에도 특정 주년 기념 스페셜 방송을 몇번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4년 55주년 방송, 더 드리프터즈 결성 60주년 기념 특집방송을 진행했다.
[1] 오프닝 멘트 후에 부르는 노래는 조금만이야! 전원집합!!(チョットだけョ!全員集合!!)이며, 원곡은 홋카이도 민요인 홋카이본우타(北海盆唄) 이다. 이 노래는 1971년 10월 2일 방송부터 오프닝 곡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도리후의 신곡을 오프닝 때 불렀다.[2] 그 외 엔딩곡으로 いい湯だな를 불렀다. 이후 러브히나에서 리메이크한 노래이기도 하다.[3] 햇수로만 따져보면 거의 16년이지만 6개월이 빠진 이유는 도리후가 어른의 사정으로 타 방송사에 이적하여 1971년 4월 3일부터 9월 25일까지 다른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상세한 내용은 하단의 여담 참조.[4]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라 불리던 김경태 프로듀서가 연출했으며 이주일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삽시간에 인기 코미디언으로 떠오른 바 있다.[5] 콩트 55호는 1966년 하기모토 킨이치와 사카가미 지로가 결성한 오와라이 콤비. 1975년 사실상 콤비가 와해된 이후로 하기모토는 예능인, 사카가미는 배우로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두 사람이 가끔 협연하기도 했지만, 2011년 사카가미가 사망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6] 머리에는 하치마키를 두르고 있는데, 전통적인 일본 일꾼들의 의상같기도 하지만 오키나와의 전통 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7] 둘 다 일본어로 홋카이도(북해도)와 시코쿠(사국)을 훈독으로 잘못 읽은 것.[8] 모든 방영분이 생방송은 아니었다. 방영 초기에는 녹화로 방송되었으며, 종종 도리후 멤버들의 스케줄 사정 상 생방송이 어려울 경우에는 사전에 녹화하는 경우도 있었다.[9] 이 날 게스트로 당시 WBC・WBA 슈퍼웰터급 통합 챔피언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복서 와지마 고이치(輪島 功一)가 출연하여 권투 도장을 소재로 한 콩트를 선보였다. 참고로 와지마는 1970년대 대한민국의 유명 프로권투 선수이던 유제두와 두 차례 맞붙은 적이 있어 한국의 올드 권투 팬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선수이기도 하다.[10] 전원집합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TBS는 토요일 저녁 프로야구 중계를 거의 편성하지 않았다고 한다...[11] 당시 콩트 55호 멤버이던 하기모토 킨이치가 진행을 맡은 후지 테레비의 킨쨩의 쾅 하고 해보자!(欽ちゃんのドンとやってみよう!)에 잠시 시청률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12] 시무라는 베팅 금액이 적었던 관계로 기소유예 되었다.[13] 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의 제목이 가관이다. 불법 경마라구! 전원집합!!(...)[14] 이 시기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8시의 전쟁이라고 불리었다. 우리들은 익살족은 전원집합 종영 후 4년이 지난 1989년에 방송을 마쳤다.[15] 당시 50대인 이카리야 쵸스케와 30~40대의 시무라 켄, 카토 챠 사이의 대립과 내홍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TBS의 고위층들은 나이 든 이카리야보다 그나마 젊고 팔팔한 시무라와 카토를 더 선호하면서 갈등을 더욱 부채질했다.[16] 하필 그 날은 오봉 연휴가 한창일 때라,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바깥 나들이를 간 영향도 크기는 했다.[17] 그렇다 해도 전원집합의 모든 방영분 평균 시청률은 27.3%이다. 1980년대에 왕창 까먹기는 했어도 한창 시절에 벌어들인 시청률이 워낙 넘사벽이었는지라...[18]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춤추는 대수사선의 와쿠 헤이하치로 역이며 한국에서도 와쿠 형사로 유명하다.[19] 당시 크레이지 캣츠는 우에키 히토시는 물론이고 하나 하지메, 타니 케이 등 주요 멤버들이 개인적으로도 연예계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20] 밝고 아름다운 달과 더러운 진흙에서 살면서 얼굴도 못난 자라를 빗댄 관용구. 우리 말로 하자면 천지차이 정도와 맞먹는다.[21] 초기 몇 회는 곽규석이 출연했다.[22] 전원집합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웃으면 복이와요 1기는 사회적으로 큰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고 시청률도 제법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사의 야구단인 MBC 청룡(현 LG 트윈스)을 운영하며 프로야구 중계 시간을 늘리는 과정에서 종영되었다는 것이다.[23] 이후 Wire puller 이벤트의 정신적 전작격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24] Take-o라는 명의를 사용한 아티스트의 8 o'clock tripping이라는 악곡이었다. 정황상 특유의 빽빽거리는 신스음 사용이나 실사 차용 BGA, 특유의 고BPM 때문에 정체는 PUFF라는 개그 BMS 전문 아티스트로 추측될뿐, 공식적으로 밝혀진건 없다. 당장 해당 bmssearch 링크에서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PUFF의 부명의는 PE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