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로동당의 파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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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의 계파 연안파 延安派 Yan’an faction |
▲ 연안파 간부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두봉,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무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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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초기에 존재했던 정파. 중국 연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연안파로 불렸다.2. 일제강점기
1940년을 전후하여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일부가 이탈해 옌안으로 왔고 이들은 김두봉을 위원장, 최창익과 한빈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조선의용군을 군대로 갖추었고 태항산 전투 등 중국공산당 군과 함께 일본군과 실제 교전을 치르기도 하는 등 치열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의용군의 총사령관은 김무정 장군이었다. 조선독립동맹은 태평양 전쟁 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연합작전을 구상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3. 귀국
일본군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을 결정했는데 교통 등의 사정으로 인해 연안부터 압록강 국경까지 걸어서 귀국하느라 12월 경이 되어서야 북한 땅에 들어올 수 있었다. 심지어 소련군에 의해 조선의용군은 무장조차 해제당해야 했고 일부는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북한 입국 후 이들은 조선신민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남한 쪽에도 서울로 부주석 한빈을 보내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뒤 백남운을 수장으로 하는 남조선신민당을 결성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다. 이후 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해 북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김두봉이 북조선로동당의 위원장 직에 오르는 등 이들은 북한 정권 수립 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의 가장 큰 자산은 역시 조선의용군이라는 군대를 보유했다는 점으로 김무정, 방호산 등 연안파 출신 장성들이 조선인민군 내에서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그러나 약점이 있었다면 첫째는 단결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리더로 인식되었던 무정은 연안파 간부들에게 무시당해 귀국 길에 단체로 무정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1] 무정 외에 박일우가 숙청당할 때도 박일우와 사이가 좋지 않던 연안파 인사들은 오히려 박일우의 숙청을 도왔다. 또한 빨치산파가 김일성 중심으로 똘똘 뭉친것과는 달리 특정한 리더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김두봉이 리더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치인보다는 학자풍이었던 데다 원로로서 대접받았을 뿐 실권 없는 상징적 국가수반 역할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으로 이들의 독립운동은 분명 치열했고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조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장소(연안 일대)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조선민중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보천보 전투라는 국내진공 작전을 벌여 민중들에게 크게 이름을 알린 김일성 세력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