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2:55:08

발해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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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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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고려의 발해유민
3.1. 관련 기록
3.1.1. 발해 멸망 이전3.1.2. 발해 멸망 직후3.1.3. 부흥운동 본격화3.1.4. 정안국 발흥3.1.5. 흥료국 발흥3.1.6. 이후
3.2. 평가
4. 인물5. 여담

1. 개요

발해 유민들은 발해가 멸망한 후의 발해인 주민들을 의미한다.

2. 특징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가 멸망해버린 후 발해의 유민들은 이후의 행보에 따라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
  • 첫 번째로는 거란의 지배를 피해 타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 동질감이 있는 고려로 피신했으며 대표적으로 영순 태씨가 있다. 또한 일부는 중국이나 일본으로도 건너갔다.[1]
  • 두 번째로는 거란의 지배하에 놓인 사람들이다. 일부는 상경이 방화되고 요서, 요양 일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재산과 기반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발해인 귀족들의 노비나 부곡으로서 힘든 삶을 살아갔고, 일부는 사노비나 공노비, 또는 천민이 되어 살다 성종의 노비 해방 정책으로 풀려나 평민의 삶을 영위했고, 일부는 요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 세 번째로는 거란의 지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발해부흥운동에 투신했으며, 일부는 거란에 대항하던 여진족에 협력했다.[2]

하지만 그 요나라마저 몰락하며 결과적으로 고려로 피신하지 않은 발해인들은 전부 여진족의 금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말로는 발해인들을 위로하던 금나라였으나 결국 정주민이던 발해인의 상당수를 중원(특히 허베이성, 산둥성)으로 강제 이주시킴과 동시에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시행하여 만주 지역에 남은 발해의 흔적을 거의 지워버렸다.[3] 이 때문에 요나라에 충성하던 발해인들은 요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거란족을 따라 고려로 피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런 동화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여진족에 비해 발해유민들은 문화, 기술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금나라 치세에서 상당히 잘나갔다.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대흥부의 설계를 발해인이 맡기도 하고, 금나라 황실에 발해여인들이 자주 황후로 들어가는 등 대우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4]

3. 고려의 발해유민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말 그대로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물 밀듯이 밀려들어왔는데 막 건국되었던 고려가 후삼국시대에서 승리하고 북진사업을 진행하는 일에 많은 힘이 되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려 초기 발해 유민과 관련 기록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5]

또한 만주에 남아있던 발해유민들은 200년 가까이 지배민족에 동화되지 않으며 발해부흥운동을 이어나갔는데, 고려로 귀순해온 발해 유민들이 주로 중북부 지역에 모여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고려에 동화되어버린다.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국으로서 고려와의 혈연적, 문화적 동질감이 컸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가 완전히 멸망한 후 수십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발해유민들이 고려 북부에 도망쳐오기 시작하는데 보통은 수백명 크게는 수천명, 드물게 수만명 단위로 귀순했다. 후삼국시대의 전란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고 잃어버린 고토회복을 위해 북진을 국시로 삼은 고려에게 있어 이러한 발해인들은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3.1. 관련 기록

3.1.1. 발해 멸망 이전

궁성(宮城)에서 길이가 70척이나 되는 지렁이가 나왔는데,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발해국이 내투(來投)할 조짐이라 하였다.
고려사 태조 8년(925년) 3월
최초의 발해유민 유입 직전인 925년 3월에 커다란 지렁이가 고려 궁성에 나타났는데 예전부터 커다란 지렁이는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여겨졌었다. 고려는 이웃국가였던 발해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단걸 알고 발해인들의 귀순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을 9월 병신 발해의 장군 신덕(申德) 등 50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고려사 태조 8년(925년 9월)
12월 발해의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0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고려사 태조 8년(926년 1월)
926년 1월 거란에 의해 발해의 수도 상경성이 함락되고 8월에 마지막 저항 지역이 항복하면서 발해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기록을 보면 발해인의 귀순은 그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발해 내부에서는 많은 분열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설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3.1.2. 발해 멸망 직후

3월 발해의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50인과 승려 재웅(載雄) 등 6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태조 10년(927년 4월)
3월 발해인 김신(金神) 등 60호가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태조 11년(928년 3월)
가을 7월 발해인 대유범(大儒範)이 백성을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
고려사 태조 11년(928년 7월)
발해인 은계종(隱繼宗) 등이 귀부(歸附)해왔는데...
고려사 태조 11년(928년 11월)
발해인 정근(正近) 등 300여 인이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태조 12년(929년 10월)

3.1.3. 부흥운동 본격화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6]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고려사 태조 17년(934년 7월)
가장 많은 발해인들이 귀화해온 단일 사례로는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광현 무리의 귀순이 있다. 일단 부흥운동을 전개하던 중 발생한 내부분열 때문에 귀순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으며, 이때 고려로 유입된 유민의 수는 수만 호로 추정된다.[7] 덕분에 대광현은 고려 왕족에 준하는 대우와 영지까지 하사받았다.
겨울 12월 발해의 진림(陳林) 등 160인이 귀부(歸附)해 왔다.
고려사 태조17년 (934년 12월)
이 해에 발해인 박승(朴昇)이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938년 12월 기사 中

3.1.4. 정안국 발흥

이 해 발해인 수만 명이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979년 6월 기사 中
발해유민이 마지막으로 대량 귀순해온 기록이다. 이후 50년 가까이 기록될만한 발해유민의 귀순은 없었으며 흥료국이 망한 다음에야 유민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난다. 대광현처럼 대표할만한 지도자가 유민 수만명을 한번에 이끌고 온 것도 아니었고 수만명의 유민들이 한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귀순해 왔다는 점을 보아 얼마 후 망하게 되는 정안국의 혼란이 이같은 사태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들의 대다수가 정안국에서 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3.1.5. 흥료국 발흥

거란의 수군지휘사 호기위(水軍指麾使 虎騎尉) 대도(大道)와 이경(李卿) 등 6인이 내투(來投)하였다. 이때부터 내부(來附)하는 거란인과 발해인이 매우 많았다. - 현종 21년 (1030년 6월)
흥료국(興遼國)의 영주자사(郢州刺史) 이광록(李匡祿)이 와서 위급함을 알렸는데, 얼마 안 되어 흥료국이 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체류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 현종 21년 (1030년 10월)
이달에 거란(契丹)의 해가(奚哥)와 발해의 백성 500여 인이 내투(來投)하여 강남(江南)의 주군(州郡)에 살게 하였다. - 현종 21년 (1030년 10월)
거란과 발해의 백성 40여 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현종 22년 (1031년 3월)
발해 감문군(監門軍)의 대도(大道)와 행랑(行郞) 등 14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0년 (1031년 8월)
발해의 제군판관(諸軍判官) 고진상(高眞祥)과 공목(孔目) 왕광록(王光祿)이 거란(契丹)에서 첩문(牒文)을 가지고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0년 (1031년 8월)
발해의 사지(沙志)와 명동(明童) 등 29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3월)
발해의 사통(史通) 등 1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3월)
발해의 살오덕(薩五德) 등 15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6월)
발해의 우음(亏音)과 약기(若己) 등 12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7월)
발해의 소을사(所乙史) 등 1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7월)
발해의 고성(高城) 등 20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1년 (1032년 9월)
겨울 10월 발해의 압사관(押司官) 이남송(李南松) 등 10인이 도망쳐 왔다. - 덕종 1년 (1032년 11월)
여름 4월 발해의 수을분(首乙分) 등 18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2년 (1033년 5월)
발해의 가수(可守) 등 3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2년 (1033년 5월)
발해의 감문대정(監門隊正) 기질화(寄叱火) 등 19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2년 (1033년 6월)
발해의 선송(先宋) 등 7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덕종 2년 (1033년 7월)
발해의 기질화(寄叱火) 등 11인이 내투(來投)하자 남쪽 땅에 거주하게 하였다. - 덕종 2년 1034년 1월
고려사
흥료국이 발흥하며 요나라의 발해유민 통제력은 상당히 약화되는데 이때를 틈타 고려로 귀순해오는 유민들이 다시 발생한다. 정안국의 혼란 이후 50년간 끊어졌던 발해유민의 귀순이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흥료국의 멸망 이후 몇년에 걸쳐 고려에 유입되었는데 500명 정도의 유민이 한꺼번에 들어온 한 차례 경우를 제외하면[8] 기껏해야 수십명 정도의 규모에 불과해 몇만 명씩 귀순해오던 예전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3.1.6. 이후

발해 개호(開好) 등이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문종 4년(1050년) 4월
이달에 거란인 33인, 한인(漢人) 52인, 해인(奚人) 155인, 숙여진인 15인, 발해인 44인이 왔다.
고려사 예종 11년(1116년) 12월
발해인 52인, 해인(奚人) 89인, 한인(漢人) 6인, 거란인 18인, 숙여진인 8인이 에서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 예종 12년(1117년) 1월
1117년 52명의 발해인이 귀순해 온 것을 끝으로 더이상 유민이 귀순한 사례는 없었다.

3.2. 평가

... 또한 참으로 큰 나라를 섬김[事大]이 굳건하고 뜻이 이웃 나라를 도우려는 데 있으니, 말에게 꼴을 먹이고 무기를 날카롭게 해 견훤(甄萱)의 무리를 꺾었고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발해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후당이 보낸 조서의 일부 #
당시에 후당에서는 고려가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며, 고려국왕을 책봉하는 조서에 이를 왕건의 업적으로 기록하여 칭송하였다. 그리고 몇년 후 후당은 멸망한다
발해가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자 그 나라 세자인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가 의(義)로써 흥기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께서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시어, 영접과 대우가 매우 두터웠고, 성과 이름을 하사하시기까지에 이르렀으며, 또한 그들을 종실의 적(籍)에 붙여서 자기 조상들에게 제사를 받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 중 문무(文武) 참좌(叅佐) 이하에게도, 또한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더하셨습니다. 이처럼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능히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와서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려사, 최승로 열전,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
고려 전기의 재상 최승로성종에게 시무 28조의 서문으로 선왕들의 업적을 평가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때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후하게 대우한 것이 태조 왕건의 업적으로 칭송된다. 고려의 입장에서도 발해유민 포용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평가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대광현과 같이 온 유민들의 수에 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 고려사의 대광현 내투 기사에서 단순히 '수만'이라고 언급되어 있던 유민들의 수가 '수만 호'로 기록되어 있다. '호'는 4~6명 내외의 한 가구를 의미하는 단위로 아무리 낮춰잡아도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유민들이 대광현을 따라 귀순해온 것이다.
장흥(長興) 5년(934) 갑오에 태조가 백제를 쳐서 크게 승리하여, 하내(河內)의 30여 군(郡)을 획득하였고 발해국 사람들이 모두 귀순하는 데 이르렀다.
보한집, 지추(知樞) 손변(孫抃)이 태조께서 손수 지으신 글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보한집에서 저자 최자(崔滋)는 삼한을 평정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개태사의 창건배경을 설명하며 발해유민들의 귀순을 왕건의 업적으로 거론했다. 물론 글의 내용대로 발해유민들이 전부 고려로 귀순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 후기에도 그만큼 큰 의미를 두었다고 보면 된다.

4.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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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 발해는 국가 자체가 예맥계 고구려인 출신과 말갈계 고구려인, 그리고 일부 말갈족들이 연합하여 세워진 다종족 국가였다. 따라서 고려 초에 망명해 들어와 고려사회에 순식간에 동화된 발해유민이란 사람들은,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 출신 발해인들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9] 따라서 고구려 유민계통 발해인 상당수를 고려왕조가 흡수 통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가장 먼저 한족에 동화된 발해유민들은 주로 금나라 때 군인으로 동원되었다가 산동성, 하북성에 사민된 주민과 그 가족 출신이 많은데, 명나라 멸망 이후에 조선으로 망명한 명나라 유민들과 청나라 말기에 조선으로 이주한 한족계 청나라 사람들 그리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민국에 의한 숙청을 피해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한 친청 성향 한족들 또한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몇몇 혹자들은 이렇게 한국으로 온 화교들 중에는 실제로 발해유민들의 후손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물론 이 주장이 맞다고 해도 몇백 년 전에 이주해온 발해유민들과 달리 이들은 한족에 거의 동화된 상태에서 이주한 경우이므로 따로 발해와 관련된 정체성을 가졌던 건 아니라 한국 본토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외국인들이 이주해온 것에 가깝다. 한중수교 이후에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여 신화교가 된 동북 3성 한족과 만주족 중에서도 생물학적으로 발해계 혈통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쪽도 한국 본토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외국인들이 이주해온 것일 뿐이다.
  • 많은 수의 발해인들이 요의 동경 요양부(현 랴오닝성 랴오양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 지역과 요서 지역에 거주했다. 이는 지속적인 부흥 운동과 발해인들의 저항을 견디다 못한 요태종이 상경 용천부를 불사르고 그 일대의 발해인들을 요서와 요하 일대로 강제 이주시킨 조치의 결과였다. 금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예를 들면 가문이 동경 요양부에 근거지를 두었던 걸로 보이는 황제 금세종은 어머니가 발해인인 혼혈이었으며, 여타 인척 관계도 발해인들과 많이 맺었다. 이들은 이후로도 동화되지 않고 있다가 몽골 제국 시대에 들어서는 여몽전쟁 때 끌려간 고려인 포로들과 혼합되어 고려 왕족 출신의 심왕의 통제를 받았던 걸로 보인다. 공민왕대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에도 요양의 주민들은 고려를 본국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초기에도 요동을 거쳐 명나라에 갔다 온 사신들이 남긴 조선인들이 요동에 많이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고, 정몽주도 그와 관련된 걸로 보이는 발해고성(渤海古城)이란 시를 지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명나라가 요동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면서 그 일환으로 많은 사민을 실시하였는데, 이후로는 요동의 조선인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된 걸로 보아 거의 모두 한족이나 만주족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 걸로 보인다.
  • 발해인들의 강제 이주 조치와 백두산 폭발을 연결짓는 말이 많은데, 발해인의 강제 이주와 백두산 폭발은 그 어떤 관련도 없다. 요 태종의 상경 방화와 발해인 이주는 928년이고, 백두산 폭발은 946년이다. 백두산이 폭발했을 때는 수십 만이 넘는 발해 가호들이 동경 요양부와 요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요 태종이 발해 고토를 포기한 것도 자연 재해 때문이 아니라 발해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버티지 못해서였다.


[1] 954년 후주로 귀화한 최오사(崔烏斯), 979년 송나라로 귀화한 대난하, 이훈(李勛) 등이 있다.[2] 후자는 현대 만주족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3] 그럼에도 요동 일대에는 발해 유민이 꽤 남아있던 걸로 추정되는데 이들에 관해서는 여담란에서 후술.[4] 요나라, 금나라 등 유목민족들이 북중국(또는 중국 전토)을 차지하며 한족 위에 군림했던 역사를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의 역사는 절반이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역사다."라며 깎아내리지만 중국인들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 나라들을 중국의 왕조로 여기는 게 바로 이런 이유다. 유목민족들은 한족을 지배하면서도 한변으론 그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며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문신들은 상당수가 한족일 정도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현대 한국인들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모두 일제강점기를 흑역사로 여기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다이쇼 시대 정도를 제외하면 한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탄압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일부 한민족조차 그러한 탄압에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5] 참고로 이하의 기록에서 나오는 호는 5명 내외의 한 가구를 뜻한다.[6] 현 황해남도 배천군.[7] 수만 명으로 축소해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수만으로 축소할만한 근거는 딱히 없는 상황이다.[8] 순수하게 발해인만 500명인 것도 아니었다.[9] 이에 대해서는 당대인들부터가 발해인과 여진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고려가 기록한 귀부기사에서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