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개국한 라디오 채널에 대한 내용은 KBS 제3라디오 문서
, 1981년에 개국하고 1990년에 폐국한 텔레비전 채널에 대한 내용은 KBS 3TV 문서
, 1972년 개국 및 폐국하고 사회교육방송으로 전환한 동명의 대북/대공 라디오 방송에 대한 내용은 KBS 한민족방송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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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에서 1980년 12월 1일부터 1981년 9월 6일까지 방송하던 라디오 채널. 중파로만 방송했다.[4] 당시 주파수는 639㎑.2. 역사
- 1962년 12월 31일, 김규환[5]이 정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가허가를 받고 투자자를 모아[6] 서울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해 개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호출 부호는 HLCZ, 주파수는 1380kHz, 출력은 10kW.
- 1964년 5월 9일, RSB 라디오서울로 개국하였다.[7] 이 때 여러가지 문제[8]로 인해 체신부에 출력 증강 및 호출부호 변경 허가를 받아 HLKC[9]로, 주파수는 640kHz로 바꾸고, 출력을 20kW로 증강했다.
- 1965년 8월 2일, 삼성그룹이 정식으로 RSB 라디오서울을 인수한 이후 중앙방송(JBS) 라디오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1978년 11월 23일, 중파방송을 공통 10kHz에서 구대륙은 9kHz 간격[11]으로 송출하도록 하는 ITU 결정에 따라 주파수를 639kHz로 이동하였다.
- 1980년 11월 30일 단행한 언론통폐합에 따라 강제로 KBS에 합병하였고, KBS 제3방송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때 전일방송 1224kHz, 서해방송 675kHz도 제3방송으로 전환했다.
- 1981년, 사회교육방송을 송출하던 대구 영일송신소 558kHz와 부산 제1방송 표준FM 97.1MHz를 제3방송으로 전환하여 전국방송 체계를 갖추었으나, 동년 9월 7일 KBS 제2방송[12]에 흡수통합되는 형식으로 폐국하였다. 제3방송의 지역 주파수는 물론이고 HLKC 639kHz까지 제2방송으로 전환되었고 제3방송을 송신하던 KBS 철산 송신소[13]는 인근 KBS 개봉 송신소에 기능을 넘긴 다음 폐소하였다.
3. 특징
- KBS 라디오 채널 중 라디오서울[14]과 같이 광고 방송을 하는 채널이었다. 1981년 3월 7일 KBS에서 광고 방송을 시작했을 때 1TV, 2TV, 라디오서울과 함께 광고를 하는 채널로 지정하여 6개월 간 광고를 했으나 제3방송 폐국 후에는 2라디오에서 광고를 시작했으며,[15] 1991년 3월 11일 라디오서울이 폐국한 후 2라디오만 광고를 하다가 2001년 이후 2FM이 광고 방송을 시작했다.
- 국내 최초 실시간 교통정보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가로수를 누비며'[16]는 1964년 동양방송 개국 때부터 동양라디오를 통해 방송을 시작해서 언론통폐합 후에도 KBS 제3방송에서 송출하다가 제3방송이 폐국한 직후 라디오 서울로 이관하였다.[17]
[1] 폐국 당시 제2라디오에 흡수[출처] 1993년 전기연감(498~503p, 호출 부호는 1992년 자료) 현재는 HLKE-FM으로 바뀌었으며 HLKB-FM은 같은 지역 음악FM이 쓰고 있다.[3] '라디오 부산'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며 서울 본사 '라디오서울'과 대응하는 의미에서 작명한 것으로 보였으나 얼마 못 가 채널 자체가 사라졌다.[4] 표준FM방송은 부산에서만 진행.[5] 천주교 계열. 설립 준비 당시의 과정에서 일본의 '분카 방송'처럼 천주교(중에서도 '성 바오로 수도회')가 일정 부분 관여했다.[6] 이재형을 회장으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구인회 럭키금성그룹 회장, 그리고 조병학을 이사로 추대했다.[7] KBS 라디오서울과는 명칭만 동일하다. 정확히는 '라디오서울' 부분.[8] 우선 본디 허가된 출력보다 더 높은 출력으로 송신하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또한 라디오서울 철산송신소와 당시 1230kHz로 방송했던 DBS 동아방송 개봉송신소 송신탑 사이의 직선거리가 고작 700m밖에 되지 않아 혼신이 많이 생겼던 관계로 정상적인 송출이 거의 불가능했다.[9] 본래는 문화방송(현재의 부산문화방송)이 서울 진출을 위해 1958년 가허가 받았던 호출부호였으나 한 차례 좌절되면서 유휴 상태로 놓여있다 라디오서울이 넘겨받았다. 이후로도 문화방송은 1961년 HLSB로 호출부호를 새로 받고 다시 서울 진출을 시도했으나 재정난으로 또 다시 고배를 마시고 신규 허가 대신 기존 방송면허를 인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10] 기존 JBS에서 TBC로 바꾼 경위에 대해 재밌는 썰이 있다. 동양방송/역사의 개국 문단 참조.[11] 아메리카 대륙은 10kHz 간격 유지.[12] 제3방송을 흡수한 이후 'KBS 제2라디오'로 개칭한다.[13] 구 라디오서울 → JBS → TBC 철산송신소.[14] 구 동아방송-KBS 제4방송. 1991년 3월 11일 폐국하고, 주파수는 SBS AM 라디오에 넘어갔다.[15] 1라디오와 FM 채널 그리고 교육라디오는 일절 광고를 안 했다. 사회교육방송(현 KBS 한민족방송)은 공영방송사 대북방송이라 이 역시 광고가 없다.[16] 송해 선생이 1975년부터 무려 14년간 DJ를 맡았다.[17] 동아방송(DBS)은 언론통폐합 이전에는 명랑교차로라는 출근길 교통정보 프로그램을 방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