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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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2대 왕 문왕 文王 | ||
성 | 미(羋) | |
씨 | 웅(熊) | |
휘 | 자(貲) | |
아버지 | 초무왕(楚武王) 웅철(熊徹)/웅통(熊通)/웅달(熊達) | |
어머니 | 등만(鄧曼) | |
아내 | 식규(息嬀)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75년 6월 15일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75년 6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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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18대 국군, 2대 왕. 초 무왕의 아들, 장오와 초성왕의 아버지. 초 무왕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 식나라, 등나라,[1] 신나라, 기나라, 채나라 등을 쳐서 강역을 넓히고 초나라를 장강 일대의 패권국이 되게 만드는 기반을 만들었다.2. 치세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즉위 초창기에 수도를 단양에서 영 땅으로 옮겼다.[2]초 문왕 2년(기원전 688년), 문왕은 병사를 일으켜 신(申)나라를 치고 등(鄧)나라를 지나가는데 신하가 등 기후(鄧祁侯)에게 초 문왕을 습격하자고 했으나 등 기후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초 문왕은 신나라를 멸했다.
초 문왕 3년(기원전 687년), 등나라를 쳤다.
초 문왕 6년(기원전 684년), 초나라가 채나라를 공략해 채나라군을 신[3]에서 이겨 채 애후를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석방했는데, 채 애후는 식후의 아내이자 진(陳)나라 군주의 딸인 식규가 천하 제일의 미녀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초 문왕은 식규를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그후 초 문왕이 식나라를 방문했는데, 식후가 그를 접대하며 환대했으나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규를 차지했다.[4] 식후는 그 일로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 죽었다. 문왕은 식규로부터 장오와 초성왕 두 아들을 얻는다.
초 문왕 10년(기원전 680년) 가을 7월, 초나라 병력이 채나라로 쳐들어갔다.
초 문왕 11년(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패자가 될 때 초나라의 국력을 키웠다.
초 문왕 12년(기원전 678년), 등나라를 멸했다. [5]
초 문왕 15년(기원전 675년), 병사를 거느리고 파나라를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영도로 귀환했지만 육권(鬻拳)[6]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초 문왕에게 말했다.
"황나라를 치고 오십시오."
결국 초 문왕은 황나라를 쳐서 끝내는 제압했으나, 회군 중에 병을 얻어 그 해 6월 15일에 죽었다.[7] 육권은 자결하여 순장되었다.[8]
3. 화씨지벽의 일화
초나라의 형산[9]에서 변화라는 사람이 옥의 원석을 세 차례 초왕에게 바쳤으나, 초여왕과 초무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그에게 월형에 내렸다. 변화가 서러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울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보배로운 옥의 원석을 가져왔는데, 알아보지 못하는게 원통해서 운다고 했다.초 문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원석을 다듬게 하니 보배로운 옥이 나왔고, 변화의 이름을 따서 화씨지벽이 되었다고 한다. 단 리동혁의 《본삼국지》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야사에서 떠도는 내용이라고 한다.
《열국지》에 의하면 화씨지벽은 훗날 전국시대 초나라 재상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이 없어지자, 장의가 훔친 걸로 의심해 매질을 했다고 한다. 그후 화씨지벽이 조혜문왕에게 갔는데, 이 자세한 이야기는 인상여, 화씨지벽 항목 참조.
4. 후일담
초 문왕이 죽은 뒤 식규의 소생인 장오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웅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웅군이 즉위하니 그가 초 성왕이다. 초 성왕은 국력을 키워 송나라를 제압하는 등 나름대로 패권을 행사했으나 진문공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증손자인 초장왕 대에 마침내 진(晉)나라를 꺾고 패업을 이룬다.[1] 당시 등나라의 군주는 문왕의 외숙부였다.[2] '영'은 수도이기 때문에 '영도'라고도 불렸는데, 이곳이 《삼국지》의 강릉성이다.[3] 이 신 땅은 상나라의 탕왕이 명재상 이윤을 발견했다는 그 신(莘)과 한자가 같다.[4] 식후가 초 문왕을 환대한 이유는 바로 초나라를 이용해 채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5] 문왕이 당시 등나라 군주의 외조카라 별다른 요청을 안하고 길을 빌릴 수 있었다.[6] 사람의 이름에 쓰일 때 鬻은 '죽'이 아닌 '육'으로 읽는다.[7] 경신(庚申)일이다.[8] 이 일을 두고 초까들은 초나라를 까는 레퍼토리로 쓴다. 다만 육권이란 인물을 잠시 살펴 보자면, 왕이 자신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칼을 뽑아 위협해 받아들이게 한 직후 왕을 협박한 죄를 들어 자기 발을 잘랐던 사람이다. 초 문왕은 육권에게 대혼(大閽) 벼슬을 내려 수도 영의 대문을 지키게 했고, 바로 이 대문에서 돌아온 왕을 막고 공적없이 돌아옴은 수치라 간언해 결국 왕을 객사하게 했다. 물론 순장이라는 풍습이 막장스럽기는 하지만, 육권은 왕을 몇 번이나 거슬렀던 자신을 나름 벌하는 의미에서 자결하고 순장된 것이다.[9] 이 형산에서 형주라는 지명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