童蒙先習
1. 개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소요당(消遙堂) 박세무(朴世茂, 1487~1564)가 중종 38년(1543)에 편찬한 아동용 교과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 중이다.2. 발행 경위
1500년대 초 박세무가 천자문을 막 뗀 수준의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직접 저술한 어린이용 교재로 당시 평안감사로 있던 민제인(閔齊仁)과 함께 만들었으며, 1543년에 평안도 감영에서 초간본을 발간하였다. 영조 35년(1759)에 중간본이 발행되었다. 아래의 어제 서문은 영조가 쓴 중간본의 것이다. 한문 해독의 편의를 위해 한자로 음독구결을 부기한 판본이 많으며, 한글로 구결을 단 판본도 몇몇 보인다.[1]정조 21년(1797)에는 기존 원문 한자 밑에 구결을 단 것을 넘어 모든 내용을 완전히 한국어로 번역(언해)한 동몽선습언해가 발간되었다. 한문(및 한글 구결)을 큰 글자로 쓴 뒤 언해문을 한 칸 내려 쓴 판본도 있고# 아예 언해문만을 본문으로 쓴 판본도 있다.#
3. 내용
조선 중종시기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 초학 교재로, 이후 후세인들에게 매우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민간, 사족들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에서도 어린 왕세자의 교육에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동궁일기와 같은 자료에서도 왕세자의 공부 과정에 중요 교재로서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내용은 크게 어학교재 부분, 오륜을 위시로 한 유교교재 부분, 역사교재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역사 부분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삼한과, 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국토는 좁지만 예악(禮樂)과 문물, 풍속 등이 크게 중흥한 방대한 역사를 이어온 국가로서 가히 중국에 비견될 만한 해동성국임을 강조했다. 긍정적인 자국 역사를 아이들에게 널리 가르치고자 했던 당대 유학자들의 교육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16세기에 발간된 만큼 현대와는 다른 사고와 세계관을 보여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판할 만한 부분이 존재한다.
在明帝時하여 西域佛法이 始通中國하여 惑世誣民하니라
명제 대에 서역의 불교가 비로소 중국에 통하여 들어와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였다.
명제 대에 서역의 불교가 비로소 중국에 통하여 들어와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였다.
華人이 稱之曰小中華라하니 玆豈非箕子之遺化耶리오 嗟爾小子는 宜其觀感而興起哉인저
중국인이 작은 중화라고 칭찬하니 이 어찌 기자가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것을 보고 감동하여 분발해야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 관념에 따라 중국의 역사를 유교 중심으로 해석한 것을 먼저 배우고, 그 뒤에 조선 중심의 역사관에 비추어 서술하였다. 역사적 관점 역시 성리학 위주로 구성되었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부정되는 기자조선에 대한 이러한 언급도 있다 중국인이 작은 중화라고 칭찬하니 이 어찌 기자가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것을 보고 감동하여 분발해야 한다.
부부유별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여자는 아예 바깥 일을 넘보지도 말고 '삼종'의 도를 따라서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남존여비로 해석될 수 있다.
4. 구성
- 목차
- 어제 서문 2a
- 서문 5a
- 부자유친(父子有親) 5b
- 군신유의(君臣有義) 6b
- 부부유별(夫婦有別) 7b
- 장유유서(長幼有序) 8b
- 붕우유신(朋友有信) 9b
- 총론(緫論) 11a
4.1. 어제 서문
夫此書隱(은) 卽東儒所撰也羅(라)
이 책은 우리나라의 유학자가 편찬한 것이다.
總冠以五倫爲古(하고) 復以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奴(로) 列之于次爲古(하고)
총론 머리에 오륜을 논하고 다시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에 대해 차례로 열거하였다.
而其自太極伊(이) 肇判乙奴(으로) 三皇五帝夏殷周漢唐宋以至皇朝屎
태극(太極)이 비로서 나누어짐으로 부터 삼황.오제.하.은.주.한.당.송에서 명황조에 이르기까지
歷代世系乙(을) 纖悉備錄爲古(하고) 逮夫我東厓(애) 始檀君 歷三國爲也(하여) 至于 我朝屎 亦爲俱載爲尼(하니)
역대의 세계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시조 단군으로부터 삼국을 거쳐 우리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시 자세히 실려있다.
文雖約 而祿則博爲古(하고) 卷雖小 而包則大羅(라)
글은 비록 약식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기록된 것은 곧 넓고, 책이 비록 작지만 포함된 것은 곧 웅대 하느니라.
其況堯舜之道隱(은) 孝弟而已羅(라) 舜之命契爲舍隱代(하산대) 以五品爲重爲時尼(하시니)
더구나 요순의 도는 효제일 뿐이니 순이 계에게 명하여 오품을 중하게 여기게 하였으니,
此文之 冠以五倫者伊(이) 其意宏矣奴多(로다).
이 책의 머리에 오륜을 실은 것은 그 뜻이 대단히 깊다.
噫羅(라) 孝於親然後於伊(에) 忠於君爲古(하고) 弟於兄然後於伊(에) 敬于長 爲飛尼(하나니)
오호라, 부모에게 효도한 연후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우가 형을 공경한 후에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이로다.
以此觀之巨隱大(건대) 五倫之中厓(애) 孝弟爲先是羅(이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륜 중에서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이 우선이다.
雖然伊那(이나) 詩贊文王曰於緝熙敬止舍叱多爲尼(삿다 하니)
그러나 시경에서 문왕을 찬양하여 공경의 도리를 밝게 하셨다고 하였고,
敬者隱(은) 成始終徹上下之工夫也羅(라)
공경하는 것은 시작과 끝, 상하를 이어주는 공부이다.
故奴(로) 大學要旨隱(은) 卽敬字也五(오) 中庸要旨隱(은) 卽誠字也 是尼(이니)
고로 대학의 요지는 경(敬)이란 글자이며, 중용의 요지는 성(誠)이라는 하나의 글자이다.
誠敬伊(이) 亦於學問厓(애) 車兩倫鳥兩翼者也羅(라)
성경이란 학문으로 말하자면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다.
今予伊(이) 於此書厓(애) 以誠敬二字奴(로) 冠于篇首爲奴尼(하노니) 誠然後於伊也(에야) 能免書自 我自伊五(이오)
이제 이 책의 수편 첫머리에 성.경 두 글자로서 강조하노니 ,정성스럽게 한 연후에 책대로, 나대로 되는 것을 능히 면할 수 있나니,
敬然後於伊也(에야) 可以欽體欽遵伊尼(이니) 學者伊(이) 豈可忽乎哉阿(아)
공경스럽게 한 연후에야 이를 체득하고 존중할 수 있음이라 어찌 배움을 소홀히 할 수 있으랴.
予伊(이) 又於券下國初開創 受號朝鮮之文厓(애) 慨然追慕爲也(하여) 三復興感也爲奴羅(하노라)
나는 또 책의 하권에서 나라를 처음 열어 창업하고 조선으로 국호를 받았음을 개연히 추모하여 세 번씩이나 감탄이 나왔다.
噫羅(라) 繼繼承承爲舍(하사) 重熙累洽伊(이) 寔是至仁盛德果(과)沈恩隆惠伊(이) 垂裕後昆之致時尼(시니)
오호라 왕업이 계계승승 이어져 문물이 빛나고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지극한 성덕과 융성한 은혜가 후손에 미친 것이로다.
繼體之君伊(이) 式體至德爲也(하여) 競競業業爲也(하여) 誠心調劑爲也(하여) 至于蕩蕩爲旀(하며) 誠心愛民爲也(하여) 永保元元爲面(하면)
향후에 왕업을 잇는 임금들은 이 극진한 인덕을 본받아 삼가고 경계하며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영원히 보전한다면,
則吾國伊(이) 其庶幾也旀(며) 吾國伊(이) 其庶幾也隱底(은저) 且我東禮義 雖因箕聖之敎化那 三韓以後於伊(에) 幾乎泯焉伊驢尼(이러니)
곧 우리나라의 앞날을 크게 기대할수 있음이로다. 또한 우리 동방의 예의가 비록 기자성인의 가르침으로 비롯되었지만 삼한 이후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入于我朝伊(이) 禮義畢擧爲古(하고) 文物伊(이) 咸備爲尼(하니) 惜乎羅(라) 術者之猶遺乎此
우리 조선에 들어와 예의가 밝아지고 문물이 갖추어졌다. 애석하게도 지은이가 이것을 빼어서 써놓지 않았도다.
哉亦(여) 嗟爾小子阿(아) 益加勉旃也夫隱底(은저)
아 어린 소년들아! 더욱 힘써 공부할지어다.
時玄黓閹茂朝月上浣矣(의) 命芸館而廣印 作序文於卷首爲奴羅(하노라)
임술년(1742년)[2] 정월 상한(上澣)에 예관에 명하여 이 책을 널리 간행하도록 하고, 책 첫 머리에 서문을 쓰노라.
이 책은 우리나라의 유학자가 편찬한 것이다.
總冠以五倫爲古(하고) 復以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奴(로) 列之于次爲古(하고)
총론 머리에 오륜을 논하고 다시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에 대해 차례로 열거하였다.
而其自太極伊(이) 肇判乙奴(으로) 三皇五帝夏殷周漢唐宋以至皇朝屎
태극(太極)이 비로서 나누어짐으로 부터 삼황.오제.하.은.주.한.당.송에서 명황조에 이르기까지
歷代世系乙(을) 纖悉備錄爲古(하고) 逮夫我東厓(애) 始檀君 歷三國爲也(하여) 至于 我朝屎 亦爲俱載爲尼(하니)
역대의 세계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시조 단군으로부터 삼국을 거쳐 우리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시 자세히 실려있다.
文雖約 而祿則博爲古(하고) 卷雖小 而包則大羅(라)
글은 비록 약식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기록된 것은 곧 넓고, 책이 비록 작지만 포함된 것은 곧 웅대 하느니라.
其況堯舜之道隱(은) 孝弟而已羅(라) 舜之命契爲舍隱代(하산대) 以五品爲重爲時尼(하시니)
더구나 요순의 도는 효제일 뿐이니 순이 계에게 명하여 오품을 중하게 여기게 하였으니,
此文之 冠以五倫者伊(이) 其意宏矣奴多(로다).
이 책의 머리에 오륜을 실은 것은 그 뜻이 대단히 깊다.
噫羅(라) 孝於親然後於伊(에) 忠於君爲古(하고) 弟於兄然後於伊(에) 敬于長 爲飛尼(하나니)
오호라, 부모에게 효도한 연후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우가 형을 공경한 후에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이로다.
以此觀之巨隱大(건대) 五倫之中厓(애) 孝弟爲先是羅(이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륜 중에서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이 우선이다.
雖然伊那(이나) 詩贊文王曰於緝熙敬止舍叱多爲尼(삿다 하니)
그러나 시경에서 문왕을 찬양하여 공경의 도리를 밝게 하셨다고 하였고,
敬者隱(은) 成始終徹上下之工夫也羅(라)
공경하는 것은 시작과 끝, 상하를 이어주는 공부이다.
故奴(로) 大學要旨隱(은) 卽敬字也五(오) 中庸要旨隱(은) 卽誠字也 是尼(이니)
고로 대학의 요지는 경(敬)이란 글자이며, 중용의 요지는 성(誠)이라는 하나의 글자이다.
誠敬伊(이) 亦於學問厓(애) 車兩倫鳥兩翼者也羅(라)
성경이란 학문으로 말하자면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다.
今予伊(이) 於此書厓(애) 以誠敬二字奴(로) 冠于篇首爲奴尼(하노니) 誠然後於伊也(에야) 能免書自 我自伊五(이오)
이제 이 책의 수편 첫머리에 성.경 두 글자로서 강조하노니 ,정성스럽게 한 연후에 책대로, 나대로 되는 것을 능히 면할 수 있나니,
敬然後於伊也(에야) 可以欽體欽遵伊尼(이니) 學者伊(이) 豈可忽乎哉阿(아)
공경스럽게 한 연후에야 이를 체득하고 존중할 수 있음이라 어찌 배움을 소홀히 할 수 있으랴.
予伊(이) 又於券下國初開創 受號朝鮮之文厓(애) 慨然追慕爲也(하여) 三復興感也爲奴羅(하노라)
나는 또 책의 하권에서 나라를 처음 열어 창업하고 조선으로 국호를 받았음을 개연히 추모하여 세 번씩이나 감탄이 나왔다.
噫羅(라) 繼繼承承爲舍(하사) 重熙累洽伊(이) 寔是至仁盛德果(과)沈恩隆惠伊(이) 垂裕後昆之致時尼(시니)
오호라 왕업이 계계승승 이어져 문물이 빛나고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지극한 성덕과 융성한 은혜가 후손에 미친 것이로다.
繼體之君伊(이) 式體至德爲也(하여) 競競業業爲也(하여) 誠心調劑爲也(하여) 至于蕩蕩爲旀(하며) 誠心愛民爲也(하여) 永保元元爲面(하면)
향후에 왕업을 잇는 임금들은 이 극진한 인덕을 본받아 삼가고 경계하며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영원히 보전한다면,
則吾國伊(이) 其庶幾也旀(며) 吾國伊(이) 其庶幾也隱底(은저) 且我東禮義 雖因箕聖之敎化那 三韓以後於伊(에) 幾乎泯焉伊驢尼(이러니)
곧 우리나라의 앞날을 크게 기대할수 있음이로다. 또한 우리 동방의 예의가 비록 기자성인의 가르침으로 비롯되었지만 삼한 이후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入于我朝伊(이) 禮義畢擧爲古(하고) 文物伊(이) 咸備爲尼(하니) 惜乎羅(라) 術者之猶遺乎此
우리 조선에 들어와 예의가 밝아지고 문물이 갖추어졌다. 애석하게도 지은이가 이것을 빼어서 써놓지 않았도다.
哉亦(여) 嗟爾小子阿(아) 益加勉旃也夫隱底(은저)
아 어린 소년들아! 더욱 힘써 공부할지어다.
時玄黓閹茂朝月上浣矣(의) 命芸館而廣印 作序文於卷首爲奴羅(하노라)
임술년(1742년)[2] 정월 상한(上澣)에 예관에 명하여 이 책을 널리 간행하도록 하고, 책 첫 머리에 서문을 쓰노라.
번역 출처
5. 인지도와 사용
동몽선습은 그 특유의 편제와 내용으로 인해, 출간 이래 조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초학 교과서였다. 특히 서당에서 천자문을 다 뗀 후, 소학을 배우기 위한 전단계로서 많이 애용되었다, 천자문이 순수하게 한자를 떼기 위한 교과서로 쓰인 반면 소학에서는 유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 사이의 간극을 채워줄 교재가 필요했다. 동몽선습 이전에는 주자가 저술한 <동몽수지>가 쓰였는데, 동몽수지는 편제가 불완전하고 소학으로 넘어가기에 단점이 크다는 이유로 동몽선습 출간 이후로는 동몽선습이 가장 유명한 초학 교재가 되었다.동몽선습이 이렇게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된 이유는, 유교적 윤리를 앞에서 설명하고 뒤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특유의 구성 덕분이다. 전반부에서 삼강오륜 등 기초적 도덕을 익히며 한문을 배우고, 뒤에서 이 도덕을 바탕으로 사실을 분별하는 유교적 교육관이 반영된 교재로 동몽선습을 뛰어넘을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 파트는 소학과 함께 배우는 통감절요를 배우기 위한 전단계로서도 적합하고, 중국사와 함께 한국사도 가르친다는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내용을 교재 하나만 사용해 가르치면 되니 매우 편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민족교육의 산실로 자리잡은 서당을 통제하기 위해 서당규칙령을 반포하고 여기서 사용해도 되는 교재의 종류를 제한했는데, 여기서 동몽선습은 빠져 있던 것. 그 이유는 식민사관에 배치되는 자주적 사관을 담은 국사 파트가 후반부에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6. 세계교과서 전시회 출품작
경향(1983.03.30) : 世界(세계)최초 敎科書(교과서)는 閔齊仁(민제인)의「童蒙先習(동몽선습)」 世界(세계)교과서展示會(전시회)에 출품 화제1983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렸던 세계교과서 전시회에 세계 최초의 교과서라는 타이틀을 걸고 1543년 간행된 동몽선습 초간본이 전시된 적이 있다.
동몽선습보다 이른 교과서로 입학도설 등이 있긴 하지만, 권근의 유배지 일부에서만 소수 사용된 입학도설과는 달리 수백여 년 동안 조선 팔도 전국에서 사용된 동몽선습이 전시회에 나선 것으로, 일제시기 일본으로 유출된 1587년작 동몽선습보다 이른 초간본을 전시한 것이다.
서양 최초의 교과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같이 전시된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세계도해(orbis sensualium pictus, 1658)보다 115년 앞서 간행된 교과서로, 전시하기 전에 책의 분실에 대비하여 당시 기준으로 3천만원의 보험을 들었다.
당시 전시회에는 전세계의 교과서 2,722권이 전시되었다.
7. 번역
조선 정조대부터 완전한 한글 언해본이 나왔으며, 대한민국에서도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동몽선습이 많이 나와 있다.네이버 책 : 동몽선습 세계 최초의 인성교과서
네이버 책 : 어린이 동몽선습 조상들의 슬기를 배우는 어린이 한 마당
네이버 책 : 동몽선습 격몽요결 한눈에 익히는
네이버 책 : 동몽선습 교수용지도서
기타 등등 수많은 동몽선습 번역본과 교양서 등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