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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관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팔로군의 유격전 방침 결정3.2. 린뱌오의 출격3.3. 평형관의 함락과 산서성의 붕괴
4. 결과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平型关大捷(평싱관 대첩) 또는 平型关战斗(핑싱관 전투).

1937년 9월 25일, 옌시산(阎锡山, 염석산)의 2전구 산하에 속해있던 린뱌오의 팔로군 115사단이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 5사단 21여단 소속 보급부대를 기습한 전투이다. 중국 공산당중일전쟁에서 거둔 승리 중 백단대전과 더불어 제일 잘 알려져 있다.

2. 배경

1937년 7월의 베이핑-톈진 전투와 8월의 베이핑 탈환전이 중국군의 실패로 끝난 이후 북지나방면군은 중국군의 집결지인 바오딩을 목표로 남하하여 9월 24일에 바오딩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일본군 5사단은 바오딩 공략을 지원하라는 참모본부의 명령을 받았으나 전공에 눈이 멀어 참모본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9월 19일 독단적으로 2전구 사령관 옌시산이 통치한 산서성을 침공했다. 이에 옌시산은 산서성의 성도 타이위안에서 동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평형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일본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에 따라 옌시산의 2전구 산하에 소속되어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주더의 지휘 아래에 115사단과 120사단이 일본군에 대한 유격전을 수행하였다. 옌시산은 주더에게 평형관 수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주더는 팔로군의 특기는 정면 전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3. 전개

3.1. 팔로군의 유격전 방침 결정

전쟁 극초기인 1937년 8월 22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린 낙천회의(洛川会议)에서 마오쩌둥은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함과 동시에 국민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유격전쟁을 발전시킨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회의 이후 팔로군 산하 115사단과 120사단은 옌시산의 명령에 따라 산서성 방어를 위한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어 129사단도 산서성에 진입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자 마오쩌둥은 9월 16일과 9월 17일 전보를 보내 홍군의 전부를 집중하여 유격근거지를 만들자고 했던 이전의 계획을 수정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 유격대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9월 21일, 일본군의 선봉인 5사단 21여단이 평형관으로 진출했다. 이날 주더, 런비스, 덩샤오핑, 쭤취안이 타이위안에 팔로군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 공산당 북방국과 팔로군 행동방침에 대해 토론했다. 류사오치는 화북에서의 독립적인 항전을 전개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산서, 하북, 산동에서 무장투쟁을 선동하자고 주장했다. 마오쩌둥 역시 이날 펑더화이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오늘 홍군은 결전 문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후에 자기의 훌륭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자기의 장점을 발휘하게 되면 결정적 역할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장점이란 바로 정규전이 아니라 제대로 된 독립자주적 산지 유격전이다.

한편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옌시산 부대가 옌먼관으로 철수하자 오대산으로 진주한 팔로군 본부는 허룽의 120사단에게 서쪽 방향으로 진출하여 옌먼관의 옌시산군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린뱌오의 115사단에게는 동쪽으로 가서 평형관으로 진군하는 일본군 병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파일:팔로군평형관입성.jpg
평형관을 통과하는 팔로군

3.2. 린뱌오의 출격

9월 22일, 21여단이 링추에서 평형관으로 진출해왔다. 23일과 24일에 걸쳐 일본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평형관 정면과 단성구에서 중국군 15군, 17군, 19군과 교전을 벌이며 평형관을 놓고 전투를 벌였다. 이에 평형관에 주둔하고 있던 17군 산하 84사단과 3사단은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치열하게 저항했다. 9월 24일, 린뱌오가 지휘하는 115사단이 폭우 속에서 란좡에서 평형관 동북쪽의 바이야타이로 전진하여 쇼자이촌에서 라오예묘 지역에 매복하며 일본군의 주력이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9월 25일 새벽, 제때 철수하지 못한 21여단 소속 1천명의 보급부대가 팔로군이 매복한 채가곡, 소채 지역에 나타났다. 팔로군은 일제히 높은 산에서 포화를 퍼부어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그 틈을 타서 대규모 백병전을 전개, 상당수의 일본군을 섬멸하고 여러 차량을 파괴했으며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여럿 노획했다. 또한 24일에서 25일에 걸쳐 115사단 독립단이 라이위안, 링추 지역에서 일본군 수송선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야오잔 지역에서 일본군 증원부대를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사상케 하는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파일:평형관에서교전하는팔로군.jpg
일본군에게 기관총을 발사하는 팔로군 병사

린뱌오는 적의 보병 1개 영을 전부 섬멸하고 차량 80대를 파괴했다고 보고했으며[1] 팔로군 참모처는 9월 26일, 전국에 115사단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8로군은 산서성 평형관에서 만여 명의 적군과 격전, 반복 공격을 거듭한 끝에 진공하는 적군을 전멸시켰다.
파일:무기노획팔로군.jpg
일본군의 무기를 노획하고 즐거워하는 팔로군 병사들

3.3. 평형관의 함락과 산서성의 붕괴

하지만 일본군 2혼성여단과 15혼성여단의 지원을 받은 일본군은 끝내 9월 30일 평형관을 점령했다. 옌시산은 신커우전에 2방어선을 구축, 10월 2일부터 신커우전-타이위안 전투에 들어갔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11월 8일 타이위안을 잃고 린펀으로 철수하였다. 일본군은 1938년 1월 산서성 남부로 진격, 3월 6일 린펀과 푸저우를 함락시키면서 산서성을 일본군의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에 숨은 중국군을 소탕하기가 어려워지자 5사단을 비롯한 일본군 주력부대는 산서성에서 이동했다.

4. 결과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 3천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1천 명으로 정정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군의 피해는 200명 정도였다. 분명히 획기적인 전투인 것은 사실이었고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의 공이었으나 수천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는 식으로 오랫동안 과장되어 정치적 선전에 동원되었다.

5. 참고 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 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태평양 전쟁사 1권, 일본역사학연구회, 채륜.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제2차 세계 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6. 관련 문서



[1] 중국 공산당 역사는 100여대로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