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百里奚생몰년도 미상
성은 강성 백리씨, 이름은 해, 자는 정백(井伯)으로 춘추시대 우나라 사람이다. 원래 춘추시대 우나라의 대부였으나, 후에 진(秦)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2. 생애
2.1. 가난에 시달리다
백리해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제나라 사람인 건숙(蹇叔)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제나라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섬기려고 하였으나 건숙은 그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조언했고, 그것은 들어맞았다. 그러자 백리해는 소 치는 것을 좋아하는 왕자 퇴를 섬기려 했는데, 그 이유는 백리해는 목축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숙은 왕자 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왕자 퇴도 주혜왕의 반격을 받아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백리해는 자기 한 몸조차 돌보기 힘들 지경이 되자 결국 고국인 우나라에서 벼슬을 살려 했다. 건숙은 우공(虞公, 우나라 임금)도 보잘 것 없는 위인이라며 반대했지만 벼슬을 간절히 원했던 백리해를 끝까지 말리지는 못했다.2.2. 우나라에서 벼슬하고 노비로 전락하다
주혜왕 22년(기원전 655년), 진(晉)나라가 괵나라를 멸하고 바로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백리해는 결국 포로로 전락했고 진목공(秦穆公)이 진헌공(晉獻公)의 딸과 결혼할 때 종이 되어 덤으로 딸려갔으나[1], 진나라로 가던 중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초나라로 도망쳐 그곳에서 소를 치며 살았다. 그런데 소를 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보니 그 지역의 투반이라는 관리가 백리해를 초성왕에게 천거했고 초성왕은 백리해에게 말을 돌보는 직책을 맡겼다. 한편 진목공은 백리해의 이름이 수행원 목록에는 있으나 실제 사람은 없어진 것을 보고 의아해하여 그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가 현자임을 알고서는 그를 등용하려 했다. 백리해가 초나라에서 말을 기른다는 소식을 들은 진목공은 초성왕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백리해를 데려오려 했다.2.3. 염소[2] 가죽 5장에 팔려오다
그러나 신하 공손지는 그렇게 하면 초성왕이 백리해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아채고 더욱 중한 자리에 쓸것이라고 말하며, 그보다 도망친 종을 추노한다는 구실로 검은 염소가죽 5장을 주고 사오도록 했다. 진목공은 사자를 보내 초성왕(楚成王)에게 염소가죽 5장을 바치며 도망친 종을 붙잡아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초성왕은 과연 의심없이 백리해를 붙잡아 사자에게 넘겨주었다. 진목공은 백리해의 지혜와 식견이 탁월한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후하게 대우하고 대부로 삼았다.[3] 그리하여 백리해는 오고대부(五羖大夫)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리해는 또 건숙의 지혜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진목공에게 이야기해서 그도 등용되게 하였다.2.4. 진 목공을 도와 진(秦)나라의 힘을 키우다
진목공 9년(기원전 651년), 진(晉)나라의 군주인 진헌공이 죽자 여희는 그 아들인 해제를 세웠으나 해제가 이극(里克)에게 살해당했다. 순식(荀息)은 여희의 여동생의 아들인 탁자를 내세웠으나 이극은 이번에는 순식, 탁자는 물론 여희 일가를 깡그리 제거했다. 그리하여 백리해는 병사를 일으켜 공자 이오를 군주로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진혜공(晉惠公)이다. 이오는 왕위에 오르면 하서[4]의 5개 성을 진(秦)나라에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여이생과 극예 등의 말을 듣고 주지 않았다.[5] 그리고 이극과 그 동조자를 죽여 진혜공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진목공 12년(기원전 648년), 제(齊)나라의 관중과 습붕이 죽고 진(晉)나라에 가뭄이 들자 진목공이 진(晉)나라에게 양식을 보내려 했다. 진혜공에게 죽임을 당한 비정보의 아들 비표가 거절했으나 공손지는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수로를 통해 진(晉)나라에 원조를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에 원조를 청하자 진 혜공은 그것을 씹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켰고, 한원 땅에서 크게 맞붙었으나 진목공에게 지고 말았다. 진목공은 끝내 공자 중이를 진(晉)나라의 군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목공 33년(기원전 627년), 봄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려 하나 백리해와 건숙은 진(晉)나라를 거쳐 가야한다며 반대했으나 진목공은 듣지 않아 효산에서 탈탈 털렸다. 당시 두 진나라는 진 문공 사후 관계가 험악해진 상태로 진 목공은 진 문공을 도왔으나 아무런 실익을 얻지 못해 빡쳐서 정나라를 치려 했다. 백리해와 건숙은 여러 나라를 거쳐 습격하는 일은 득이 없기에 반대했다. 하지만 눈 돌아간 진 목공은 둘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를 대장으로, 서걸술과 백을병을 부장으로 정나라를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백리해와 건숙은 울면서 아들들에게 효산에서 너희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라고 말한다. 막상 진군이 정나라에 도착하니 정나라는 어찌 된 영문인지 진군이 올 것을 알고 대비를 마쳤고 여러 나라를 거쳐 온 원정군으로 정나라 수도를 공성할 수 없었던 맹명시는 근처에 있는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왔다. 하지만 진(晉)나라 역시 문공의 상중에 배신한 진나라한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고 진(晉)나라의 중군장 선진은 백리해의 예상대로 효산에 매복해 있었다. 아버지 백리해의 말이 있던지라 조심을 거듭했으나 전리품을 끌고 지나가기엔 효산의 길은 너무 험했고 진군은 진(晉)나라와 적족의 협공을 받아 궤멸한다.
진목공 36년(기원전 624년), 진목공은 다시 진(晉)나라와 싸워 이겼다. 그리고 이때를 끝으로 백리해의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최후는 토사구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몽염 열전에서 몽의가 죽으면서 남긴 말에 따르면 목공이 목이라는 악시를 받은 이유는 순장을 했을 뿐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죄를 걸어 백리해를 처벌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백리해의 권력을 견제한 목공이 죄를 뒤집어 씌워 건숙-백리해 일파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진나라 역사에 백리씨는 백리해와 백리시(맹명시)가 마지막이기도 하고, 건씨도 건숙, 건술(서걸술), 건병(백을병)이 마지막이다. 대패전을 기록한 백리시, 건술, 건병이 처벌받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왕권에 충분히 위협이 되었을지도.[반론]
[1] 원문에서는 잉신(媵臣)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상 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저런 왕족끼리의 결혼은 다분히 정략결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거나 불의의 사고로 딸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보험으로 처제를 여럿 딸려보냈는데 이를 잉첩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딸려보내는 시중 혹은 몸종이 잉신이니 무슨 대단한 직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2] 羖는 염소를 의미한다.[3] 백리해는 이때 진목공에게 먼저 서방의 오랑캐 국가들을 모두 병합해 서방을 통일하고, 그 후 때를 기다리며 충분히 국력을 기른 후에 중원으로 진출하라고 조언했다. 이는 탁월한 선견지명이었고, 이 기조에 충실히 따른 진나라는 그로부터 4백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는 최초의 국가가 된다.[4] 달리 하외라고도 불린다.[5] 다만 그곳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게 그렇게 되면 함곡관 동쪽에 가로막는 것이 없어 그야말로 하이패스로 동방 진출이 가능했다. 진혜공에게 이긴 진목공이 그곳을 차지하고 나중에 도로 빼앗기지만, 훗날 전국시대에 진(秦)나라가 진헌공(秦獻公) 대에 강대해지면서 그곳을 다시 되찾음으로서 동방 진출은 쉬워졌고, 파촉까지 먹고나니 그야말로 하이패스로 동방에 진출해 천하통일을 하는 기반이 되었을 만큼 중요한 요지였다.[반론] 하지만 맹명시, 서걸술, 백을병이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진 목공이 처벌하지 않은 것이다. 목공 34년 목공이 맹명시에게 진을 공격하라 했으나 불리해 돌아왔다. 목공 36년 마침내 진나라에게 복수를 성공하고 효산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봉분을 쌓고 장례를 치르며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후세에 자신의 과실을 잊게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듬해 목공은 사망하는데 백리해를 처벌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몽의가 얘기한 백리해에 대한 불합리한 처벌은 좌전과 진본기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백리해와 건숙은 진나라에 오래 뿌리내리고 있던 세경가 출신이 아니라 외국에서 불러온 객경이었기에 결코 군주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후대의 상앙, 범저, 여불위한테 벌어진 일들로 알 수 있듯이 객경은 군주의 신임이 사라지는 순간 권력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