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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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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역사학자. 트위터, 네이버 블로그,[1] 개인 홈페이지[2]

2. 생애

1951년[3] 전남 목포시 출신. 1991년 《발해의 대외관계 연구 -신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로[4][5][6] 꼽힌다. 한규철의 해당 논문은 1994년 《발해의 대외관계사》라는 제목으로 신서원에서 출간되었고, 이후로도 2016년까지 발해 관련 연구에 힘써 관련 자료집이나 논문, 저서를 발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1997년 한국고대사학회장(~1999.2), 2003년 부산경남사학회장(~2004.12)을 지냈고,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7] 설립추진위원회 위원과 설립 이후 연구위원(~2006.6), 자문위원(2006.11~2009.10)을 맡았다. 이밖에 2006년 고구려연구회장(~2007.12), 2008년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장(~2013.12)과 이사장(~2011.3)[8]을 지냈으며, 2012년 국사편찬위원회 제17대 위원을 맡기도 했다. 부산 경성대학교 박물관사학과 교수로[9] 2014년부터 재단법인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도 맡고 있다고.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라는 분류명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발해 건국(698년)까지 30년에 걸치는 시간 속에서 (영토 확보 및 주권 문제 등을 차치하고서라도)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던 유일한 왕조는 신라 뿐이었다는 점도 가볍게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백제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신라가 (정치적 구호로써나마) 내걸었던 '삼한일가(三韓一家)'의 한국사적 의의를 존중하는 의미로써의 '통일신라'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기도 하다.[10] 한국사의 일부임이 틀림이 없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나섰던 점부터가 신라와 더불어 존재했던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라 불리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며,그럼 그 발해를 이은 정안국이나 대발해국, 흥료국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발해 건국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가 아닌 '대(大)신라'라고 구별해서 부를 것을 제안한 것도 한규철.

'소수의 고구려 유민 + 다수의 말갈인'이라는 발해 건국 세력 구도에 대한 기존 학계의 해석에 대해서도 '말갈'이 변방 민족에 대한 비칭(卑稱)이라는 설을 지지하고, 관련 기록인 류취국사의 "그 나라(발해)에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은 적다"라는 기록에 대해서도 토인(土人)을 사인(士人) 즉 상류층을 가리키는 '사인'이라는 단어의 오기로 주장하며 해당 기록을 "상류층이 적고 하류층은 대부분"이라고 해석, 발해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민족적인 이질성이 적었다(즉 말갈은 고구려 유민과 전혀 별개의 종족이 아니라 변방 주민에 대한 중앙의 입장에서의 비하하는 칭호)는 주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3년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주최로 인촌박물관에서 열린 발해사 한중공동학술회의에서 중국측 학자인 손진기와[11] 논문으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내놓기도.

1998년한겨레를 까는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내용은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와의 인터뷰인 '국민과의 대화'를 한겨레가 현장 취재가 아니라 사전 취재에 근거한 예측기사로 보도했으면서 현장취재로 기사를 쓴 것처럼 국민들을 우롱했다며 비판하는 내용.[12] 물론 그 뒤로 발해사 관련 기고도 똑같이 한겨레에서 다 했다.

아무래도 발해사 분야에서는 전문가로 꼽히다 보니 발해 관련 기사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신다. 2007년 사극 대조영의 역사 왜곡 요소를 지적하기도 했으며, 발해 고왕의 표준영정 자문을 맡기도 했다.

2016년 대한민국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에 관련해 다시금 이름이 등장하였다.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해당 시기인 7세기에서 9세기 사이 한국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기존의 남북국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시대로 용어가 수정기술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국정교과서 편찬 위원 선정 과정에서 한규철이 발해사 관련자로써 청탁되었다가 2016년 3월에 누락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한규철은 고려대 은사이기도 한 김정배 위원장의 제의로 국정교과서 집필진 참가를 수락해 집필진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이후 탈락되는데, 한규철 본인이 1987년 호헌철폐 시국선언에 교수로써 서명했던[13] 전력이 문제가 되어서였다는 것.[14] 애초에 국정교과서 편찬 위원인 이기동 교수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신라사 전공자이고[15] 보니 국정교과서에서 남북국 시대가 아닌 통일신라와 발해로 서술된 것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규철이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자로써 지니는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발해사가 얼마나 마이너한 위치에 있는지를 새삼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동명의 수영선수도 있는데(...) 한규철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이쪽이 더 많이 나온다. 발해라는 연관 검색어를 더 붙여도... 종교는 개신교인 듯하다. 부산에 있는 영락교회라는 교회의 장로라고 홈페이지 약력에서 언급된다.

K-MOOC에서 한규철 교수의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발해 제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강의명으로 올라와 있으며, 교양 강의 수준의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 발해사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보자.

[1] 한규철 교수 본인이 어떻게 발해사를 공부하게 되었는지 발해사 및 남북국시대라는 역사적 호칭에 대한 한규철 본인의 생각에 대해서 볼 수 있다.[2] 저자의 약력 및 발표 논문 및 저서와 발해사 관련 자료들이 올라와 있으니 참고 바람. 해당항목도 본 홈페이지에서 일부 채용하였다. 다만 약력 중에 '국사편찬위원회 제17대 위원(2012.10.25~현재 2015.10.24)'라고 되어있는 부분을 보면 2015년 10월 이후 홈페이지가 관리되고 있지 않은 모양.[3] 인터넷에서 한규철 교수를 검색하면 나오는 1950년생이라는 생년은 호적상의 생년이라고 본인이 블로그에서 밝히셨다.#[4] 한규철 이전에 발해 연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발해사 연구에 관한 한 독보적인 연구자임에는 틀림없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2명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나머지 한 명은 서울대학교 송기호 교수로 논문 주제는 '발해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국가 위상'이었으며, 그 이전에 발해의 다인장(多人葬, 공동매장 풍속)에 관한 석사논문을 발표했었다고. 또한 송기호 교수의 경우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로는 대선배격인 유득공발해고를 번역하기도 했다.[5] 애초에 발해사는 고고학적으로 훨씬 조건이 유리하기도 했고 아울러 남한에 맞서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목적상으로도 필요했던 북한에서 더 많이 연구된 주제였다.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3년1964년저우언라이의 안배로 중국 둥베이 지역의 옛 상경용천부 유적을 중국 학자들과 공동 답사하고 유일하게 발굴 보고서를 낸 곳이 북한이었다는 점만 봐도...(중국은 이후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보고서를 내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북한에서만 보고서가 나온 셈) 1970년대까지 발해사 연구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앞섰다고 한규철 교수 스스로 시인하고 있을 정도.[6] 참고로 한규철에 따르면 북한의 학술지에서는 첫머리에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 어쩌고 하는 부분이 반드시 들어감은 물론(본인도 그 부분 읽기가 굉장히 껄끄러우셨다고누군들 안 그럴까) 자국사와 관련해 외국 학자들(심지어 한국 학자들조차도)의 연구 성과를 전혀 소개(또는 반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발해 유적에 관한 고고학 연구 논문들에조차 지나치게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성(및 유사성)만을 강조하고 당나라말갈로부터도 일정하게 받았음이 틀림없는 부분에 대해서조차 간략하게 넘어가거나 아예 부정하기도 한다는 점도 북한 발해사 연구의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망할 주체사상의 폐해[7] 2007년에 동북아역사재단으로 개편된다.[8] 고구려발해학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해당 학회 이사 직함은 2017년 현재도 유지하고 있으신 모양. 해당 홈페이지 자체가 2016년 이후로 리뉴얼을 안 했다.[9] 2015년 8월 31일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지금은 명예교수.[10] 다만 발해 수립 이후에 '통일신라'라는 호칭을 쓰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게 반대한다.[11] 1993년 당시에는 심양동북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이후 동북공정의 핵심인물이 된다.[12] 1998년 1월 27일자 한겨레(뉴스라이브러리)[13] 1987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전신) 한규철 교수의 이름이 첫머리에 보인다.[14] KBS 보도, 한국일보, 한겨레[15] 한국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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