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고중민(高仲民)[1], 김중민(金仲民)[2] |
출생 | 미상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 |
사망 | 1958년 (향년 미상)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204 대구교도소 옥사 | |
독립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지하공작원 |
경력 |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사회당 조직부장/노동부장 |
상훈 | 미서훈 애국지사 |
[clearfix]
1. 개요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 1955년 개천절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 피해자이다.2. 생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에서 태어났다. 이승만 암살 혐의로 자세한 인적사항은 기록되지 않아 확인이 필요하다.일본 경찰에서 형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상범으로 잡혀 온 학생을 감싸준 문제로 해직당했다고 한다. [3]
3. 독립운동
일본 치하의 베이징에서 중국 국민당을 위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던 김재호[4]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의 경로를 통해 충칭까지 오게된다. 그는 충칭에서 1년 정도 지낸 뒤 국내에 잠입해 공작할 것을 자청했다.충칭으로 올 때 이용했던 국민당 지하조직을 통해 난징까지 갔다. 그곳에서 난징 국립중앙대학 에 유학중인 한국 유학생들과 접촉했다.
1943년 6월 중순[5],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중경에서 파견된 한국독립당 소속 김병호(金柄豪) [6]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하였다.[7]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
나를 찾아 온 그는 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이름은 김중민(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옥사) 내가 그 외진 절간에 기숙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처음 그가 자기의 내력을 밝혔을 때 나는 적지 않아 놀랐으나 한 편 반갑기 한량 없었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스촨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8]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스촨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8]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고 고문으로 인하여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 등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9]
김병호와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와 만선일보를 거쳐서 상하이시보의 기자로 있다가 난징 국립중앙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병호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난다.
훗날 정정화[10]의 장강일기에 대한 김병호 지사에 대한 회고는 다음과 같다.
고중민[11]은 고등계 형사로 있을 때 이른 바, 사상범으로 글려 들어온 학생을 감싸주었다가 일본 경찰에게 몰려 쫒겨났는데, 그 후 국내를 빠져나와 광복진영에 합류한 것이었다. 고중민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숨김없이 밝혀 우리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난 후 충칭에서 1년 남짓 임시정부의 일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국내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 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金陵)대학(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12]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 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金陵)대학(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12]
4. 광복 이후
1948년 조소앙 조시원 민영수 양우조와 함께 사회당[13]창당회원이 되었고 사회당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 다음해엔 노동부장을 맡는다.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이 납북되는 바람에 해체되었고 김병호(김중민)은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었다. 이승만의 심복이라는 특무대장 김창룡의 함정수사로 인해서 1955년 개천절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14]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1958년 옥사하고 말았다.[15]
이승만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이유로 국가보훈부 공훈록에는 등록되어있지 않지만 임시정부 김자동 임시정부사업기념회장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5. 참고문헌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267·323면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 6권 444·615면
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 9권 857·867면
고정훈, 秘錄 軍.(下) 고정훈. 동방서원 1967 pp. 372~377
송지영, 나의 유수기(옥중기)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KBS 인물현대사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2편 조소앙> 2005년 1월 14일자 방송분
[1] 정정화, 장강일기에서는 고중민으로 되어 있어서 충칭에서는 고중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2] 난징 국립중앙대학 송지영과 접선시기와 광복 이후 사회당으로 활동할때는 김중민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었다.[3] 1937년 경으로 추정된다.[4] 한국독립당 중앙상임위원[5] 김용의 회고록 p. 90에 따르면 송지영과 김병호와 접선해서 모의한 일을 1943년 6월 중순으로 기억하고 있다.[6] 김중민金仲民, 고중민高仲民, 전직 형사에서 임시정부로 귀순함.[7] 기말고사때라 이일범과 조일문은 김병호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8] 송지영, 나의 유수기(옥중기)[9] 1943년 7~8월즈음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9월 새학기가 되니 알고 있는 조선인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10] 김의한의 아내, 김가진며느리, 김자동선생의 어머니[11] 본명 김병호, 고중민, 김중민이라는 이름 사용[12]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pp. 220~222[13] 1948년 12월 조소앙이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창당한 정당. 조소앙은 원래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었지만 이후 남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현실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김구를 떠나 이 정당을 창당해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또한 자신의 삼균주의를 실천하는 정당을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다.[14] 북한으로 납북된 조소앙 선생은 1955년 납북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재건을 추진하였고 북한에서도‘중립화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납북인사들의 독자적 평화통일운동을 추진하려 노력하였던 시기라 김창룡의 조작사건으로 밝혀진다.[15] KBS 인물현대사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2편 조소앙> 2005년 1월 14일자 방송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