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확인불가[1] |
출생 | 1909년 1월 15일 |
황해도 해주시(海州) | |
사망 | 1990년 4월 26일 |
본관 | 계(성씨)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학력 | 난징 국립중앙대학 |
독립운동 경력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대원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68호 |
상훈 | 대통령표창(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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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09년 1월 15일 황해도 해주부(海州) 항동에서 출생했다.그는 일찍이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여 난징중앙대학 학생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충칭으로 피신하였다.
3. 독립운동
1943년 5월 중국 난징중앙대학 재학 중, 동창생 송지영(宋志英)·박익득(朴益得)·박철원(朴哲遠)·신영묵(申榮默)·이일범(李一凡)·이정선(李正善)·조일문(趙一文) 등이 중국 정부 특파원 링즈난(凌志男) 상교[2]과 접선하여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 직간접으로 간여하면서 독립운동가의 피신과 군자금 모집을 도왔다.1943년 6월 말, 접어들면서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송지영 등과 접촉하고 있던 김병호(金柄豪)가 한인 밀정의 밀고로 상하이(上海)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어서 중앙대학 학생들은 물론 화중(華中) 일대에 걸쳐 검거 선풍이 일어났을 때 안후이성(安徽省)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송지영·김덕원(金德元)·이일범·이정선·조일문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안후이성 우후(蕪湖) 지방으로 피신한 이후에도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장(제3분처 주임) 김문호(金文鎬)의 밀명을 받고 안후이성 우후(蕪湖) 일본군의 동태를 조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화폐 200만원을 군자금으로 공여하였으며, 밀파된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1944년 6월 광복군 제3징모분처에 정식 입대하였고, 일본군 정보 수집 및 한인 청년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4. 광복 이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대표최고위원을 맡아 1968년까지 활동하였다. 정계 은퇴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0년 4월 26일에 사망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계지풍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5. 참고 문헌
계지풍의 공적정보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