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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발해 강역도와 지리 | 학자별 발해 강역 추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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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지리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해놓은 문서.2. 발해 영토사
2.1. 발해 건국 이전의 발해 영토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는 부여, 옥저와 같은 예맥계 세력들과 읍루, 숙신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1] 5세기 이후 고구려와 말갈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동만주를 두고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5세기 중반 물길이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고 곧 부여를 정복, 물길 - 말갈 - 발해로 이어지는 계보의 첫 장을 쓴다. 물길은 6세기 중엽에 말갈 7부로 분열되고 이들 중 송화강 유역의 속말부와 아무르강 유역의 흑수부가 두각을 나타낸다.그러나 흑수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이 6세기 중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흑수부를 제외한 모든 말갈 부족이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다. 고구려 멸망 후 말갈 부족은 재편성된다.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이주되는데 이들 중에는 후일 발해를 건국하는 속말부의 걸걸중상도 있었다. 695년에 거란이 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빠저나온 걸걸중상 일행이 백산부의 걸사비우와 합심하여 자립한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하고 살아남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 정착하여 698년에 발해를 세운다.
2.2. 강역의 변동
2.2.1. 건국 초기(698년 ~ 719년)
대조영이 동모산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우고 두만강 상류, 백두산 일대의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21년이라는 대조영의 재위 기간의 기록이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단, 요동과 만주 등지에 남아 있던 멸망 당시 항복하지 않고 남아있던 고구려 잔여 유민세력, 고구려 말갈세력과 연합 내지는 흡수하기에 용이했으리라 추정되고 건안성에 위치했던 웅진도독부를 쳐서 없애 백제 유민들을 흡수한 것,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을 볼 때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요동 일부까지는 진출했을 것으로 보인다.2.2.2. 확장기(719년~ 737년)
발해의 확장은 무왕 대무예 시기에 두드러진다. 대무예는 수군 장수 장문휴를 시켜 당의 등주를 초전박살 내놓는데 이 시기에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거란·돌궐 연합군과 함께 현재의 하북성 천안현 북쪽에서 일어난 마도산 전투에 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하여 당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다. 또한 신라와 국경을 맞닿은 시점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2.2.3. 안정기(737년 ~ 793년)
문왕 대흠무 초기인 8세기 중반에 이르러 철리부가 740년, 불열부와 월희부가 741년을 경계로 당에 대한 조공이 단절되었기에 발해가 대부분의 말갈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발해의 영토는 송화강 하류까지 미치게 되어 건국 이래 추구해 오던 대외 팽창정책이 일단락되었으며, 발해 전성기의 강역권을 거의 형성하기에 이른다.2.2.4. 혼란기(793년 ~ 818년)
강왕 대숭린 시기의 짧은 안정기의 앞과 뒤로 5명의 왕들[2]이 10년 만에 바뀌는 혼란기를 틈타 변경 지역이 이탈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다만, 802년에 월희와 함께 당에 조공한 우루의 경우, 우루번장도독이 바로 4년 전에 강왕의 조카 대능신과 함께 당에서 귀국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언제 당으로 갔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미 이때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라 발해의 소속으로서 당에 조공 또는 숙위하러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또 815년의 흑수의 조공 기사 역시 그러한데, 주목되는 점은 《당회요》에는 이때의 흑수 조공 기사를 말갈전이 아닌 발해전에 기록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당회요》의 저자가 흑수의 조공을 발해와 관련지어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말갈 부족들의 당에 대한 조공은 발해의 세력 약화에 따른 이탈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2.2.5. 전성기(818년 ~ 857년)
선왕 대인수 시기에 남쪽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북쪽으론 흑수말갈 등의 북방 이민족들을 토벌하여 군읍(郡邑)을 설치하였으며 요동 일부[3]를 흡수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 시기의 발해는 요동에서 시작하여 서북한, 북만주,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게 되는 사방 5,000여 리의 강역을 차지하여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다.2.2.6. 쇠퇴기(857년 ~ 908년)
그러나 반세기도 안된 12대 대건황 시기부터 해동성국 발해의 영광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데 이 때의 기록이 안타깝게도 특히나 부실하여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신라 측 기록에서 886년 신라 동북부 방향의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이 신라에 외교를 시도하는데, 늦어도 886년경에는 여진 계통의 함경도 지역 지방민들이 발해의 통치력에서 벗어나 사실상 독립국 상태가 되었고 발해의 영역 역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2.2.7. 거란과의 전쟁과 멸망(908년 ~ 926년)
자세한 내용은 발해-요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2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시작은 903년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발해와 거란 간의 전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해의 가독부였던 대위해가 죽고 마지막 가독부인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2년 후인 909년을 기점으로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둘러싼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되며 사실상 발해-요 전쟁이 시작되었다. 918년 발해는 요양 지역을 상실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투에서 발해가 패배하면서 상당히 큰 전략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 때부터 주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주도권까지 완전히 잃은건 아닌데 919년, 요동을 병합한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것이다. 한편 922년 이존욱에게 패퇴당한 거란은 당장의 제1목표를 중원에서 발해로 선회한다. 발해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923년, 거란은 요서의 평주에 노룡군 절도사를 설치하여 발해의 숨통을 쥐어오고 있었으며 결국 발해는 정국을 타개하고자 924년 5월,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요주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주를 박살을 낸다.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덤.
하지만 중요 요충지였던 요동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발해의 국력이 한계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중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발해를 도와줄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동북아의 정세를 보자면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은 해체되고 해족과 습족은 거란에 병합되었으며 중원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가 열렸으며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남쪽의 후백제나 신라는 멀고 고려 역시 견훤의 맹공을 받고 있어 구원할 여지는 없었다.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로 왕권 쇠퇴와 혼란이 가중되던 상황이라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4] 발해로선 더더욱 절망적인게 내부에서 말갈족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924년 5월에 있었던 위의 요주 전투는 발해가 일으킨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요사 본기에 '이심(내분)'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부터 발해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925년, 발해 장군 신덕이 휘하 병졸 500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5] 이후로도 발해의 관리들이 줄이어 고려로 망명하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그로 인한 지배 계층의 분열과 민심 이반이 원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발해의 세기말적 상황을 파악한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몽골 초원 정벌을 마친 후 925년 음력 12월, 발해를 끝장내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하였다. 이때 거란은 요동을 침공했던 영주도가 아닌 거란도를 이용하여 발해의 심장부였던 부여부를 대규모의 병력으로 기습하는 결정적인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를 위해 요동 공략, 요양 지역의 방어사 설치 및 사민 등을 통하여 장령부 및 압록부 등의 요동지역에 발해의 주력군을 집중시키게 유도하였고 이 때문에 요동을 통해 공격해 올 줄 알았던 거란의 주력이 거란도를 이용해서 쳐들어오자 이를 미처 예상 못 한 발해는 의표를 강하게 찔렸다. 거란의 주력이 요동을 통해 왔다면 서경 압록부, 중경 현덕부라는 거대한 방어선이 있어 막기가 수월했지만, 거란도를 통해서 왔기에 발해의 수도 앞에 있는 중요 방어선은 딱 하나, 일직선상에 있는 부여부밖에 없었다.[6] 이렇게 발해의 의표를 찌른 거란은 부여부에 있던 발해의 정예군을 괴멸시키고 부여부를 무너뜨렸다.[7]
발해는 증원군을 보내 거란군을 막고 부여부를 되찾으려 했으나 패배하였다. 노상(老相, 늙은 재상)으로 하여금 3만의 군사를 주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오는 거란군을 길목에서 막게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부여부를 돌파한 거란의 주력은 926년 음력 1월 9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항전하기 위해 총 동원령을 선포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결국 음력 1월 12일 성문을 열고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3. 행정구역
자세한 내용은 발해/행정구역 문서 참고하십시오.{{{#!wiki style="margin: -10px" | <tablebordercolor=#2531a2><tablebgcolor=#2531a2>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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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주 아래에는 100여 개의 현이 있어, 부→주→현의 3단계 행정 관리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발해의 지방행정제도에 있어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수령제를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 가운데 전시기에 걸쳐 모두 수령이 나타나는데, 특히 후기에는 수령의 숫자가 많을 경우 65인에 달하였다. 65인이라는 숫자는 62주에 3개의 독주주를 합한 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우연한 일치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수령은 각 부·주·현에 해당하는 지역에 원래부터 있던 부락의 우두머리로서 부락의 군사·행정에 대한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발해 통치자가 각 지역의 풍습에 따라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정책의 하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수령 제도는 지역적 특성이 다양하고 사회발전단계가 고르지 못한 발해 사회에서 유용한 제도가 아니었던가 한다.
4. 자연지리
발해의 영토는 전체적으로 산지와 숲, 강, 호수 등이 많았다.
발해의 주요 지역 중 하나였던 연해주 지방의 경우, 한국의 동해안을 따라서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시호테알린 산맥이 뻗어 있고 서측 내륙부의 중·러 국경지역은 우수리 강 연안과 항카 호 주변이 평야를 이루고 있어서 대체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기후는 몬순기후 지역이나 동계에는 한랭한 대륙성 기후이므로 기온이 낮고 건조하여 맑은 날씨가 지속된다. 하계에는 해양으로부터 고온다습한 바람이 불어와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으며 태풍이 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연안을 따라서 흐르는 한류 때문에 짙은 안개가 끼는 날도 많다. 작물의 생육기간과 관련이 있는 무상기일은 북부가 136일이고 남부가 153일로, 북부나 남부에서 큰 차이는 없으며, 연평균 강수량도 600~800㎜로 일반 작물을 재배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다.
삼림 구성은 다양하여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 지대로, 그중 73%가 침엽수이다. 북부는 상록인 전나무, 가문비나무, 소나무류 등의 침엽수림 지대이다. 그러나 남부는 활엽수가 우세한데, 소나무류·전나무·가문비나무·떡갈나무·자작나무·느릅나무·물푸레나무·보리수 등의 식생이 다층수림을 형성하고 있다.
5. 산업
자세한 내용은 발해/경제 문서 참고하십시오.6. 교역로
발해의 무역로 | |||||
조공도 | 거란도 | 영주도 | 신라도 | 일본도 | 담비길 |
크게 6개의 교역로가 있었는데, 이 중 2개는 수로, 나머지 4개는 육로였다.
- 압록도(대 당 교역로. 압록강을 이용한 수로.)[8]
- 거란도(대 거란 교역로)
- 영주도(대 당 교역로)
- 신라도(대 신라 교역로. 용원부와 남해부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간다.)
- 일본도(대 일본 교역로. 동경 용원부에서 동해를 거친다.)
- 담비길(대 중앙아시아 교역로)
7. 인구
영토는 영주에서 동쪽으로 2천 리에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맞닿았다. 월희말갈(越熹靺鞨) 동북쪽으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렀고, 영토가 사방 2,000리에 편호(編戶)는 10여만이고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거의 같았으며, 제법 문자를 쓰고 기록을 할 줄 알았다.
《구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말갈(渤海靺鞨)
《구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말갈(渤海靺鞨)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하더니, 아득히 먼 것을 믿고 건국해서 스스로 진국 왕이라 일컬으며 사신을 보내서 돌궐과 교류했는데, 영토가 사방 5,000리에 가구(戶口)가 10여만 호,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었다.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
걸걸중상이 죽자 그 아들 대조영이 이어 즉위하고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으며 승병 정호(勝兵丁戶)가 40여만이었다.
《오대회요》 30권 <발해>
《오대회요》 30권 <발해>
중상의 아들 조영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신오대사》 사이부록(四夷附錄) 발해(渤海)
《신오대사》 사이부록(四夷附錄) 발해(渤海)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발해의 인구를 10여만 호,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라 언급하고 《오대회요》와 《신오대사》 등에선 발해 초기의 인구가 40만 명이라고 나온다. 즉,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인구 기록들은 발해가 막 건국되어 동모산과 그 인근 지역 일대만을 장악하고 있었을 당시를 기준인 것으로 보이며 그 수는 대략 4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버드에서 만주학을 공부한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인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다트머스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최근 중국 학계의 연구에서 적어도 8세기부터 만주 남부의 집중적인 농업 및 도시 개발에서 발해 농민들의 역할을 입증한 점과, 926년 이전의 발해의 정치적 지배 범위, 발해 경제와 문화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민족, 요 제국의 동부 지역 개발에서 발해인들의 역할을 고려할 때 900년경의 실제 발해 인구는 150만 명에서 400만 명 사이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았다.[9]
8. 관련 사료
[1] 이러한 배경을 보면 발해가 예맥계나 숙신계나 정체성 논란이 있는것도 당연. 한국에서는 예맥계임을 중국에서는 숙신계임을 강조하지만 막상 사료를 보면 반반이다.[2] 대원의, 대화여, 정왕, 희왕, 간왕[3] 소고구려의 존재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만약 존재했다면 이들을 이 때 흡수한 것으로 본다.[4] 같은 시기 후백제도 백제의 선례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뜻을 전달하고 통교(通交)를 위해 대마도에 사신을 두 번 보냈지만 일본은 후백제 사신을 신라인(新羅人), 견훤을 가리켜 신라 배신(新羅 陪臣)이라 표현하여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 결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외교관계를 거부했다.[5] 발해 멸망 연도는 926년이지만 이전부터 계속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고려로 망명하고 있었고 이것을 토대로 추정했을때 발해가 거란에 급습당해 망했지만 이전부터 발해 내부에서 반란이나 내분 등이 격화되어 백성들이 탈출한 것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6] 이곳이 적대국인 거란과의 교역 루트였음에도 이곳에 대한 방위 태세가 거의 없어 거란군에게 쾌속 진격을 허락했다는 것은 발해 군사 전략의 치명적인 패착이었다. 또한 거란군이 이렇게 상경을 향해 진격하는데 국왕 대인선은 상경성에서 재빨리 피신하지 않았다는 점도 큰 패착이다. 만약 훈춘의 동경 용원부나 함남 북청의 남경 남해부로 피신했다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지언정 왕조를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7] 공교롭게도 전신인 고구려도 부여부(당시엔 부여성)이 당에게 함락당하면서 국내성, 압록강까지 당의 쾌속 진격을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때는 국내성이 연남생의 영지라 부여성 이전에 이미 항복했다는 차이는 있다.[8] 흔히 '조공도'라 알고 있는 그 도로다.[9] Pamela Kyle Crossley, 2016, 「Bohai/Parhae Identity and the Coherence of Dan gur under the Kitan/Liao Emp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