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확인불가[1] |
출생 | 1917년 10월 3일 |
평안북도 정주시(定州) 정주읍(定州邑) 성내동(城內洞) | |
사망 | 1978년 9월 4일 |
학력 | 난징 국립중앙대학[2] |
군 경력 |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완남참(晥南站)/옌후조(燕湖組) 부관 충의구국군총지휘부(忠義求國軍總指揮部) 참모처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01호[3]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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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19년 10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정주읍(定州邑) 성내동(城內洞)에서 태어났다. 중국 난징 중앙대학(南京中央大學)에 입학하게 된다.2. 독립운동
1942년 6월 중국인 학생 장쟈지에저(張家傑著)의 천거로 중국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완남참(晥南站) 및 연호조(燕湖組) 주임 이시칭(李世淸)의 부관이 되었다. 중국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지역 부서와 연계하여 일본군의 주둔 위치와 병력 규모, 병력 이동 상황 등을 수집하고, 일본군 내 한적사병에 대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1943년 6월 난징 중앙대학에 재학하며 임시정부와 연계되었던 송지영(宋志英) 등이 일제에 체포되자, 중국 제 3전구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1944년 장동식(張東植) · 김해일金(海一) · 박재성(朴在成) · 김성원金成元) 등과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하고 지하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어 제 3전구 관하의 충의구국군총지휘부(忠義求國軍總指揮部) 참모처의 참모로 임명되어, 정천(鄭天)[4]·박재성 등과 활동하였다. 1945년에 들어 장동식(張東植) · 임계원 · 박재엽 등과 우후(蕪湖) 주둔 일본군 내의 한인병사 2백여 명을 상대로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후 장동식으로 하여금 한적 사병 김권(金權), 박승유(朴勝裕), 신의철(申義澈), 이희화(李熙和) 등 10여 명을 광복군에 입대시키게 하였다.
1945년 야전방송을 통해 대적심리전을 전개하여 한적 학병 7명을 탈출시켜 광복군에 입대시키기도 했다. 1945년 8월 초에는 열세한 한국군 병력으로 항저우에 주둔한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3.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와 제 1지대 제 2구대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우후지구(蕪湖地區) | 박승학 |
난징지구(南京地區) |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
상하이지구(上海地區) | 김용, 박시준[5] |
항저우지구(抗州地區) | 전호인, 정영호[6], 유익배 |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7]
1950~60년대 영화사를 운영하며 홍콩에서 한중합작 영화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4.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6·3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4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