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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2531a2,#000c29><colcolor=#ffd700> 시기 | 908년 (대인선 3년) ~ 926년 (대인선 21년) 1월 | |
| 장소 | 요동, 만주 | |
| 교전국 | <rowcolor=black> 요 (공세) 승 | 발해 (수세) 패 |
| 주요 인물 | 지휘관 [[요나라| 遼 ]] 야율아보기 (요 태조)[[요나라| 遼 ]] 야율돌욕 (황태자)[[요나라| 遼 ]] 야율요골 (대원수) | 지휘관 [[발해| 渤海 ]] 대인선 (발해 가독부)[[발해| 渤海 ]] 대광현 (태자) |
참가자 [[요나라| 遼 ]] 술률평 (순흠황후)[[요나라| 遼 ]] 야율인저석[[요나라| 遼 ]] 야율사열적 (북원이리근)[[요나라| 遼 ]] 야율돌려불[[요나라| 遼 ]] 야율안단 (척은)[[요나라| 遼 ]] 야율적렬[[요나라| 遼 ]] 야율해리 (요련상온)[[요나라| 遼 ]] 야율삭고 (우피실상온)[[요나라| 遼 ]] 야율욕온 (해질랄부이리근)[[요나라| 遼 ]] 야율질리 (남원이리근)[[요나라| 遼 ]] 야율소 (남부재상)[[요나라| 遼 ]] 소아고지 (전 북부재상)[[요나라| 遼 ]] 조사온 (한군도단련사)[[요나라| 遼 ]] 강묵기 (이리필)[[요나라| 遼 ]] 한지고 (좌복야)[[요나라| 遼 ]] 한연휘 (좌복야)[1][[요나라| 遼 ]] 강말달 (근시)[[요나라| 遼 ]] 장수실 (요주자사)[[요나라| 遼 ]] 진만 (호자군사)[[요나라| 遼 ]] 왕욱 | 참가자 [[발해| 渤海 ]] 노상[2][[발해| 渤海 ]] 열만화 |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 요의 승리 - 발해의 멸망 | |
| 영향 | 발해부흥운동 시작 | |
1. 개요
10세기 발해와 요나라 간의 전쟁.
2. 배경
초기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당(唐)이라는 공동의 압박에 맞서는 우호적인 관계에 가까웠다. 발해 건국 자체가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의 난으로 인해 발생한 힘의 공백을 틈타 이루어졌으며, 건국 초기에는 상호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며 거란이 점차 성장하자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거란과의 주요 교통로이자 국경 지대인 부여부(扶餘府)에 항상 강력한 군대(勁兵)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기 시작했다. 이는 9세기 초중반 발해 선왕(宣王) 대에 이루어진 군사 조직 개편과 맞물려 있으며, 발해가 거란의 팽창을 심각한 위협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0세기 초, 혜성처럼 등장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의 부족들을 통일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야율아보기는 중원 장악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배후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고, 그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동쪽의 발해였다.[3]
3. 전개
3.1. 1차: 요동에서의 소모전(908년 ~ 923년)
이 시기는 전면전이 아닌, 요동(遼東)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거란의 점진적인 압박과 발해의 외교적, 군사적 대응이 이어진 소모전의 양상을 띤다.- 903년, 906년: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서쪽 측면을 위협하기 위해 동북방면의 여진(女眞)을 토벌하며 군사적 압박을 시작했다. 이는 발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앞서 주변 세력을 정리하고 발해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 907년 ~ 908년: 발해는 거란의 동북방면 진출과 관련하여 907년 5월 왕자 대소순(大昭順)을, 908년 정월에는 전중소령(殿中少令) 최예광(崔禮光)을 후량(後梁)에 사신으로 보내 외교적 노력을 시행했다.
- 908년 10월: 거란은 요하(遼河) 하구의 진동(鎭東) 지역에 성을 쌓아 발해가 중원(후량)으로 가는 육로를 차단했다. 이는 발해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압박하려는 명백한 적대 행위였다.
- 909년 ~ 912년: 발해는 거란의 압박에 맞서 909년 3월에 재상 대성악(大誠諤)을, 911년 8월에 사신을, 912년 5월 왕자 대광찬(大光贊) 등 고위급 사절을 후량(後梁)에 연이어 파견하며 외교적 활로를 모색했다. 이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배후 동맹을 구축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 911년 ~ 915년: 야율아보기가 자신의 형제들이 일으킨 모반사건을 수습하는 데 집중하면서 거란의 동방 진출이 일시적으로 주춤했다. 이 기간은 발해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으나, 거란은 내부를 결속하며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 915년 10월: 내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야율아보기는 직접 요동으로 행차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낚시를 하는 등 군사적 위용을 과시했다. 이 시기 신라와 태봉(고려)이 거란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발해를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918년 2월: 발해는 거란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916년 황제로 즉위한 야율아보기의 거란(요나라)을 인정하고, 요동 문제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 918년 12월 ~ 919년 2월: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고성(遼陽故城)을 점령하고 한인(漢人)과 발해인(渤海戶)을 이주시켜 성을 수리한 뒤, 이곳을 동평군(東平郡)으로 삼고 방어사(防禦使)를 파견했다. 이는 요동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를 확고히 하고, 발해 침공의 전진 기지를 확보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10여 년에 걸친 요동 쟁탈전은 거란의 전략적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 923년: 3월에 거란이 해(奚)를 복속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대인선은 신라 등 여러 나라와 결원협정을 맺었다. 한편 「진만묘지(陳萬墓誌)」에 따르면, 거란의 장수 진만(陳萬)이 이 해에 황제를 따라 발해국을 공격하여 일정 지역을 점령했다. 이는 요동 지역에서 양국 간의 국지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2. 2차: 발해의 반격과 요동 탈환 시도 (924년)
거란의 지속적인 압박에 수세에 몰려 있던 발해가 공세로 전환한 기록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924년 1월 ~ 5월: 발해가 1월에 왕자 대우모(大禹謨)를, 5월에 왕자(혹은 조카) 대원양(大元讓)을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보내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는 대외 외교책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거란은 계주(薊州)의 백성들을 요동의 요주(遼州)로 강제 이주시켜 요동 지역의 영역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발해는 이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 924년 7월: 발해군은 거란의 영역화 시도에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했다.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장수실(張秀實)을 살해하고, 이주해 온 백성들을 노략했다. 이는 완충지대로 여겨졌던 요동이 완전히 거란의 영토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반격이었다.
- 924년 9월: 『구오대사』에 따르면 발해의 반격과 비슷한 시점인 9월, 여진(女眞), 회골(迴鶻), 황두실위(黃頭室韋) 연합군이 거란의 동북쪽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발해가 배후에서 이들 세력을 규합하여 거란을 흔들려는 다각적인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펼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거란의 전략적 인내: 발해의 대담한 반격에 대해 거란은 표면적으로는 즉각적인 보복 공격에 나섰다.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은 924년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발해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공격들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無功而還)'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발해의 국경 방어선이 여전히 견고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공격이 거란의 주력군이 동원된 전면전이 아닌, 발해의 반격에 대한 제한적인 보복 공격 혹은 탐색전의 성격이었음을 시사한다. 거란이 전면 보복에 나서지 않은 진짜 이유는 야율아보기의 거대한 선서후동(先西後東) 전략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중원 공략을 구상하던 야율아보기는 발해가 배후를 기습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발해를 공격하기에 앞서 서쪽의 위협(당항 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선서후동(先西後東) 전략을 택하고 대규모 서방 원정에 나섰다.
3.3. 3차: 거란의 전면 침공 - 성동격서와 수도 직공 (925년 12월 ~ 926년 1월)
서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야율아보기는 마침내 발해 정벌을 위한 총력전에 나선다. 거란은 치밀한 기만전술과 속도전을 결합하여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너뜨렸다.3.3.1. 1단계: 기만전술 - 성동격서(聲東擊西) (925년)
- 압록부 공격: 「진만묘지」의 기록에 따르면, 925년 거란의 대원수 야율요골(耶律堯骨, 후일 요 태종)이 이끄는 선봉 부대가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한 신주(神州)와 환주(桓州)를 먼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공격은 발해의 주력군을 전통적인 침공 예상 루트인 요동 방면(압록부, 장령부)으로 유인하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이었다. 발해는 주력 부대를 서쪽 국경에 집중 배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거란의 진짜 목표였던 부여부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발해 내에서 발생한 이심(離心): 전통적으로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던 '내분설(內紛說)'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멸망 직전 발해 유민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었다. 이는 발해 지배층 내부에 이미 이반(離叛)이 심각했다는 증거로 해석되어 왔다.
여기에 「진만묘지(陳萬墓誌)」의 기록을 더하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925년, 거란의 대원수 야율요골이 이끄는 부대가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공격하여 신주와 환주를 함락시켰다는 내용은 바로 이 유민들의 대규모 망명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설명해준다. 즉, 거란의 침공이 발해의 서쪽 국경 지역을 직접적으로 유린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해당 지역의 백성들과 지배층이 대거 남쪽의 고려로 피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단순한 내부 분열이 아닌, 전쟁의 공포로 인한 국경 지역의 와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발해 내부의 혼란 속에서 거란의 외교적 움직임은 더욱 빛을 발했다. 925년 10월과 11월, 서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야율아보기에게 고려와 신라가 잇달아 사신을 보내 조공(來貢)했다는 『요사(遼史)』의 기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거란이 발해를 침공하기 직전, 한반도의 후삼국 세력과 이미 외교적 교감을 나누고 발해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시사한다.
3.3.2. 2단계: 주력군의 신속 기동 및 부여부 함락 (925년 12월 ~ 926년 1월 3일)
- 925년 12월 16일: 야율아보기는 발해 정벌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황후, 황태자, 대원수 등 모든 수뇌부와 함께 친정(親征)에 나섰다.
- 925년 12월 29일: 거란의 주력군은 발해 주력군이 방어하던 요동을 우회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부여부를 밤사이에 기습적으로 포위했다.
- 926년 1월 3일: 발해 서북방 방어의 핵심 거점인 부여성이 단 3일 만에 함락되고 수비 장수가 처형되었다. 이 전투에는 거란 최고의 용장들이 투입되었다. 특히 거란에 항복한 한인(漢人) 출신 조사온(趙思溫)은 몸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가장 먼저 성벽에 오르려 했고, 야율아보기가 친히 그의 약을 조제해줄 정도로 맹렬히 싸웠다. 또한 거란의 명장 소아고지(蕭阿古只) 역시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3.3.3. 3단계: 수도 직공 전략과 발해 멸망 (926년 1월 9일 ~ 1월 20일)
- 수도 직공 건의: 부여성을 함락한 야율아보기는 잠시 정비하려 했으나, 황태자 야율배(耶律倍)가 "파죽지세로 곧바로 수도 홀한성(忽汗城, 상경용천부)을 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야율아보기는 이를 받아들여 수도로의 총진격을 명령했다.
- 926년 1월 9일: 야율안단(耶律安端)과 소아고지(蕭阿古只)가 이끄는 거란 선봉대가 수도 외곽에서 발해의 최정예 수도 방위군인 '노상군(老相軍)' 3만 명과 격돌하여 격파했다. 같은 날 밤, 야율배와 야율요골이 이끄는 거란 본대가 수도 상경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 926년 1월 12일: 포위 3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 항복을 요청했다.
- 926년 1월 14일: 대인선이 신하 300여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정식으로 항복했다.
- 926년 1월 19일 ~ 20일: 항복 절차가 진행되던 중, 성 안의 발해군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거란군은 즉시 성을 총공격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상경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로써 228년간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발해가 멸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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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발해/역사#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발해/역사#멸망|멸망]]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멸망은 10세기 초, 거란(요)의 급격한 부상과 그에 따른 20여 년에 걸친 장기적인 전쟁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은 크게 요동(遼東) 상실과 전략적 수세(908년 ~ 923년), 군사력의 건재함과 외교적 돌파구 모색(924년), 내부 와해와 거란의 기만전술(925년 ~ 926년) 등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전쟁은 요동 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소모전으로 시작되었다. 908년 거란이 요하 하구에 성을 쌓아 발해의 중원 교역로를 차단한 것을 시작으로, 약 15년간 양국은 요동에서 치열하게 대치했다. 발해는 후량(後梁)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으로 대응했으나, 거란은 919년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를 확립했다. 이로써 발해는 중원과의 연결고리이자 중요한 완충지대였던 요동을 상실하며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전략적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비록 요동을 상실했지만, 발해의 군사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924년, 거란이 요동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노골화하자 발해는 즉각 군사행동에 나서 거란의 요주(遼州)를 공격해 자사를 살해하는 등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이는 발해가 여전히 거란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국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발해는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결원협정을 맺으며, 배후의 여진, 회골, 황두실위 등을 규합하여 거란을 견제하려는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국제 정세는 발해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반격에 즉각적인 전면전으로 대응하는 대신, 서쪽의 위협을 먼저 제거하는 선서후동(先西後東) 전략을 택하며 힘을 비축했다. 그 사이 신라와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며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발해를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발해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거란의 치밀한 군사 전략과 그로 인해 촉발된 발해 내부의 붕괴 현상이었다. 『요사(遼史)』에 기록된 '이심(離心)'의 구체적인 정황은 925년 거란의 침공 과정에서 드러난다. 거란의 선봉대가 발해의 서쪽 국경인 서경압록부의 신주와 환주를 먼저 공격하자, 전쟁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낀 해당 지역의 장군과 백성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내부 분열을 넘어, 전쟁으로 인한 국경 지역의 행정 및 방어 체계가 와해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부 혼란을 파악한 거란은 20여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킬 기만전술을 실행했다.
주력 침공로인 요동 방면(압록부, 장령부)을 공격하는 척하며 발해의 주력군을 서쪽으로 유인했으며, 발해의 주력군이 서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의 본군은 방비가 허술해진 발해의 서북방 핵심 거점 부여부를 기습 공격하여 단 3일 만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 신성, 부여성 등 요충지가 함락되자 평양성으로 가는 길이 열렸던 것처럼, 발해 역시 부여부가 뚫리자 수도 상경성(上京城)까지의 방어선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상경성을 포위했고, 결국 포위 3일 만인 926년 1월, 마지막 왕 대인선이 항복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해동성국의 영광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