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11> 전한의 관내후 蕭望之 | 소망지 | |
시호 | 없음 |
작위 | 관내후(關內侯) |
성 | 소(蕭) |
휘 | 망지(望之) |
부친 | 소앙(蕭仰) |
생몰 | ? ~ 기원전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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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는 장천(長倩)으로, 전한 후기의 관료였으며 동해군 난릉현(蘭陵縣) 출신으로 두릉(杜陵)으로 이주했다. 《양서》에 따르면 소망지는 전한의 개국공신이자 한 3걸의 한 명이었던 상국 소하의 6세손이었다고 한다.2. 생애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지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 《논어》등을 익혔는데 수도 장안에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권신 곽광이 집권하던 시절, 왕중옹(王仲翁)을 비롯한 유생 몇 명과 함께 병길(丙吉, ? ~ 기원전 55년)의 천거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소망지는 곽광을 보기 이전 몸수색을 받았고, 다른 사람과 동행하도록 강제하여 이를 분하게 여기고 항의했다. 이 때문에 곽광은 소망지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자신의 속관으로 삼았다. 이후 소망지는 석책(射策)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해 낭(郞)이 되고 문지기가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왕중옹은 광룩대부급사중(光祿大夫給事中)이 되어 있었다. 왕중옹은 소망지를 비웃었으나 소망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몇 년 후, 소망지는 동생이 지은 죄 때문에 파면되고 군(郡)의 관원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어사대부 위상(魏相)에게 발탁되어 그의 밑에서 일했고,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대행치예승(大行治禮丞)이 되었다. 평소 소망지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한선제는 그를 알자(謁者)에 임명했고, 이후 간대부(諫大夫), 승상사직(丞相司直)에 올라 한 해만에 2,000석(二千石)의 녹에 이르렀다. 곧 선제는 소망지를 평원태수(平原太守)에 임명했으나 조정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소망지의 탄원으로 다시 불러들여 소부(少府)로 삼았다가 좌빙익(左馮翊)에 임명했는데 이를 좌천이라고 여긴 소망지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으나 선제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소망지는 뛰어난 실적을 쌓았고, 대홍려(大鴻臚),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소망지는 조정에 있는 동안 정책에 대해 여러 의견을 제시하여, 채용되었으나 승상 병길[1]이 병에 걸렸을 때 태도가 불손했기에 승상사직 파연수(繁延壽)의 탄핵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좌천되어 태자(한원제)에게 《논어》를 가르쳤다. 이 시기 상평창(常平倉)[2]의 설치를 건의한 경수창(耿壽昌)을 비판했으나 선제는 경수창의 손을 들어주었다. 선제는 자신이 붕어할 시, 태자를 보좌할 대신으로 외척 사고(史高, ? ~ 기원전 42년)와 소망지, 주감(周堪)을 지명했고 이들에게 태자를 맡겼다. 곧 소망지는 전장군(前將軍) 겸 광록훈(光祿勳), 영상서사(領尚書事)가 되었다.
선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한원제로 즉위했다. 원제도 스승이었던 소망지를 총애했으며 소망지는 유향(劉向), 김창(金敞)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으나 중서령 홍공(弘恭)과 중서복야 석현(石顯)이 반대했고 외척인 사고를 끌어들여 소망지와 대립했다. 게다가 이전 소망지가 천거한 정붕(鄭朋)이 소망지를 배반했고, 홍공과 석현을 비롯한 환관 일파는 소망지를 악평하여 그를 파면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몇달 후, 원제는 조서를 내려 소망지를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했으며 승상에 임명하려고 하는 사이, 소망지의 아들인 소급(蕭伋)이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 홍공 등은 소급의 탄원서를 조작하여 소망지가 아들에게 무죄를 탄원하게 하여 잘못을 황제에게 돌리려 한다고 참소했다. 원제는 관원을 보내 소망지를 잡아들이려 했고, 관원이 소망지의 집에 도달하니 소망지는 음독하고 죽었다. 그의 관내후는 아들인 소급(蕭伋)이 계승했다.
3. 가족
소망지의 아버지는 소앙(蕭仰)으로 자는 혜고(惠高)였으며 따로 지낸 관직은 없었다. 소앙의 아버지는 소호(蕭皓)로 전한의 공부연(公府緣)을 지낸 소장(蕭章)의 아들이었다.소망지의 다른 아들은 소육으로 소육의 후손이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남제의 태조 고황제 소도성과 소량의 고조 무황제 소연이었다. 즉, 소망지는 남제 황실의 17대조였으며, 소량 황실의 18대조였다.
- 부친: 소앙(蕭仰)
- 동생: 소씨(蕭氏)
- 아들: 소급, 소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