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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박한상 朴漢相 | Park Han Sang | |
| |
출생 | 1971년 ([age(1971-01-01)]세) |
충청남도 천안시(출처) | |
국적 |
|
구속 전 거주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60-1[1] |
현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204 대구교도소 |
가족 | 아버지 박순태 (1947년 ~ 1994년 5월 19일) 어머니 조순희 (1948년 ~ 1994년 5월 19일) 남동생 박영상 (1973년생) |
큰아버지 박순영 (1944년생) 이모, 이모부 이관수 (1955년생) 이종사촌 남동생 이석규 (1982년생) | |
학력 | 현대고등학교 (졸업) 원광대학교 (토목공학 90 / 중퇴)[2] |
병역 | 방위병 복무 (1991~1992년) |
범죄 유형 | 존속살해, 방화, 도박죄 |
살해 인원 | 2명 |
선고 | 사형 (형집행 무기한대기) |
1. 개요
부부를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범인은 바로 그 집 큰아들이었습니다. 소문은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고,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앵커 이윤성의 KBS 뉴스 9 오프닝 멘트
대한민국의 존속살인 범죄자. 1994년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장기복역중인 사형수이다.[3]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앵커 이윤성의 KBS 뉴스 9 오프닝 멘트
2. 성장 과정
▲ 박한상의 가족사진. 왼쪽의 인물이 박한상이다. 가운데 부부가 박한상에게 희생당한 부모로, 한겨레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47세(1947년생), 어머니는 46세(1948년생)였다고 한다. 오른쪽의 얼굴을 가린 이는 박한상의 동생이다.
1971년에 아버지 박순태(朴淳泰, 前 고려한약유통공사[4], 현 고려허브 대표)와 어머니 조순희(趙順姬)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으나 막내 남동생이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박순영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집에서 길러지면서 사실상 2남 중 장남으로 컸다. 그가 출생했을 때 아버지는 24세, 어머니는 23세로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이를 얻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대형 약재상 '덕양한약방'을 경영하던 부모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에 장남[5]으로 태어나서 편애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자랐다. 부모는 강남 8학군으로 집을 옮겼고, 매일 교회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아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
강남구의 명문 고등학교 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공부의 공자만 들어도 학을 떼며 질색팔색할 정도의 학업 포기 성향이 짙었고 실제로 항상 성적도 저조했다. 경동시장의 한약방을 기업체로 키워낸 자수성가한 약재상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업을 잇기 위해 부디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오히려 자동차에 더 관심이 많아 자동차 튜닝 분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인해 항상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장남이라서 편애를 받은 것도 있지만, 장남이라서 본인이 원치도 않는 가업을 억지로 물려받아야 했다는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랬으면 부모님을 차근히 설득시키는 식으로 나아가야했으나 그조차도 게을러서 그런 시도는 하지도 않고 가업을 물려받기 싫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재산은 흥청망청 써버렸다는 점에서 총체적 난국이었다.유복하게 자란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욕망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몹쓸 짓을 저지른 성년기처럼 어린 시절에도 선천적으로 끔찍하게 불량한 인격으로 인해서 학교와 병원을 수시로 옮겨 다녀야 했으며, 학창 시절엔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비행을 일삼거나 내기 화투 치고 싸움질과 폭력을 일삼고 동급생들을 못살게 굴며 학생부를 마치 제집 안방 마냥 드나드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박한상이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과 학교 폭력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6]
게다가 박한상은 성인이 되어서도 친구로 하여금 보증을 서게 만들면서 거액의 돈을 구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친구한테 보증을 서게 했다는 점에서 기본 인간성부터가 매우 저열하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과 폭력, 학대로 통제하려고 했지만, 박한상은 그러면 그럴수록 도리어 더욱 엇나갈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부모가 사실은 막장 부모였고 이런 썩어빠진 부모 밑에서 자라서 비뚤어진 것이다.'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기본적으로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가부장제라는 시대의 한계에 찌들어 차별 대우까지 하면서 차남보다 장남인 그를 더 아껴주고 편애했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킨 트러블 메이커였기 때문에 점점 아들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나서게 된 것이다.[7]
비록 박한상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강압적이었으나, 1993년에 18,000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그가 달라고 해서 선뜻 내줄 정도면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정상인으로 개과천선을 시켜보려는 의도였다고 치면 된다. 현재로 치면 약 2500만 원 정도이며, 1989년에 서울에 갓 지어진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2000만 원이었으니 말 그대로 강남 아파트 같은 곳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엄청난 거금을 아들에게 그냥 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편애해 주고 오냐오냐 해주던 아버지도 아들이 도통 마음을 고쳐먹지 않자 참다 못해서 결국 강압적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심지어 박한상이 온갖 도박빚을 지고 사고를 친 걸 걸려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강제 귀국시키기는 했어도 집에서 내쫓지는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래도 명색이 장남이라고 기대를 놓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성격, 훈육 방식과 상관없이 박한상 자체부터가 반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나중에 돈을 목적으로 부모를 살해하면서 확실히 드러났다.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과 지인들도 사건 이후 그를 극심한 패륜아로 규정하고 그 형량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주어질 동정표는 그가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존속 살해를 저지른 이상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한의대 진학에 관심도 능력도 없었다.
한편 박한상은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에 90학번으로 입학한다. 이는 전과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한의대로 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실제 원광대의 의대, 치대, 한의대 전과 제도는 2010년~2015년에 한시적으로 시행되었다가 2015년에 제정된 학칙에 따라 전과가 전격 금지되었기 때문에 박한상이 문제 없이 학교를 제대로 다녔다고 해도 학교를 20년 이상 다니지 않는 이상 애초부터 전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8]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원광대학교/사건 사고 문서 참조.
하여간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원광대에 입학했지만, 박한상은 대학 생활에조차도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이때부터 유흥업소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박한상을 기억하던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들에 의하면 수업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거의 매일같이 땡땡이 치고 놀러나 다녀서 교수들이건 동기건 선후배건 그를 아는 모두에게 소문이 안 좋았다고 했을 정도이다.[9]
그러다가 1991~1992년 경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방위병 복무 중에도 저녁에는 외제차를 몰고 압구정에서 오렌지족 생활을 즐겼는데, 함께 근무한 동료들에 따르면 툭하면 힘든 일을 열외받으려고 했고, 승용차, 여자, 돈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이 특기였다고 하는 고문관이었다고 하며, 그나마 여기까지였다면 동료들한테 "비록 군대에서는 폐급이었지만 사회에선 멀쩡히 잘사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사회에선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폐쇄적이고 군기가 당연시된 단체 생활의 끝판왕 군대에서는 못 버티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도 하고.
소집 해제 후 복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자 아버지가 동네 교회 목사와 상의해서 자퇴시키고 강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프레즈노 퍼시픽 칼리지 부설 어학원으로 도피 유학을 보냈지만 친구들조차도 “결국 거기서도 할일 없이 빈둥빈둥 놀러나 다니고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실컷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당시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대한민국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 미국에서도 제대로 새고 있는 중이었다. 박한상이 유학 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서 미국으로 도피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박한상 본인이 졸라서가 아니라 복학을 포기하자 다른 공부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보낸 것이었다. 미국 유학 중에는 로스앤젤레스 근교 어학원을 다녔지만 역시나 공부를 싫어하는 성격답게 잘 출석하지 않았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폭력 비디오를 탐닉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유학생을 만나 도박에 손을 댔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정작 차별받고 자란 차남이 비뚤어지기는커녕 우수한 성적과 함께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더 이상 편애받는 집안의 기대 대상이 아닌 사고뭉치에 식충이로 전락했다.
박한상은 전형적인 야타족이기도 했는데, 압구정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과 원나잇을 즐기다가 한 번은 함께 원나잇을 즐긴 한 여자가 자길 임신시킨 걸 당장 책임지라고 하는 바람에 부모가 합의금을 내준 적이 있다고 한다. 정황상 낙태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만약 태어났다면 이 아이가 박한상의 유일한 자녀가 된다. 또 한 번은 여자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혼자 도망쳐서 양친이랑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야타족이 된 계기는 스스로가 외모엔 자신이 없으나 돈과 차만 내세우면 웬만한 여자들은 꼬시기 쉽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는 집안이었고, 부친도 교회 집사였다. 특히 부모는 상술하듯 자녀 양육 문제와 유학 문제를 목사에게 상의하고 다닐 정도로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박한상이 고3을 앞두고 교회에서 청소년부 활동을 하면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잠시나마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하지만 위에 계속 나왔듯이 태생부터 성격이 고약했기 때문인지 참회한 지 얼마 안 되어 도박에 빠지거나 친구를 보증 서게 만드는 등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으며 인간으로써 절대 하면 안 될 악행들만 자꾸 저지르며 양친의 골머리만 썩였다.
2.2. 도박 중독
이러한 이력들만으로도 참 가관인데, 그걸로도 모자라 도박 문제로 박한상은 3,700만 원에 달하는 도박 빚을 지게 된다. 원금 2,000만 원. 아마 1,700만 원의 이자를 포함한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단기간에 이자율이 이렇게나 커진 것을 보면 알겠지만, 사채 등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달한 돈이다. 지금도 3,700만 원이 작은 돈은 절대로 아닌데, 당시 이 정도면 한국산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 2세대 3.0을 구매하고도 남을 금액이었고, 2025년 기준으로도 약 8,700만 원 상당으로 제네시스 G80 풀옵션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박한상은 이 도박 빚을 아버지한테 빚을 갚아 줄 것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고, 그는 바다 건너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사건 당시 그는 미국 유학 중에도 도박과 향락에 빠져 학업에 제대로 열중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미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학생을 만나 함께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도박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처음엔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서만 어울렸으나, 나중엔 다른 주로 원정 도박까지 갔다고 하며, 생판 처음 보는 미국인과 도박하다가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의 유혹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했다. 얼핏 보면 유학 생활 중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이 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전부터 이미 천성적으로 인성이 안 좋아 학창 시절부터 학업에 소홀하고 문제를 어지간히도 많이도 일으켰기 때문에 일말의 동정의 여지도 없다. 굳이 도박이 아니었더라도 유흥 등에 빠져 어떻게든 스스로 인생을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도박에 깊이 빠진 그는 하룻밤에 5천 달러 가까이 잃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이 액수는 1994년 기준으로 2023년의 환율로는 1만 달러를 조금 넘기는 금액이다. 하루만에 도박으로 1000만 원 이상을 날려먹은 셈이다. 금전적인 문제가 생기자 1994년 1월 귀국하여 아버지에게 혼다 어코드를 사 달라고 졸라 18,000달러를 받아서 재출국했지만, 그 돈마저 도박으로 또 전부 탕진 크리. 심지어 이 당시 차를 구입하려고 친구에게 보증까지 부탁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94년 4월 부모 몰래 귀국해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는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신용카드 발급 기준이 현재보다 훨씬 느슨했다.[10] 박한상은 이것을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현금을 꿨고, 그 빌린 돈으로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오렌지족 생활을 했지만, 나흘만에 부모에게 귀국 사실을 들켜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친척이 우연히 박한상을 목격한 뒤 부모에게 고발한 것이다. 하지만 박한상은 미국에 돌아가서도 술, 담배, 도박, 마약에 빠져 살다가 3700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방탕하고 막장스런 생활을 두고 봐줄 수 없어 한국으로 아들을 불러들였다. 이 시기에는 그간 무슨 사고를 치더라도 수습해주던 부모도 마침내 화를 내며 손절했는데, 특히 아버지가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야!", "이제 내 아들도 아니니 호적 파서 당장 나가!"라고 가장 크게 꾸짖었다.[11]
3. 사건 이후
현재는 종영된 MBC의 교양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 2015를 통해 알려진 그의 근황(당시 44세)으로, 얼굴은 블러 처리됐지만, 사형수로 21년째 지내 온 세월로 인해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2005년 5월 23일자 KBS 8시 뉴스타임 '송창언의 사건파일'에 따르면 1997년과 2002년에 동료 수형자와 큰 주먹 다툼을 하다가 교도관들에 의해 독방으로 보내졌고 두 달 후 2평 남짓의 혼거실로 복귀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형수는 원래 독방 수감이 원칙이라 이는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사실 가석방 없는 무기수 비스무리하게 다뤄지고 있는 데다 교화 등을 목적으로 혼거 수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다 보니 예외가 적용된 듯 하다. 이 사건 이후에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수형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며, 2005년 기준으로 점심 식사 후 운동 시간 30분을 빼고 방 안에서만 지냈고, 아침 6시에 기상하고 밤 9시에 취침하는 패턴이었다.
MBC 경찰청 사람들 2015 7월 16일 방송분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불혹이 넘은 중년이 되었는데(방송 당시 기준 44세), 본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6년 동안 상담한 교화위원 양순자(1940~2014)의 살아 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모두 거짓이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남의 똘아이 박한상, 이 아이를 6년 이상 상담하면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부모를 살해하고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고도 끝까지 태연했던 아이. 반성은커녕 살아서 나갈 꼼수만 두고 있는 놈. 끝까지 어리석은 짓만 하고 있는 놈. 더욱이 범죄 사실을 끝끝내 부인하면서 오히려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우려고까지 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사형수 상담 30년 동안 이 아이 앞에서만큼 참담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끝내 용서하고 포용할 마음을 내지 못했다.
-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99p 中
그가 양순자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범행을 부인했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부모를 탓하는 피해자 코스프레 일관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양씨는 보통 사형수들을 상담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많은데 박한상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며 아예 상담도 포기해버렸다고 말했다.-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99p 中
그는 박한상의 면회를 갈 때 피자를 사 간 적이 있었는데,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본인이 수감 전 밖에서 먹었던 브랜드의 피자가 아니라고 징징대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교도소에서 만나는 다른 수형자들에게 '현재 내가 재산이 많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일일이 물어보고 다녔다고 한다. 정치/경제 사범 등 법 관련 지식이 풍부한 수형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 행보를 보이며 그가 가석방을 노리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지만 민법상 존속살인자는 상속 대상에서 자동 제외되므로 현재 그에게 남은 재산은 수천만 원의 빚 뿐이다. 결정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탈옥 혹은 중병/중상으로 인한 일시적 형집행정지를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살아서는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
4. 여담
- 사건 이후에는 소변이 마려워서 일어나려는데 무언가 이상한 냄새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칼을 누군가가 쥐어 주었다는 식의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 박한상에게 형이 1명 더 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그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고, 다른 언론들은 모두 그가 큰아들이었다고 보도했으므로 이 기사를 올린 기자가 박한상의 가족관계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는 박한상이 차남이고 박한상 위에 형 박원상이 있다고 적혀 있으나, 이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을 뿐 다른 기사에서는 형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사촌형이었거나 박한상의 신상을 오해해 박한상과 중복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박한상은 장남이 맞고 남동생 박영상 외의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으나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집에 일찍이 양자로 들어가서 형제관계에서 제외되었다.
- 검찰청과 교도소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비켜, 비켜 이씨!!!!", "어딜 차!!!!!"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뉴스 영상을 통해 그대로 방영되기도 했다. 평소 인격이 개차반임을 알 수 있다.
- 패륜 살인까지 저지르며 노렸던 100억대 유산은 정작 결국 단 한 푼도 못 받고 모두 남동생 박영상이 다 물려받았다. 민법 제1004조에는 직계 가족 및 부모를 살해하려 하거나 살해한 사람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1심(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황식 본인은 사형제 폐지론자에 가까우며 본인 스스로도 사형을 피할 명분을 찾아보았다고 인정했을 정도였지만, 당시 법리상 그가 저지른 범죄는 도저히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
- 비슷한 범죄자로 대한민국에는 부천 원미동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 김근우가 있다. 카드 빚을 갚아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후, 먼저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했고, 이어 아버지와 형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현재도 수감 중이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박한상과는 달리 흙수저였다. 박한상은 그나마 동생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김근우는 자기 형까지 죽기 직전까지 중상을 입혔다.
- 크라임씬/이덕만 회장 살인사건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이트는 접속이 안 되지만, 고려허브는 사건 이후에도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접속되지 않는 회사 사이트에 과거 기재된 연혁을 보면 1994년에 새로운 대표 이사가 취임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일대에 여전히 있는 듯하다.
- 원언식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복역 중인 사형수다. 원언식은 1992년 사건을 일으켜 1993년 11월 23일 판결 확정으로 사형수가 되었고 박한상은 1994년 사건을 일으켜 1995년 8월 25일 판결 확정으로 사형수가 되었다.
- 죄질이 워낙 나쁜데다 반성하는 기미도 전혀 없다 보니 그가 사형 판결을 받은 후 친척들, 친구들, 지인들, 선후배들, 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원나잇 상대들, 학창 시절 교사들 등 그를 단 한 번이라도 거쳐갔던 사람들 중 누구도 면회를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재판이 진행 되던 도중에 남동생 박영상이 한 차례 면회를 갔었으나, 형이 참회를 하기는커녕 무죄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고 그 뒤로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으며, 양순자 교화위원이 마지막 남은 단 한 명의 면회객이었지만, 반성을 모르는 뻔뻔한 태도를 끝내 고치지 못했던 박한상을 보며 결국 그녀마저 포기하게 되면서 그에게 면회를 오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 재판 기간 중 구치소에서 사식 한 번을 못 먹었는데, 남동생을 포함한 일가친척, 친구, 지인 모두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연을 다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걸 본 박한상의 담당 검사가 그를 불쌍하게 여겨 햄버거를 몇 번 사주자 '고맙다'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변호사 선임도 못 해서 국선변호인의 변호를 받을 뻔했는데, 담당 검사가 자신의 연수원 후배에게 무료 변론을 해 줄 것을 요청해 검사 후배의 변호를 받았다고 한다. #
- 양순자 교화위원은 '그를 용서하지는 못했어도 피해자인 그의 부모는 너무나도 가여웠다'며,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이들이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 크리스천이었음에도 한 승려에게 부탁해 두 사람에게 직접 천도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 목욕하고 금식하면서 서교동에서 천호동까지 가 아침 10시부터 2시간씩 사흘간 스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연신 절을 올렸다고 한다.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계시다면, 이제 그만 당신 자식을 용서하시고 평안한 곳으로 가시라'고 마음을 다해 절했다. 기도가 끝나고 지방을 태울때 그 재와 연기가 산사 위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세상 모든 고통을 땅 위에 두고 두 사람이 영가가 하늘 위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본인은 부모로부터 편애를 받았고 동생인 박영상은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았어서 형제 간 사이가 안 좋았을 법 한데도 사건이 있기 전에는 동생과의 사이가 의외로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한상의 면회를 갔었을 때 죄를 인정하거나 죄책감 같은 것도 없이 계속 뻔뻔하게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해서 두번 다시는 형을 찾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2025년 8월 21일, SBS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189화로 다뤄졌다. 여기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박한상의 어린시절 사진이 공개되었고 해당 사건을 수사했던 조상복, 한성희 형사가 출연했다.
[1] 현재 주소 삼성로122길 19. 집은 살인 사건 이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현재는 리모델링되어 한 기업체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2] 원광대학교 중퇴 이후 다녔던 어학원은 정식 학력이 아닌데다 이마저도 다 수료하지 않았다.[3] 첫번째는 원주 왕국회관 화재 사건을 일으킨 원언식이다.[4] 1991년에 박순태 등 전국의 한약업자 98명이 7억 5,000만 원을 출자해 세운 법인이다.(관련 기사)[5] 다만 큰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장남이긴 해도 장손은 아니다.[6] 있는 집 자식이라서 퇴학을 면한 비슷한 예가 바로 이영학이다. 거기다 이 시절에는 부모와 교사의 체벌이 당연했듯 학생 간의 물리적 다툼도 정말 심한 경우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시대도 잘 탄 것이기도 하다.[7] 사실 자상했을 때는 오냐오냐할 정도로 너무 자상해서 문제였지 강압적으로 변한 후의 강압적인 태도도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8] 다만 이 무렵에는 국내 사회 어떤 분야에서든 뇌물이 만연하던 시대였으니 아무리 제도적으로는 불가능했다 해도 뇌물을 통해 전과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9] 이 무렵엔 강성 운동권들이나 데모하느라 휴학하거나 땡땡이치는 경우가 많았지, 박한상의 경우는 그런 정치적 행보 없이 순전히 유흥 및 불성실의 이유로 땡땡이치는 거라 동급생들에게도 동정받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10] IMF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IMF 이후로는 국민의 정부가 IMF로 인해 위축된 내수시장에 활기를 돌게 할 목적으로 신용카드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해서 더더욱 가능했다. 그러다 결정타를 맞은 사건이 바로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이다.[11] 그리고 이 당시에는 차별받고 자란 남동생이 부모의 바램대로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부모는 이제는 차남을 더 편애하고 그에게 기대하는 상황까지 겹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