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19:12:40

유무(전한)


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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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양왕
유무 | 劉武
파일:양효왕릉.jpg
양효왕릉 전경.
출생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0년 사이 [1]
전한 봉국
(現 산시성)
사망 기원전 144년 (향년 37세 ~ 42세)
전한 봉국
(現 허난성 동부)
능묘 양효왕릉(梁孝王陵)
재위기간 전한의 대왕
기원전 178년
~ 기원전 176년
전한의 회양왕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68년
전한의 양왕
기원전 168년
~ 기원전 1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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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유(劉)
무(武)
부모 부황 태종 효문황제
모후 효문황후 두씨
형제자매 4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양왕비 이씨
자녀 5남 5녀
작위 대왕(代王) → 회양왕(淮陽王) → 양왕(梁王)
시호 효왕(孝王)
}}}}}}}}}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오초칠국의 난2.3. 막강한 위세2.4. 태제 책봉 시도2.5. 반대파를 암살하다2.6. 죽음
3. 기타

1. 개요

고대 전한의 황족.

한문제 유항의 차남이자 한경제 유계의 친동생으로,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공로가 있었으며, 두태후가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한문제의 차남이나, 생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문제 2년인 기원전 178년에 부황의 봉지였던 대왕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대나라를 둘로 쪼개어 하나는 대왕 유무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그의 형제인 태원왕 유참에게 주어 태원국을 신설하였다.

문제 4년인 기원전 176년에, 유무는 회양왕으로 옮겨갔고, 유무의 봉지는 태원국과 합쳐져 다시 대나라가 되어 유참의 봉국이 되었다.

회양왕으로 7년째 있다가 문제 11년인 기원전 169년에, 마찬가지로 그의 형제였던 양왕 유읍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양나라를 폐지했는데, 가의가 상소를 올려 제나라, 조나라, 초나라, 오나라 등 강력한 동성 제후국을 경계하기 위해 양나라와 회남국을 부활시키자고 건의하였으며, 문제가 이를 받아들여 양나라가 다시 부활하고 기원전 168년, 유무는 양왕에 책봉되었다.

그렇게 쭉 양왕으로 있다가 기원전 157년, 문제가 붕어하고 황태자였던 형 유계가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그가 부황과 함께 문경지치를 이루는 한경제이다. 양왕 유무가 수도로 올라와 입조하자 경제는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죽으면 유무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하였으며, 이에 유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기뻐하였고, 자식들 중 유무를 가장 사랑하던 효문황후 두씨도 그리하였다.

2.2. 오초칠국의 난

기원전 154년, 오왕 유비는 그동안 황실에 품었던 원한[2]과, 조조가 제안한 정책으로 제후들을 억압하는 중앙 조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이후 세력을 모은 오나라를 중심으로 오(吳), 초(楚), 제(齊)[3], 조(趙) 등 일곱 제후국의 대규모 반란인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유무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양나라는 오나라와 초나라의 공격을 받아 극벽에서 지고 수만 명이 살해당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는데, 양왕 유무는 두려워하여 다시 요격했으나 패배하였고, 주아부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주아부는 응하지 않았으며 오나라와 초나라의 양도를 끊었다. 이에 유무는 스스로 세력을 정비해 한안국과 장우 등을 장수로 임명하여 다시 맞서 싸웠고, 끝까지 저항하여 두 나라를 패퇴시켰다.

이로서 오나라와 초나라는 끝까지 버티며 농성 중인 양나라 때문에 서진하지 못했고, 주아부에게 뒷치기를 당해 대패하였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유무는 이때 주아부가 지원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2.3. 막강한 위세

오초칠국의 난 진압 이후 양왕 유무의 위세는 가히 대단하였다. 한경제의 친동생으로서 당시 황궁의 규방을 꽉 휘어잡고 있던 두태후에게서 제일 총애를 받았고, 반란을 진압한 공로도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양나라 또한 매우 강성했다. 양나라의 규모는 북쪽으로는 태산을, 남쪽으로는 고양 지역까지 그 일대의 비옥한 땅 40여 성을 아우르는 장대한 영역을 자랑했으며, 유무의 군공을 통해 병기 수십만개, 1억개가 넘는 금전을 쌓아둘 수 있는 재력도 있었다. 유무는 수양성을 70여 리에 달하는 규모까지 매우 크게 확장하고, 자신의 궁궐을 호화스럽게 개축하였으며, 천자가 쓰는 정기를 받으며, 위의와 예식의 화려함은 전부 천자의 것을 본떴다. 또한 사방에서 호걸들을 등용해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 등을 측근으로 삼았으며, 말을 타고 사냥을 활발히 다니면서 천하에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였다.

2.4. 태제 책봉 시도

경제는 양왕을 태자로 삼아 제위를 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상술했듯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경제는 재위 4년 차인 기원전 153년에 장남 유영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유영은 폐위되었고, 두태후는 이번에야말로 유무를 태제로 삼게 하려고 했으나, 원앙주아부 등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경제가 거절하면서 이는 무산되었고, 최종적으로 기원전 149년, 교동왕 유철이 황태자가 되니 그가 훗날의 한무제이다.

이때부터 유무는 대놓고 주아부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초칠국 때 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건으로 원한이 쌓였거니와, 자신의 태제 책봉까지 반대하니 사실상 정적으로 간주하였으며, 주아부는 유무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무는 태후와 입조할 때마다 경제에게 주아부의 단점을 말했고, 원래부터 주아부와 몇 번 충돌하며 그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경제는 주아부를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주아부는 경제와 점차 사이가 나빠지다가 실각하였고, 머지 않아 굶어 죽게 되었다.[4]

2.5. 반대파를 암살하다

또한 유무는 측근인 양승, 공손궤 등과 모의하여 원앙 등 자신의 태제 책봉을 반대한 대신 10여 명을 암살하였다. 경제는 조사하기도 전에 유무를 의심했고, 자객들을 체포하여 조사하니 사실로 드러났다. 경제가 공손궤와 양승을 잡아들이도록 하자 유무는 이들을 후궁에 숨겼는데, 재상 헌구표(軒丘豹)와 한안국 등이 간언하여 결국 유무는 이들을 자살하게 하고, 장공주를 통해 황제에게 사죄하였다.

이때 유무는 모란(茅蘭)의 계책을 받아들여 입관한 후 장공주의 후원에 변장하고 숨어들어갔다. 유무가 타고 왔다는 말과 수레, 일행들은 있는데 정작 유무가 없으니 두태후는 유무가 죽었다고 생각해 울면서 말했다.
"황제가 내 아들을 죽였다!"

이에 경제가 매우 슬프고 두려워했다. 이때 유무가 도끼를 메고 나타나 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낱낱히 고한 뒤 경제에게 사죄하였다. 그러자 태후와 경제는 기뻐하며 평소와 같이 대하였다. 그러나 이 일 이후로 경제는 유무 또한 멀리하게 되었고, 그를 같은 수레에 태우지 않았다.

2.6. 죽음

이후 기원전 144년, 유무는 수도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이에 유무는 불쾌하면서도 또 우울해져 양산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이때 누군가가 발이 등에 달린 괴이한 소를 선물하자 유무는 이를 불길하게 여겼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서 유무는 열병에 걸려 앓다가 6일 만에 죽었다. 사후 시호는 효왕(孝王)이었다.

양효왕 유무는 생전 효성이 지극하여 두태후가 아프면 잘 먹지 못했다. 유무가 죽자 이제 두태후가 먹지 않고 울면서 말하기를,
"황제가 과연 내 아들을 죽였도다!"

라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경제는 유무 사후 그의 봉지였던 양나라를 다섯 갈래로 쪼개어 각각 유무의 다섯 아들에게 분봉하고, 다섯 딸에게도 탕목읍을 주었다. 두태후는 그제서야 단식을 멈추었다.

3. 기타

양효왕 유무의 무덤은 허난성 상추시망탕산 일대 보안산(保安山) 남쪽 기슭에 소재해 있다. 양효왕비인 이씨의 무덤도 같이 있으며, 중산정왕 유승의 무덤인 만성한묘처럼 거대한 산 중턱에 무덤을 만들고 능체로 삼은 인산위릉(因山爲陵) 형태의 전한 제후왕릉이다. 유무의 생전 위세를 방증하듯 석실의 길이가 96m로, 유승의 무덤은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거대하다. 후한말 조조에 의해 도굴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며, 인근에는 아들이자 후임 양왕인 양공왕 유매의 능이 있다.
[1] 바로 윗형인 경제가 기원전 188년생이고, 모후인 두씨가 대왕 시절 문제의 후궁으로 있으면서 유계와 유무를 낳았다고 하니 경제 출생 후 ~ 문제 즉위 전 사이 시기에 태어났을 것이다.[2] 경제가 태자 시절, 오왕 유비의 아들이자 오나라의 왕세자였던 유현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둘이 서로 육박을 두다가 불리해진 경제가 한 수만 물러 달라고 청했으나, 유현은 거절했다. 이에 경제가 화가 나서 서로 말다툼을 했고, 유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경제는 욱한 나머지 육박판을 유현에게 집어던졌는데, 유현이 육박판에 머리를 세게 맞고 죽어버렸다. 여기에 문제가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그냥 오나라로 보내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유비는 황실이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황족 취급도 안 해준다고 생각하여 큰 원한을 품고 조정에서 불러도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3] 정확히는 제나라의 일부인 제남(齊南).[4] 정확히는 주아부가 실각한 이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 주아부를 위한 순장 물품을 구입하었는데, 어리석게도 인부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이 고발되어, 황실의 물건을 사사로이 구입하고 규율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주아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했던 주아부는 형리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에 경제가 정위(廷尉)를 파견해 심문하게 하였다. 정위가 반역할 생각이었냐고 묻자 주아부는 마지못해 자신의 무덤에 묻을 순장품이라고 해명하였는데, 정위가 '그러면 죽어서라도 반란하려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응수했고, 주아부는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단식하다가 5일 만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