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두 국가를 동시에 인정하자는 운동. 양안의 통일반대론이자 타이완 독립운동과도 구별된다.[1] 공식적으로는 리덩후이 시대에 양국론[2]으로 한 번 주장된 바 있다. 이쪽도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명목상 영토가 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이니 일종의 분리주의라 볼 수 있다. 이전에도 중화대만민주국(中華台灣民主國)이나 중화대만공화국(中華台灣共和國) 등의 새 국호가 제안된 바 있다.당연히 대만의 중화민국을 부정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대만 독립과 똑같이 반가운 소리가 아니며 아예 중화민국 자체를 싸그리 부정하고 "대만"으로 새 살림 차리자는 범록연맹 내 강경파들도 이를 반가워하지 않는다.[3]
본 항목은 두 개의 중국과 관련된 역사적 흐름 위주로 서술되어 있으며 관련 내용은 화독 항목에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2. 역사
중국은 마지막 중화제국인 청나라가 붕괴하면서 도래한 난세의 여파로 지금까지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신해혁명기에는 청나라와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대립했고, 그 다음에는 군벌들의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중국국민당의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대립했다. 국민당의 북벌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의 소비에트 지구가 독자적인 정부를 꾸려나갔으며 중일전쟁 동안에는 일본 제국이 만든 괴뢰국인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가 국민정부와 대립했다.일본이 물러나자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그 결과 국민당은 패배하여 중국 대륙을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타이완 섬에 근거지를 옮겨 권토중래를 노렸다. 이후 이 분단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라는 두 개의 중국이 대립하고 있다. 이렇게 대치 상대만 바뀐채 두 개의 중국은 100여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즉, 청나라 이후로 진정한 하나의 중국은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이루어 본 적이 없고 단지 정치적, 외교적 용도로만 사용되는 상황이기에 이에 지쳐 두 개의 중국이라는 중국 양국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2.1. 북양정부 시기 (1911년 ~ 1924년)
신해혁명으로 건립된 중화민국 군사정부는 청나라와 대치하였으며 치열한 혁명 끝에 2200여년 이상 이어져오던 중국의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여파로 티베트, 몽골, 투바, 신강이 독립한다.이후 임시약법에 따라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수립된다. 북양정부는 오족공화를 주장하며 중국의 통일을 주장했으나 현실적으로 재정복을 할 역량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에 무리하게 제정으로 회귀하려다 반대파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반대파들은 호국군을 결성해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을 공격했고 위안스카이는 반발에 못 이겨 황제를 포기하지만 실의에 빠져 죽는다. 이로써 남부의 군벌들도 독립상태에 이른다.
한편 수장이 죽자 위안스카이의 부하들은 독자 군벌이 되어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두고 내전을 벌이고,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껍데기 아래 수많은 군벌들이 난립하는 시대로 접어든다.[4] 북양군벌들을 피해 남방으로 내려갔던 공화파들은 남부의 군벌들의 지원으로 중화민국 호법정부를 수립하여 투쟁한다. 이때 쑨원을 중심으로 1919년, 중국국민당이 창당되고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천두슈, 리다자오를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역시 창당된다.
2.2. 국민혁명군 북벌 시기 (1925년-1928년)
초기의 국민당은 군대도 제대로 보유하고 있지 않아 남방 군벌들에게 의지해야 했는데 윈난의 탕지야오는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광둥의 천중밍은 노선갈등을 겪다가 영풍함 사건으로 공격을 당하였다. 그러던 와중 소련, 중국공산당과 제휴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1차 국공합작이다. 이를 통해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현대적인 군대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광저우에서 일어난 상인계층의 반란 을 진압할 수 있었고 자신들과 광둥을 두고 대립하던 천중밍을 완전히 진압한다. 이후 상단 사건과 천중밍 토벌에서 배신한 객군들도 진압한다.1927년, 중국국민당은 개혁파 군벌[5]과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을 시작한다. 1차 북벌에서 후난과 후베이를 장악하고 있던 우페이푸를 허난 지역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장시성과 저장성을 장악했던 쑨촨팡를 몰아냈다. 국민당을 기존 근거지였던 광저우에서 혁명의 성지인 우한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 시기를 우한 국민정부라고 한다. 하지만 북벌 중 큰 위기가 발생하니 바로 국공결렬이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에서 후한민, 쉬충즈를 숙청하고 중산함 사건에서 소련고문단을 숙청한 총사령관 장제스는 본격적으로 공산당을 국민당 내부에서 축출하려고 했고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해서 우한 정부와 대립했다. 처음에는 장제스 토벌을 주장하던 우한 정부도 공산당이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국민정부를 공산화하려는 시도를 하자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갈라지게 된다.
1928년, 2차 북벌로 북양정부의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대원수 장쭤린과 국무원은 선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의 장쭤린을 암살한다. 이로인해 혼란에 빠지자 차기 지도자인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항복하며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가 통일된다.
2.3. 제1차 국공내전 (1931년-1936년)
하지만 국민정부도 군벌 연합체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머지않아 반장전쟁이라는 내전이 발발한다. 또한 공산당이 해방구를 건설하더니 급기야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국하였고,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어 만주가 통째로 중화민국에서 떨어져나가 만주국이라는 일본의 괴뢰국이 되어버린다.이런 상황에서 장제스는 광둥파와 동북군벌의 지원으로 탕성즈, 리쭝런 펑위샹, 옌시산을 전부 격파하며 반장전쟁에서 승리했다. 한편 지방에선 국경분쟁이 발생한 티베트를 공격해서 명목상의 항복을 받아내고 신강에서도 독립 시도를 진압한다. 또한 5차례의 초공작전으로 공산당을 궤멸 직전에 도달하지만 대장정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고, 옌안으로 피신한다. 국민당이 공산당을 끝장내기 전에 일본 제국의 침략이 시작된다.
2.4. 중일전쟁 시기 (1937년-1945년)
1937년 일본이 중화민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일본은 난징, 상하이 등 중화민국의 영토 상당수를 점령한 뒤 점령지에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등 여러 괴뢰국을 세우더니 왕징웨이 공작으로 국민당의 거물인 왕징웨이를 회유하여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한다. 왕징웨이 정권은 정통 중화민국을 자칭하며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대적했지만 실상은 일본의 괴뢰국일 뿐이었다.당연히 왕징웨이 정권을 중국인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일본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는 허수아비 정권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면서 왕징웨이 정권은 붕괴되고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환도한다. 한편 이 시기 신강 지역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2.5. 제2차 국공내전, 이후 현재 (1949년-현재)
하지만 일본이 물러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대륙의 패권을 두고 국공내전을 벌인다. 하지만 3년간의 내전 끝에 국민당은 밀리고 밀려 중국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철수한다. 이후 국민당이 관할하던 도서지역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지만 몰락할대로 몰락한 국민당은 단독으로 대륙을 탈환할 힘이 없었고, 공산당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미국이 태도를 바꿔 국민당을 지원하면서 대만 섬을 쳐들어가지 못한다.이후 양안 사이에는 불안정한 평화가 찾아오고, 대만 섬의 중화민국과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여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중화민국은 시기가 갈수록 UN에서 탈퇴하고 수교국들을 잃어가는 등 국제적으로 점점 위축되어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사례들에 비하면 가장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시진핑 집권 후 극단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2.5.1. 차이잉원 정부 이후
범록연맹 계열의 차이잉원 후보가 총통직에 오르면서, 마잉주 시절과는 다르게 하나의 중국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부천대 후 수십년간 존치시켜오던 푸젠성 정부와 타이완성 정부를 해산시켜 완전히 투명화 시키거나, 일국양제 수용을 대놓고 거부하고 영어를 시험적으로나마 공용어로 지정하는 등, 탈중국을 도모하고 있다.그러나 의외로 대독파는 그 색을 점점 잃고 있는데, 차이잉원 총통은 범록연맹이면서도 '대만은 이미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이라고 발언하거나, 자국의 공식 명칭을 중화민국(대만)이라고 쓰는 등, 대독파에서 주장하는 '대만 공화국'이 아닌 기존의 '중화민국'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화(中華)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대만의 자주성까지 주장하는 성향 덕분에 중도층은 물론 범람연맹 지지자들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으며, 현재 대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이며 대만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두 개의 중국' 노선이 힘을 얻는 중이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중국을 빠르게 손절한 것이 대만의 방역과 외교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은 대독은 물론이고 화독 역시 거부하며[6] 전쟁까지 각오 중이므로 대만도 이를 대놓고 국제사회에 주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신냉전 이후에는 서방권 국가들이 태도를 바꿔[7] 대만과의 재수교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대만을 불침항모로 만들기를 원하는 터라 이전에는 없던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다. 특히 대만을 더러 공식적인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미국은 1970년대에 핑퐁 외교가 시작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승인하고 원래의 중국이었던 중화민국과는 단교를 유지 중인 바 있다.
하지만 2025년 시점에서도 이렇다할 재수교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3. 만일 두 개의 중국이 인정될 경우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영토는 그대로 유지된 채 양국이 승인된다.
- 중화민국은 미승인국 신세를 벗어나며 당연히 UN 등에 상임이사국이 아닌 일반 회원국으로 재가입이 가능해진다.[8]
- 스포츠계에서는 중화 타이베이가 폐지되고 별도의 스포츠용 상징 없이 청천백일만지홍기, 중화민국 국가를 사용하며 중화민국이라는 이름 그대로 출전이 가능해진다.
- 중화민국은 단교했던 국가들과 재수교를 하려할 것이며 각국의 타이베이 대표부는 점차 정식 대사관 또는 영사관으로 전환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9]
- 두 중국은 두 개의 콩고처럼 국제 사회에서 구분하기 위해 대륙은 중국 베이징(China-Beijing), 대만은 중국 타이페이(China-Taipei) 또는 중화 베이징(Chinese Beijing),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로 불릴 가능성이 높다.[10] 또는 북중(北中, North China)이나 남중(南中, South China), 중공(中共, China Communist)이나 중민(中民, China Democratic)으로 불릴 가능성도 존재한다.
-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대륙수복 이후 대륙으로 묘를 옮겨달라고 유언 했지만, 이 경우 그의 묘는 대만에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 대륙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휘날려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게 된다. 반대로 대만에서도 "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가칭) 등 오성홍기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 양안관계라는 명칭이 "쌍중관계(雙中關係/双中关系)", "양중관계(兩中關係/两中关系)" 등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省)은 헌법상 타이완 성을 포함한 23개에서 22개로 줄어들며 중화민국도 미수복지구를 모두 포기하고 타이완 성, 푸젠 성 2개로만 한정된다. 이에 따라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시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11]
- 양국을 왕래할 시 여타 국가처럼 별도의 통행증이 아닌 여권이 원칙적인 신분증명서 역할을 하게 된다. 통행증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양국 기준으로 홍콩, 마카오로 축소될 확률이 높다. 양호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유럽 솅겐 지역에 따라 그냥 서로의 신분증을 인정할 수도 있다.
- 중화민국은 대만이 완전한 본토가 되었으므로 타이완성을 폐지하게 되며 최고 행정구역은 성(省)에서 현(縣)으로 한 단계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 중화민국령 푸젠 성은 명목상 푸젠 성 전체의 관할을 포기했으므로 해당 관할구역의 이름을 딴 진마(金馬) 성으로 개칭되거나 위에 전술한대로 성(省)을 폐지 후 진마현(金馬縣)으로 개칭할 가능성이 높다. 정규군이 아닌 국경수비대가 방위하게 된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위성정당인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은 목적을 잃게 되었으므로 해체 또는 개편될 수도 있다.
- 쌍십절 행사를 양국이 합동 개최할 수도 있다.
- 중화민국은 개헌으로 영토를 대만과 부속도서로만 한정하고 통일과 관련된 조항들을 삭제해 "중화민국 제2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 계획상 대만이 종점인 징타이고속공로, 징타이고속철도 등은 푸젠성으로 종점이 변경될 것이고, 이에 맞춰 명칭이 변경될 것이다.[12]
- 미승인국이라는 특징 때문에 그동안 대만인들의 입국을 꺼려 왔던 조지아와 세르비아가 대만 입국을 허용 및 입국 요건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4. 관련 문서
해당 항목 참조[1] 두 개의 중국 지지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복속을 거부할 뿐 일단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아예 자신들이 중국이라는 것을 부정한다.[2] 다만 이 개념을 만든 리덩후이 본인은 퇴임 후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임을 밝혔다.[3] 범록연맹 전체가 두 개의 중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중화민국"에서 "대만"으로 전환하기 위한 과도기 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온건한 범록연맹은 국민당 독재 시절의 유산만 없애고 중화민국 자체는 유지하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중화민국 국가에서 우리 당(국민당)이라는 가사를 수정하거나 장제스 관련 도로명(中正路, 介壽路 등)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있다. 후술할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당장 차이잉원 총통마저도 비록 범록연맹 소속이지만 중국 양국론자다. 요즘에는 대독파보다 화독 온건파가 훨씬 많다.[4] 물론 그와중에도 외몽골 출병처럼 구 청나라의 영토를 복속하려는 시도를 했다.[5] 대표적으로 후난의 탄옌카이, 섬서의 펑위샹, 산서의 옌시산 등이 참가했다.[6] 중국은 무조건 공산당 주도의 통일만 인정하는 중이다.[7] 당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위시한 서방권 국가들이 줄줄이 대만과 단교했는데, 현재의 파이브 아이즈 소속 국가들은 물론이고 모든 서방권 강대국들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유럽에서 대만과 수교 중인 곳은 중국의 국가무신론 때문에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어 이전부터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바티칸 밖에 없다.[8]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만 상임이사국으로 남고 나머지 국가들은 일반 회원국으로 재가입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9] 이에 따라 당연히 대한민국 형법 외국국기국장모독죄에 관한 법안의 보호도 받을 수 있다.[10] 다만 이 경우에는 그냥 중화인민공화국(PRC)과 중화민국(ROC) 그대로 불릴 수도 있다.[11] 여러 국가가 타이베이를 대만의 수도로 보고있고 대만인조차 타이베이를 수도로 취급중인데도 왜 이제서야 지정이냐면, 대만은 타이베이로의 천도를 아직 공식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현재 타이베이는 임시수도이고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난징시가 수도이다.[12] 징후(京沪)고속철도와는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