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사성어 | |||
酒 | 池 | 肉 | 林 |
술 주 | 연못 지 | 고기 육 | 수풀 림 |
중국어 병음: jiǔ chí ròu lín 일본어: しゅちにくりん |
의미처럼 부귀영화를 누릴 때 '주지육림을 누리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나라 말기 걸왕, 그리고 상나라 말기 주왕이 만들었다는 연회장. 걸왕은 아끼던 애첩 말희, 주왕은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궁녀인 달기의 요청에 따라 만들었다.
2. 유래
『사기』 은본기 원문에 '以酒為池,縣肉為林,使男女裸相逐其閒,為長夜之飲(이주위지 현육위림 사남녀라상축기한 위장야지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해석하면 '술로써 연못을 삼고(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삼고(만들고), 남녀로 하여금 벗고 그 사이에서 서로 쫓게 했으며, 밤새 술을 마셨다.'라고 되어 있다.즉, 연못 가득 술을 채워넣고 나뭇가지마다 고기를 걸어두어 아무 데서나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본래 하나라 걸왕이 말희를 위해 만든 것이 시초인데, 훗날 상나라 주왕이 달기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만들었다. 이 술연못은 매우 커서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술은 궁궐로 바쳐진 만큼 모두 고급 술이었고, 안주로 먹는 고기 또한 최고급 육포와 살코기를 썼을 것이다. 또한,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술을 붓고, 고기를 새로 요리해 걸어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 걸왕과 주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지육림에 들어온 궁녀와 대신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축생처럼 손을 사용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게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벌거벗고 술에 취했으니 당연히 집단 난교도 일어났다. 명을 거역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이렇게 화려한 연회를 하면 들어가는 비용도 장난이 아닐 것이다. 주지육림이 과장인 것을 감안해도, 현실적으로 연못 위에 술이 든 잔을 띄워놓고 나무에는 음식이 든 통이나 쟁반을 걸어놓는 그 정도만 되어도 "초호화급의 술안주 패키지 뷔페 풀코스"나 거의 다름없다. 2020년인 현대 사회에서도 그만한 주지육림 파티를 시도해보려면 어마무시한 돈이 깨질 텐데, 고대 사회에는 지금보다 자원 생산량이 더 적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상도 못할 돈지랄 그 이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이처럼 호화로운 연회를 며칠 동안이나 열었다면 불을 보듯 훤하다.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가혹하게 걷어 주지육림을 누리고, 그 이외의 수많은 주왕과 달기의 실정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목야대전으로 상나라는 멸망했고, 주왕과 달기는 목숨을 잃는 결과[1]를 초래했다.
3. 정말로 존재했는가?
주왕 문서를 보면 현대에 들어서는 이것이 상술한 막장 음주가무가 아니라 성대한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을 후대에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주나라 이후부터 왜곡하여 전파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역사속에서 승리한 왕조가 자신들의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성혁명이란 말을 사용하고 선대 왕조에서 행한 일들을 막장질로 바꿔서 "선대 왕조의 만행으로 인해 하늘이 노해 우리를 보냈다" 라고 거짓 프로파간다를 선포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2]다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워낙 상나라 시절에는 괴악한 풍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인신공양, 식인, 순장 등 유학자들이 들으면 질색을 하는 것들이 대부분 상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부터가 이런 지워지지 않는 상나라의 야만적인 풍습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공자는 순장을 대신하기 위해 인형을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넣는 행위조차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자손이 끊어질 것이다."라고 꾸짖었을 정도였다.[3] 공자가 주공 단을 성인으로 보았던 것, 그리고 상나라 이전 시대인 요순시대를 찬양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고 기자를 먼 한반도에서까지 성인으로 모시고 문명의 시조라고 여겼던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혹은 고대의 종교 행사 중에는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야말로 막장 파티인 것이 한둘이 아니기에 어쩌면 막장 음주가무와 제사 의식 둘 다 맞을 가능성도 있다.[4] 어쨌거나 좀더 확실한 증거와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4. 기타
한 학습만화에서 이 주지육림 장면을 묘사했는데, 심의에 맞추기 위해 여자를 아예 그리지 않고 상의를 벗은 남성들만 묘사, 졸지에 주지육림이 동성애 파티가 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쥬지육림 때문에 해병문학 버전도 만들어졌다.진떡팔의 해병 퍼레이드[1] 주왕은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건물에 불을 질러 자살했고, 달기는 어떻게든 아부하면서 살아보려고 했으나 결국 숙청당했다는 내용도 있다.[2] 한국에서 후백제의 창건자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경우엔 경애왕이 나라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을 뿐인데 견훤이 그걸 왜곡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포석정 일화인데, 맞다 틀리다에는 사실 논란이 좀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3] 그래서 공자가 한 말이 바로 '괴력난신을 논하지 말라.'였다. 물론 공자도 제사를 지내는 만큼 귀신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귀신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꺼렸다는 말이다. 당장 위에 나오는 순장, 점복, 인신공양, 식인 등이 다 귀신과 관련된 것이다.[4] 엄연히 중세시대의 바이킹도 난교를 터부시하지 않았으며 장례식에서는 고인과 더불어 순장될 예정인 여성이 원없이 먹고 마시고 원하는 상대들과 마음껏 즐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