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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1. 개요
袁翻(476 ~ 528)
북위의 인물. 자는 경상(景翔). 예주(豫州) 진군(陳郡) 항현(項縣) 출신. 진군 원씨 가문의 일원. 유송의 청주(青州) 주부(主簿) 원선(袁宣)의 아들.
2. 생애
원번의 아버지 원선은 송나라의 청주자사 심문수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내다가, 심문수를 따라서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같은 송나라 출신인 대장군 유창이 매번 그를 끌어주며 말하기를, 원선은 자신의 외조부 원숙(袁淑)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고, 자신의 부(府)의 자의참군 원제(袁濟)와 종친처럼 지내게 하였다. 원선은 당시 외롭고 가난하여 원제에게 매우 의지하였는데, 훗날 원번 형제들이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원제의 아들인 원광(袁洸), 원연(袁演)과 비로소 서로 다투며 경쟁하게 되었고, 원광 등은 공부(公府)를 거치면서 서로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원번은 젊어서부터 재능과 학문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고, 처음에는 봉조청(奉朝請)으로 임용되었다. 경명 원년(500년)에 이표가 비서성에서 근무할 때, 서흘(徐紇)이 원번을 천거하였고, 이표가 그를 끌어들여 겸저작좌랑(兼著作佐郎)으로 삼아 사서 편찬 업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흘이 유배되자 곧 직책이 해제되었다. 이후 승진하여 사도 좨주(司徒祭酒), 양렬장군(揚烈將軍), 상서전중랑(尚書殿中郎)을 역임하였다.
정시 원년(504년) 12월, 조서가 내려져 상서성(尚書省)와 문하성(門下省)의 관원들로 하여금 금용성(金墉城) 중서외성(中書外省)에서 모여 율령을 고찰하고 논의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이때 원번은 문하록사 상경(常景)과 손소(孫紹), 정위감 장호(張虎), 율박사 후견고(侯堅固), 치서시어사 고작, 전군장군 형묘(邢苗), 봉거도위 정령규, 우림감 왕원귀(王元龜), 상서랑 조형(祖瑩)과 송세경(宋世景), 원외랑 이염지, 태악령 공손숭(公孫崇) 등과 함께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또한, 태사 팽성왕 원협, 사주목 고양왕 원옹, 중서감 경조왕 원유, 전(前) 청주자사 유방, 좌위장군 원려, 겸장작대장 이소, 국자좨주 정도소, 정위소경 왕현(王顯) 등도 모두 이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원번은 예주중정(豫州中正)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명당(明堂)과 벽옹(闢雍)을 수리하고 건립하였는데, 원번이 논의하여 아뢰었다.
"삼가 명당(明堂)의 뜻을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유학자들이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다투어 일어나 돌아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멀리 경전(經傳)을 인용하거나 옆으로 기적(紀籍)을 채택하여 증거로 삼지 않고, 우선 뜻이 같은 바를 논하여 조서의 뜻에 응답하고자 할 뿐입니다. 대개 당우(唐虞) 이상의 일은 다 알기 어려우나,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이후의 일은 비교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제도와 문물의 극치는 삼대(三代)만한 것이 없으며, 문채가 찬란하고 성대한 것은 주(周)나라를 따르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드니 법도가 그 안에 있으며, 널리 미친 풍속과 남겨진 공적은 불후의 명성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가 《주관고공(周官考工)》에 기록된 바를 살펴보면, 모두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하면서 하나라와 은나라의 명칭과 제도를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틀렸겠습니까? 이로써 명당(明堂)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고, 삼대(三代)가 모두 이와 같았으니, 오제(五帝)를 배향하고 오행(五行)을 형상화했다는 그 의미가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와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월령(月令)》과 문장이 같은데, 비록 정치를 펼치고 때를 나누는 데 있어 당(堂)의 개수는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체계를 미루어 보아도 아홉 개의 방을 둘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 후 세상이 쇠퇴하고 예법이 무너져 법도가 뒤섞이고 느슨해졌으며, 바른 뜻은 사라져 숨고 헛 소문들이 그럴싸하게 퍼졌습니다. 명당에 아홉 방이 있다는 것은 《대례(戴禮)》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마리를 찾아 근원을 탐구해 봐도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한(漢)나라에서 이를 따라 스스로 한 시대의 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시대의 명당은 다섯 방이니, 이는 상제 한 분마다 한 방씩 배정한 것으로 오행의 수에 부합한다. 고로 《주례(周禮)》는 그 수에 의거하여 방을 만들었다. 덕행이 지금과 의심스러워 비록 다른 점이 있으나, 당시의 설명이 명백하고 본래의 제도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도 명백한 문구가 없다고 말하니, 다시 무엇을 책망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본래의 제도가 뚜렷이 남아 있다는 것은 주나라의 다섯 방 제도이고, 지금과 다르다는 것은 한나라가 주나라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한나라가 아홉 개의 방으로 한 것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제도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서 '이에 삼궁(三宮)을 짓고 가르침을 펴서 반상(班常)을 나누니, 다시 사당과 이층집에 여덟 방향으로 통하고 아홉 방이 있도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에 관한 글입니다. 그런데 설종(薛綜)이 주석하기를 '방(房)은 실(室)이니, 당(堂) 뒤에 아홉 방이 있음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당 뒤에 아홉 방이 있다는 제도는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외(裴頠) 또한 말하기를 '한나라는 네 방향의 구석에 방을 하나씩 두었으나 각기 그 방위에 맞게 자리 잡게 할 수 없었으니, 설령 그 형상을 그릴 수 있다 해도 그곳에 거처하며 사용하는 예법을 통하게 할 수 없었다. 이는 빈 그릇을 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단지 주나라의 법전을 없애고 옛 제도를 버리며 유물을 고치고 제도를 새로 만들고자 했기에, 더 이상 서적의 기록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현이 《삼례(三禮)》를 풀이하고 《오경이의(五經異義)》를 해석함에 있어 모두 생각과 정신을 다했기에,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명당도(明堂圖)를 살펴보면 모두 사람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바가 있고, 낱낱이 분명하고 확고하여 바꾸기 어려우니, 진실로 희미한 것을 붙잡고 그윽한 것을 밝혀 주공(周公)의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기에 충분합니다.
백개(伯喈)는 한나라 제도를 가감했으나, 그 글귀가 번잡하여 이미 옛것에 어긋나고 새것을 등졌으며, 또한 정현의 신묘한 해석을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기록에도 명당에서 오제에게 제사 지냈다는 글은 있으나, 그 처음 세워진 제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또 명쾌하게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터를 보건대 여전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나, 높낮이와 넓이가 《대례(戴禮)》와는 자못 다릅니다. 이러한데 어찌 자기 뜻대로 마음을 억눌러 곧바로 아홉 방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삼옹(三雍)이 각기 다른 곳에 있으니, 다시 노식(盧植)과 채옹의 뜻에 어긋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거가 없으니 어찌 경전으로 통용되겠습니까? 진(晉)나라 조정 또한 억지로 끌어다 붙인 해석이 분명하지 않았기에, 명당은 일층집이라는 논의가 있었으니, 이는 모두 경전의 바른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망령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 학자들의 상투적인 이야기일 뿐이니, 시대의 모범과 세상의 규범으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황대(皇代)는 이미 하늘의 운수를 타고 역법을 다스리며, 천하를 얻어 대궐을 다스리고 있으니, 마땅히 옛것을 상고하고 하늘을 본받으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따르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옛것을 서술하되 함부로 새로 만들지 말고 삼대(三代)의 제도를 본받아 백 세대 뒤에도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찌 허망하게 대씨(戴氏)의 흩어진 책에 담긴 뜬구름 잡는 설을 쫓아, 경전과 기강이 담긴 《아고(雅誥)》의 남겨진 훈계에 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갈가리 찢겨져 형체를 알 수 없는 헛소리와 손가락으로 대충 그린 망령된 도면으로써 온 세상을 본뜨게 하여 후세에 보이려 하십니까?
또한 북경(北京, 평성)에서의 제도 마련이 모두 마땅하고 적절했던 것은 아니며, 수리하거나 건설함에 있어 멋대로 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이 바뀌고 예법이 변하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이치상 진실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면, 어찌 반드시 옛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까? 또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는 날마다 겨를이 없었으나, 선조의 규범과 제도는 매사에 옛것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수년 동안 고치고 바꾼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영구한 법을 만들기는 어렵고 자주 바꾸기는 쉽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궁실과 창고는 대부분 옛 자취를 따르면서, 유독 명당(明堂)과 벽옹(闢雍)만은 오늘날의 제도를 준수하려 하십니까? 그것이 세워진 때 또한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외람되게도 질문을 받았기에, 곧 가벼이 서두르며 신의 소견을 올립니다. 청컨대 명당(明堂)은 다섯 방으로 하여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하시고, 교외에 세우는 삼옹(三雍)은 예전의 장소에 의거하기를 구합니다. 바라건대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함이 있게 하여 법도를 잃지 않게 하소서. 신의 식견이 치우치고 학문이 거칠어 물러나매 망령되이 떠든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삼가 《주관고공(周官考工)》에 기록된 바를 살펴보면, 모두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하면서 하나라와 은나라의 명칭과 제도를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틀렸겠습니까? 이로써 명당(明堂)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고, 삼대(三代)가 모두 이와 같았으니, 오제(五帝)를 배향하고 오행(五行)을 형상화했다는 그 의미가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와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월령(月令)》과 문장이 같은데, 비록 정치를 펼치고 때를 나누는 데 있어 당(堂)의 개수는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체계를 미루어 보아도 아홉 개의 방을 둘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 후 세상이 쇠퇴하고 예법이 무너져 법도가 뒤섞이고 느슨해졌으며, 바른 뜻은 사라져 숨고 헛 소문들이 그럴싸하게 퍼졌습니다. 명당에 아홉 방이 있다는 것은 《대례(戴禮)》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마리를 찾아 근원을 탐구해 봐도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한(漢)나라에서 이를 따라 스스로 한 시대의 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시대의 명당은 다섯 방이니, 이는 상제 한 분마다 한 방씩 배정한 것으로 오행의 수에 부합한다. 고로 《주례(周禮)》는 그 수에 의거하여 방을 만들었다. 덕행이 지금과 의심스러워 비록 다른 점이 있으나, 당시의 설명이 명백하고 본래의 제도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도 명백한 문구가 없다고 말하니, 다시 무엇을 책망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본래의 제도가 뚜렷이 남아 있다는 것은 주나라의 다섯 방 제도이고, 지금과 다르다는 것은 한나라가 주나라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한나라가 아홉 개의 방으로 한 것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제도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서 '이에 삼궁(三宮)을 짓고 가르침을 펴서 반상(班常)을 나누니, 다시 사당과 이층집에 여덟 방향으로 통하고 아홉 방이 있도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에 관한 글입니다. 그런데 설종(薛綜)이 주석하기를 '방(房)은 실(室)이니, 당(堂) 뒤에 아홉 방이 있음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당 뒤에 아홉 방이 있다는 제도는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외(裴頠) 또한 말하기를 '한나라는 네 방향의 구석에 방을 하나씩 두었으나 각기 그 방위에 맞게 자리 잡게 할 수 없었으니, 설령 그 형상을 그릴 수 있다 해도 그곳에 거처하며 사용하는 예법을 통하게 할 수 없었다. 이는 빈 그릇을 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단지 주나라의 법전을 없애고 옛 제도를 버리며 유물을 고치고 제도를 새로 만들고자 했기에, 더 이상 서적의 기록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현이 《삼례(三禮)》를 풀이하고 《오경이의(五經異義)》를 해석함에 있어 모두 생각과 정신을 다했기에,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명당도(明堂圖)를 살펴보면 모두 사람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바가 있고, 낱낱이 분명하고 확고하여 바꾸기 어려우니, 진실로 희미한 것을 붙잡고 그윽한 것을 밝혀 주공(周公)의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기에 충분합니다.
백개(伯喈)는 한나라 제도를 가감했으나, 그 글귀가 번잡하여 이미 옛것에 어긋나고 새것을 등졌으며, 또한 정현의 신묘한 해석을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기록에도 명당에서 오제에게 제사 지냈다는 글은 있으나, 그 처음 세워진 제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또 명쾌하게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터를 보건대 여전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나, 높낮이와 넓이가 《대례(戴禮)》와는 자못 다릅니다. 이러한데 어찌 자기 뜻대로 마음을 억눌러 곧바로 아홉 방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삼옹(三雍)이 각기 다른 곳에 있으니, 다시 노식(盧植)과 채옹의 뜻에 어긋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거가 없으니 어찌 경전으로 통용되겠습니까? 진(晉)나라 조정 또한 억지로 끌어다 붙인 해석이 분명하지 않았기에, 명당은 일층집이라는 논의가 있었으니, 이는 모두 경전의 바른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망령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 학자들의 상투적인 이야기일 뿐이니, 시대의 모범과 세상의 규범으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황대(皇代)는 이미 하늘의 운수를 타고 역법을 다스리며, 천하를 얻어 대궐을 다스리고 있으니, 마땅히 옛것을 상고하고 하늘을 본받으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법도를 따르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옛것을 서술하되 함부로 새로 만들지 말고 삼대(三代)의 제도를 본받아 백 세대 뒤에도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찌 허망하게 대씨(戴氏)의 흩어진 책에 담긴 뜬구름 잡는 설을 쫓아, 경전과 기강이 담긴 《아고(雅誥)》의 남겨진 훈계에 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갈가리 찢겨져 형체를 알 수 없는 헛소리와 손가락으로 대충 그린 망령된 도면으로써 온 세상을 본뜨게 하여 후세에 보이려 하십니까?
또한 북경(北京, 평성)에서의 제도 마련이 모두 마땅하고 적절했던 것은 아니며, 수리하거나 건설함에 있어 멋대로 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이 바뀌고 예법이 변하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이치상 진실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면, 어찌 반드시 옛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까? 또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는 날마다 겨를이 없었으나, 선조의 규범과 제도는 매사에 옛것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수년 동안 고치고 바꾼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영구한 법을 만들기는 어렵고 자주 바꾸기는 쉽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궁실과 창고는 대부분 옛 자취를 따르면서, 유독 명당(明堂)과 벽옹(闢雍)만은 오늘날의 제도를 준수하려 하십니까? 그것이 세워진 때 또한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외람되게도 질문을 받았기에, 곧 가벼이 서두르며 신의 소견을 올립니다. 청컨대 명당(明堂)은 다섯 방으로 하여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하시고, 교외에 세우는 삼옹(三雍)은 예전의 장소에 의거하기를 구합니다. 바라건대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함이 있게 하여 법도를 잃지 않게 하소서. 신의 식견이 치우치고 학문이 거칠어 물러나매 망령되이 떠든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후에 변방의 수비대를 선발하는 일을 논의했는데, 원번이 논의하여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양한(兩漢)은 서북쪽을 경계하였고 위(魏)나라와 진(晉)나라는 동남쪽을 대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변방을 진수하고 요새를 지키는 일에는 반드시 위엄과 신망이 두터운 이에게 맡겨야 하며, 반란을 토벌하고 복종하는 자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일은 실로 온유하고 어진 성품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숙(田叔)과 위상(魏尚)은 사막에서 명성이 높았고, 당양후(當陽侯)와 거평후(鉅平侯)는 강한(江漢) 지역에 공적을 남겼으니, 기적(紀籍)은 이를 미담으로 삼고 고금은 이를 성대한 덕으로 여깁니다. 황상께서 슬기로움과 총명함으로 어좌를 이어받으신 이래, 풍속에 응하시어 교화가 멀리 미치고, 위엄은 가을 서리보다 엄격하며, 은혜는 봄 이슬처럼 젖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회해(淮海) 지역이 정성을 다해 바치게 하고, 화양(華陽)이 질서를 찾게 하였으며, 성들이 연이어 직접 뵙기를 청하고, 집집마다 인(仁)으로 귀순하게 하셨습니다. 검각(劍閣)에 수레를 매달아 둔 것이 어찌 지난날의 일뿐이겠으며, 금릉(金陵)에서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는 일이 다시 오늘날 있습니다. 그러나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목(牧)은 마땅히 일시의 인망을 다한 재목이어야 하며, 양주(梁州)와 영주(郢州)의 군(君)은 더욱이 지금의 빼어난 인재여야 합니다.
근래 변방의 주(州)와 군(郡)을 보아하니 관직에 이르자마자 곧바로 등용되고, 변방의 통수권자 자리가 마땅하면 즉시 임용됩니다. 그런데 간혹 부도덕한 범인(凡人)이 그 자리에 앉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집안의 못난 자식이 임용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백성을 다스리고 따뜻하게 구휼하는 법은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무거운 부역을 시키는 잔인한 법만을 압니다. 수라(戍邏)를 넓게 펴고 수령(帥領)을 많이 두면서, 혹은 자신의 주변 인척을 등용하거나, 혹은 타인의 재물과 뇌물을 받고 청탁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도적을 방어하거나 외적을 막으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로지 장사를 통해 재물을 긁어모으려는 뜻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용맹하고 힘 있는 자는 병사들은 몰아내어 약탈을 일삼게 하니, 만약 강한 적을 만나면 병사들은 곧장 포로가 되어버리고, 만약 병사들이 노획한 것이 있으면 빼앗아 자기 자신의 부로 삼습니다. 병사들 중 파리하고 약한 자는 쇠를 다루는 기술을 조금 알거나 풀과 나무를 가꾸는 일에 조금 익숙하다면, 진영과 보루를 낱낱이 뒤져 찾아내어 온갖 방법으로 고된 부역에 동원합니다. 그 나머지 병사들은 깊은 산에서 나무를 베거나 평지에서 풀을 뽑게 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행렬이 길 위에 가득합니다. 이들의 녹봉은 이미 많지 않고 밑천 또한 한계가 있는데, 이들의 상관은 그들에게 실제 비단을 거두어들이고는 쭉정이를 나누어 줍니다. 그들의 힘을 다 빼놓고는 옷은 얇게 입히며, 그들의 노동력은 다 쓰면서 먹을 것은 아낍니다. 겨울을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질병과 고통이 더해져, 도랑이나 구덩이에서 죽어가는 자가 열에 일곱여덟은 됩니다. 이 때문에 오(吳)와 초(楚)의 간첩들이 이러한 허실을 살피고는 모두 이르기를 '식량은 다하고 병사들은 지쳤으니 쉽게 틈을 타서 어지럽힐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와 양 같은 무리를 몰아 자주 강토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갑옷에 이가 생길 정도이며, 십만 대군이 들판에 머물고 매일 천금의 비용이 드니 그 폐단의 깊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변방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오늘날의 우환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생(賈生)이 통곡했던 것에는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릇 그 흐름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 근원을 맑게 해야 하고, 그 끝을 다스리려면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는데 어찌 알아서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제부터 형(荊), 양(揚), 서(徐), 예(豫), 양(梁), 익(益)의 여러 번국 및 그들이 관할하는 군현(郡縣), 부좌(府佐), 통군(統軍)에서 수주(戍主)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의 신하와 왕공(王公) 이하로 하여금 각자 알고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되 반드시 그 재능을 가려 뽑고 계급에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통솔하는 데 방도가 있고, 청렴하고 고결함이 홀로 두드러지며, 위엄이 군대를 다스리기에 충분하고, 신망이 멀리 있는 이들을 품을 수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을 어루만져 그들의 기쁜 마음을 얻고,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공적인 이익만을 닦는 자가 있다면, 즉시 작위와 상을 더해 주어 그 임무에 오래 머물게 하고 때맞춰 포상을 내려 그 충성심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를 천거한 사람에게도 또한 특별한 예우를 내려 인재를 얻은 것을 표창하고 그 정성과 절개를 가상히 여겨야 합니다.만약 한마음으로 공무에 봉사하지 못하고 재능이 방어하기에 부족하며, 탐욕스러워 날로 부유해지기만 할 뿐 경영하는 일에는 들리는 바가 없고, 사람들이 그 덕을 보지 못하며 병사들이 그 노역을 싫어한다면, 즉시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그 죄를 밝혀야 합니다. 그를 천거한 사람 또한 사안에 따라 관직을 면하거나 강등시켜, 잘못 천거한 것을 책망하고 그 거짓되고 가벼움을 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천거하는 사람이 사사로운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고, 임무를 맡은 자도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을 저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선과 악이 이미 자세히 살펴지고 저지함과 권장함이 또한 분명해지면, 바라건대 변방의 우환은 영원히 사라지고 비난 섞인 논의도 잠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원번은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근래 변방의 주(州)와 군(郡)을 보아하니 관직에 이르자마자 곧바로 등용되고, 변방의 통수권자 자리가 마땅하면 즉시 임용됩니다. 그런데 간혹 부도덕한 범인(凡人)이 그 자리에 앉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집안의 못난 자식이 임용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백성을 다스리고 따뜻하게 구휼하는 법은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무거운 부역을 시키는 잔인한 법만을 압니다. 수라(戍邏)를 넓게 펴고 수령(帥領)을 많이 두면서, 혹은 자신의 주변 인척을 등용하거나, 혹은 타인의 재물과 뇌물을 받고 청탁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도적을 방어하거나 외적을 막으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로지 장사를 통해 재물을 긁어모으려는 뜻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용맹하고 힘 있는 자는 병사들은 몰아내어 약탈을 일삼게 하니, 만약 강한 적을 만나면 병사들은 곧장 포로가 되어버리고, 만약 병사들이 노획한 것이 있으면 빼앗아 자기 자신의 부로 삼습니다. 병사들 중 파리하고 약한 자는 쇠를 다루는 기술을 조금 알거나 풀과 나무를 가꾸는 일에 조금 익숙하다면, 진영과 보루를 낱낱이 뒤져 찾아내어 온갖 방법으로 고된 부역에 동원합니다. 그 나머지 병사들은 깊은 산에서 나무를 베거나 평지에서 풀을 뽑게 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행렬이 길 위에 가득합니다. 이들의 녹봉은 이미 많지 않고 밑천 또한 한계가 있는데, 이들의 상관은 그들에게 실제 비단을 거두어들이고는 쭉정이를 나누어 줍니다. 그들의 힘을 다 빼놓고는 옷은 얇게 입히며, 그들의 노동력은 다 쓰면서 먹을 것은 아낍니다. 겨울을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질병과 고통이 더해져, 도랑이나 구덩이에서 죽어가는 자가 열에 일곱여덟은 됩니다. 이 때문에 오(吳)와 초(楚)의 간첩들이 이러한 허실을 살피고는 모두 이르기를 '식량은 다하고 병사들은 지쳤으니 쉽게 틈을 타서 어지럽힐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개와 양 같은 무리를 몰아 자주 강토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갑옷에 이가 생길 정도이며, 십만 대군이 들판에 머물고 매일 천금의 비용이 드니 그 폐단의 깊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변방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오늘날의 우환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생(賈生)이 통곡했던 것에는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릇 그 흐름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 근원을 맑게 해야 하고, 그 끝을 다스리려면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는데 어찌 알아서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제부터 형(荊), 양(揚), 서(徐), 예(豫), 양(梁), 익(益)의 여러 번국 및 그들이 관할하는 군현(郡縣), 부좌(府佐), 통군(統軍)에서 수주(戍主)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의 신하와 왕공(王公) 이하로 하여금 각자 알고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되 반드시 그 재능을 가려 뽑고 계급에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통솔하는 데 방도가 있고, 청렴하고 고결함이 홀로 두드러지며, 위엄이 군대를 다스리기에 충분하고, 신망이 멀리 있는 이들을 품을 수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을 어루만져 그들의 기쁜 마음을 얻고,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공적인 이익만을 닦는 자가 있다면, 즉시 작위와 상을 더해 주어 그 임무에 오래 머물게 하고 때맞춰 포상을 내려 그 충성심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를 천거한 사람에게도 또한 특별한 예우를 내려 인재를 얻은 것을 표창하고 그 정성과 절개를 가상히 여겨야 합니다.만약 한마음으로 공무에 봉사하지 못하고 재능이 방어하기에 부족하며, 탐욕스러워 날로 부유해지기만 할 뿐 경영하는 일에는 들리는 바가 없고, 사람들이 그 덕을 보지 못하며 병사들이 그 노역을 싫어한다면, 즉시 공개적으로 처형하여 그 죄를 밝혀야 합니다. 그를 천거한 사람 또한 사안에 따라 관직을 면하거나 강등시켜, 잘못 천거한 것을 책망하고 그 거짓되고 가벼움을 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천거하는 사람이 사사로운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고, 임무를 맡은 자도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을 저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선과 악이 이미 자세히 살펴지고 저지함과 권장함이 또한 분명해지면, 바라건대 변방의 우환은 영원히 사라지고 비난 섞인 논의도 잠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희평 원년(516년), 원번은 복직하여 관군장군(冠軍將軍) 및 정위소경(廷尉少卿)이 되었고, 곧이어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졌다가 지방으로 나가 평양태수(平陽太守)가 되었다. 원번은 정위(廷尉)로 있을 때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자못 받았는데, 평양군에 부임해서도 지방에 나간 것에 불만스러워하며 매우 의기소침하였기에, 마침내 〈사귀부(思歸賦)〉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의 빛깔이 어둑어둑하니, 높은 산의 봉우리로다. 달은 노을을 만나 아직 밝지 못하고, 노을은 달을 마주하여 그늘을 이루었네. 타향의 길들을 바라보니, 구국(舊國)의 못과 숲이 아니로구나. 산에는 나무가 있어 달을 가리고, 시내에는 다리가 없는데 다시금 깊기도 하네. 떠도는 구름이 끝이 없음을 슬퍼하니, 어찌 이 한(恨)을 금하기 어려우랴. 이에 섞인 돌들은 봉우리가 되고, 여러 안개는 한 빛깔이 되었구나. 이삭은 끝없이 솟아나고, 안개는 다함 없이 피어오르네. 흩날리는 꽃들이 섞여 수(繡)를 놓은 듯하고, 떠다니는 거미줄이 엉겨 천을 짠 듯하도다. 나비 두 마리는 유희하며 서로 쫓고, 제비는 쌍으로 날며 날개질하네. 말을 몰아 멀리 가는 것을 원망하며, 정벌 나간 대장부는 아직 쉬지 못함을 탄식하노라!
이에 험준한 골짜기에 다다라 층층이 쌓인 언덕에 앉노라. 북쪽으로는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우뚝 솟은 용문(龍門)의 험준함을 우러러보네. 천 겹으로 겹쳐진 산은 비취색으로 솟아 있고, 만 리로 가로지른 물결은 파도를 일으키도다. 멀리는 원숭이와 날다람쥐, 고라니와 사향노루가 살고, 물에는 물고기와 자라, 거북과 악어가 헤엄치네. 저 아스라이 보이는 곳은 공(鞏)과 낙(洛)이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관(關)과 하(河)로다. 마음은 답답하여 한갓 상처 입고, 생각은 흔들려 헛되이 가득 차네. 옛사람을 그리워하나 보이지 않으니, 정신은 뒤집히고 혼은 끊어질 듯하구나. 끊어진 혼은 어지러운 듯하고, 근심은 밀려와 흩어지지 않네. 맑은 물에 몸을 굽혀 비춰보니, 물줄기는 아득히 흘러가도다. 기이한 빛깔들이 종횡으로 펼쳐지고, 기이한 빛은 찬란하게 빛나네. 아래로는 푸른 모래를 마주하고, 위로는 푸른 기슭을 보노라. 기슭 위에는 기운이 자욱하고, 엇갈리는 노울은 붉은 안개를 이루었네. 봉황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노닐고, 햇살은 물을 비추어 무늬를 만드네. 가고 또 가며 시냇가를 거닐고, 보고 또 보며 부군(夫君)을 그리노라. 그대의 문은 아홉 겹의 문이요, 나와의 이별은 천 리나 떨어져 있네. 원컨대 한 번 뵙고 내 뜻을 전하고 싶으나, 나는 보지 못하고 그대는 듣지 못하시네. 넋은 멍하여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고, 기운은 뒤틀려 홀로 맺혀 있을 뿐이로다.
저 새와 말과 같이 무지한 미물조차 남쪽과 북쪽의 고향을 향한 정을 품고 있거늘, 비록 내 몸이 굳세고 비루하다 한들 어찌 상국(上國)을 잊을 수 있겠는가? 상국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나와 이 변방 고을의 음흉한 무리를 마주하고 있노라. 그 형체는 도깨비와 다를 바 없고, 그 마음 또한 해충과 다를 게 없구나. 이들을 다스려 교화하려 해도 감화시키기 어려우니, 어찌 잔학하게 굴지 않고서 이겨낼 수 있겠는가? 나아가고 물러남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기에, 한갓 아침이 다 가도록 묵묵히 있을 뿐이로다. 부디 살아서 낙양의 강가로 돌아가, 천지(天地)와 같은 폐하의 두터운 은덕을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라.
이후 원번은 관군장군(冠軍將軍) 및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전임되었다.이에 험준한 골짜기에 다다라 층층이 쌓인 언덕에 앉노라. 북쪽으로는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우뚝 솟은 용문(龍門)의 험준함을 우러러보네. 천 겹으로 겹쳐진 산은 비취색으로 솟아 있고, 만 리로 가로지른 물결은 파도를 일으키도다. 멀리는 원숭이와 날다람쥐, 고라니와 사향노루가 살고, 물에는 물고기와 자라, 거북과 악어가 헤엄치네. 저 아스라이 보이는 곳은 공(鞏)과 낙(洛)이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관(關)과 하(河)로다. 마음은 답답하여 한갓 상처 입고, 생각은 흔들려 헛되이 가득 차네. 옛사람을 그리워하나 보이지 않으니, 정신은 뒤집히고 혼은 끊어질 듯하구나. 끊어진 혼은 어지러운 듯하고, 근심은 밀려와 흩어지지 않네. 맑은 물에 몸을 굽혀 비춰보니, 물줄기는 아득히 흘러가도다. 기이한 빛깔들이 종횡으로 펼쳐지고, 기이한 빛은 찬란하게 빛나네. 아래로는 푸른 모래를 마주하고, 위로는 푸른 기슭을 보노라. 기슭 위에는 기운이 자욱하고, 엇갈리는 노울은 붉은 안개를 이루었네. 봉황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노닐고, 햇살은 물을 비추어 무늬를 만드네. 가고 또 가며 시냇가를 거닐고, 보고 또 보며 부군(夫君)을 그리노라. 그대의 문은 아홉 겹의 문이요, 나와의 이별은 천 리나 떨어져 있네. 원컨대 한 번 뵙고 내 뜻을 전하고 싶으나, 나는 보지 못하고 그대는 듣지 못하시네. 넋은 멍하여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고, 기운은 뒤틀려 홀로 맺혀 있을 뿐이로다.
저 새와 말과 같이 무지한 미물조차 남쪽과 북쪽의 고향을 향한 정을 품고 있거늘, 비록 내 몸이 굳세고 비루하다 한들 어찌 상국(上國)을 잊을 수 있겠는가? 상국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나와 이 변방 고을의 음흉한 무리를 마주하고 있노라. 그 형체는 도깨비와 다를 바 없고, 그 마음 또한 해충과 다를 게 없구나. 이들을 다스려 교화하려 해도 감화시키기 어려우니, 어찌 잔학하게 굴지 않고서 이겨낼 수 있겠는가? 나아가고 물러남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기에, 한갓 아침이 다 가도록 묵묵히 있을 뿐이로다. 부디 살아서 낙양의 강가로 돌아가, 천지(天地)와 같은 폐하의 두터운 은덕을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라.
정광 원년(520년) 10월, 유연의 가한 욱구려아나괴(阿那瑰)와 후주(後主) 욱구려바라문(婆羅門)이 모두 내전을 피해 투항해 오자, 조정에서는 원번에게 이들을 어디에 안치할지 물었다. 이에 원번이 상표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재능이 없음에도 잘못 선발되어 변방의 임무를 욕되게 맡고 있는데, 외람되게도 연연(蠕蠕, 유연)의 주인 아나괴(阿那瑰)와 바라문(婆羅門) 등을 안치할 처소의 멀고 가까움과 그 이해관계의 마땅함에 대하여 질문을 내려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흉노(匈奴)가 우환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니, 비록 융성했던 주(周)나라와 성대했던 한(漢)나라라도 능히 막아 굴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은 쇠약해지면 항복하고 부강해지면 배반합니다. 이 때문에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명장들도 스스로 쉴 겨를이 없었으며, 위청(衛青)과 곽거병(霍去病)의 근면함으로도 수고로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혹은 문덕(文德)을 닦아 그들을 오게 하고, 혹은 방패와 창을 들어 그들을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한 번 얻으면 한 번 잃으니 이익과 손해가 서로 맞먹었습니다. 그러므로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입조하고 좌현왕(左賢王)이 들어와 모신 것을 사적(史籍)에서는 성대한 일이라 일컬으며 천 년 동안 미담으로 삼고 있습니다. 황대(皇代)가 발흥하여 사해(四海)를 위엄으로 다스림에도, 저들은 북쪽 도읍에 있을 때부터 여전히 강토를 어지럽혔습니다. 길조에 따라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정한 이래로, 고차(高車)와 연연(蠕蠕)이 번갈아 서로를 집어삼켰습니다. 처음에는 연연이 쇠미하고 고차가 강성하여, 연연은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으나, 고차는 서북쪽 멀리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러다 유연이 다시 진작하여 도리어 고차를 격파하니, 그 왕은 죽고 백성은 흩어져 실처럼 가느다랗게 끊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차가 이제 마침내 그 치욕을 씻고 다시 연연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무리가 번다하여 갑자기 멸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원수를 싸우게 하는 것은 곧 변장자(卞莊子)가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던 계책과 같으니, 수십 년 동안 국경에 먼지가 일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연연이 고차에게 토벌당하여 멸망의 위기에 놓이자, 밖으로는 대국(大國, 위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군주가 몸을 던져 한 시기에 도착하였고,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귀순하며 만 리 길을 줄지어 따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조정에서 가련히 여겨 종묘와 사직을 다시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물러나서는 몸을 의탁할 길을 얻어 처자식을 보존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먼 곳의 거친 오랑캐로서 믿음과 순종을 알지 못하고, 끝내 순수하고 굳건한 절개가 없어 반드시 저버릴 마음을 품을 것이나,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는 것은 여러 성군(聖君)들의 공통된 법도이며, 항복해 온 자를 어루만지고 귀순한 자를 구휼하는 것은 오랜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저들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큰 덕망에 흠집이 날 것이요, 만약 저들을 받아들여 예우한다면 우리의 물자와 비축된 식량이 손실될 것입니다. 찾아온 자들이 이미 많으니 이들을 모두 내지로 옮기는 것은, 단지 저들의 마음이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 또한 대단히 고될 것입니다. 무릇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울삼을 만한 교훈이 멀지 않으니, 수레가 뒤집힌 화는 유연(劉淵)과 석륵(石勒) 때에 있었으므로 그 어긋난 수레바퀴 자국을 결코 다시 밟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연연이 명맥을 이어나가 존재한다면 고차는 도리어 내부를 돌아봐야 하는 근심이 있어 감히 우리 상국(上國)을 엿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연연이 완전히 멸망한다면 고차가 제멋대로 날뛸 계책을 어찌 쉽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연연은 비록 그 임금이 위에서 도망쳐 오고 백성은 아래에서 흩어졌으나, 남은 무리가 실로 번성하고 부락이 여전히 많아 곳곳에 바둑판처럼 퍼져서 지금의 임금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고차 역시 일시에 그들을 모두 병합하여 다 복종시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고차의 군사와 말은 비록 많으나 그 임금이 매우 어리석고 유약하여, 위에서는 아래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를 받들지 않으며 오로지 약탈을 밑천으로 삼고 침탈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서(河西)에서 강한 적을 막아야만 하는 지역은 오직 양주(涼州)와 돈황(敦煌)뿐입니다. 양주는 땅은 넓으나 백성이 드물고 군량과 병기가 본래 부족하며, 돈황과 주천(酒泉)의 공허함은 더욱 심합니다. 만약 연연이 다시 세워지지 못하여 고차로 하여금 홀로 북쪽 변방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한다면, 서쪽을 돌아봐야 하는 근심은 단지 아침저녁 사이의 일이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연의 두 임금을 모두 보살펴 주어야 마땅합니다. 아나괴(阿那瑰)는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거처하게 하고, 바라문(婆羅門)은 서쪽 변두리에 머물게 하여, 귀순한 백성들을 나누어 각기 소속된 바가 있게 하소서. 아나괴가 살고 있는 곳은 신이 직접 본 적이 없어 그 안의 사세(事勢)를 감히 함부로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바라문에 대해서는 청컨대 서해(西海)의 옛 성을 수리하여 그를 안치해 주소서. 서해군은 본래 양주에 속하였는데, 지금은 주천의 바로 맞은편이자 장액(張掖)에서 서북쪽으로 1,200리 거리에 있으며, 고차가 살고 있는 금산(金山)과는 1,000여 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북쪽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자 한(漢)나라가 군대를 이동시키던 옛길이며,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비단 지금 바라문을 이곳에 거처하게 하는 것이 일의 형편상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곧 영구히 중요한 수자리로 삼아 서북쪽을 진압하고 방어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어진 장수 한 명을 보내어 의심스러운 상황에 대비하게 하여, 그대로 바라문을 감시하는 동시에 보호하게 하소서.
무릇 여러 주(州)와 진(鎮)에서 옮겨와야 할 병사들을 형편에 따라 나누어 배치하여, 농사짓는 한편 수비하게 하소서. 이는 겉으로는 연연을 안치하는 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으로 고차를 대비하는 계책입니다. 1년이나 2년이 지나면 식량과 병력이 넉넉해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변방을 안정시키고 요새를 보전하는 장구한 계책입니다. 만약 바라문이 스스로 분발하여 남은 무리의 마음을 얻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그 나라를 다시 일으킨다면, 점차 북쪽으로 옮겨가 유사(流沙)를 건너가게 하소서. 그리되면 곧 우리의 외번(外蕃)이 되어 고차의 강한 적수가 될 것이니, 서북방의 우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간사하게 마음을 바꾸어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배반한다 해도, 이는 도망 다니는 도적에 불과할 뿐이니 우리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지금 서둘러 도모하지 않았다가 오랑캐의 마음에 딴 뜻이 생겨, 혹여라도 저들이 먼저 서해를 점거하여 우리의 험요한 요충지를 빼앗는다면, 주천과 장액은 자연히 고립되어 위태로워질 것이며, 장하(長河) 서쪽 지역은 끝내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시작을 도모하지 않고 나중에 결과만을 걱정하신다면, 배꼽을 깨물고 싶어도 닿지 않는 것처럼 후회를 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신의 우매한 소견이 만약 허락된다면, 비옵건대 대사(大使)를 양주, 돈황 및 서해로 보내어 산곡의 요해처를 직접 살피게 하시고, 보루와 초소의 배치가 적절한지 친히 검열하게 하소서. 또한 군사와 말의 수를 상의하고 식량과 병기를 점검하여, 부대 편성을 확정하고 안치할 곳을 적절히 정하게 하소서. 봄이 되면 서해 일대에 즉시 씨를 뿌리게 하여 가을에 한 해의 양식을 거둔다면, 다시는 수송하는 수고를 들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한 서해의 북쪽 변방은 곧 넓은 사막으로서 야생 짐승들이 수천수백 마리씩 떼 지어 모여드는 곳이니, 바로 연연이 활을 쏘아 사냥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밭을 일궈 스스로 공양하고 짐승을 잡아 스스로 자급하며 서로 돕게 한다면, 충분히 스스로를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리 준비하는 것이 조금은 손해처럼 보일지 모르나, 한 해의 마지막에 큰 계책을 따져본다면 그 이익은 실로 많을 것입니다. 고차의 시라소니나 이리와 같은 마음을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들이 신하를 칭하며 정성을 보일지라도, 겉으로는 넉넉히 받아들이되 안으로는 대비를 더욱 깊게 해야 하니, 이것이 이른바 '남보다 앞서서 남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듯한 좁은 소견으로 말씀을 올리니, 망령된 것이 많을까 두렵습니다."
당시 조정의 논의는 원번의 제안을 옳게 여겼다. 이후 원번은 다시 도읍으로 돌아와 이부낭중(吏部郎中)에 임명되었고, 평남장군(平南將軍)과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이어서 평남장군 직함으로 제주자사(齊州刺史)로 나아갔으나, 정사에서의 업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지금 연연이 고차에게 토벌당하여 멸망의 위기에 놓이자, 밖으로는 대국(大國, 위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군주가 몸을 던져 한 시기에 도착하였고,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귀순하며 만 리 길을 줄지어 따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조정에서 가련히 여겨 종묘와 사직을 다시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물러나서는 몸을 의탁할 길을 얻어 처자식을 보존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먼 곳의 거친 오랑캐로서 믿음과 순종을 알지 못하고, 끝내 순수하고 굳건한 절개가 없어 반드시 저버릴 마음을 품을 것이나,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는 것은 여러 성군(聖君)들의 공통된 법도이며, 항복해 온 자를 어루만지고 귀순한 자를 구휼하는 것은 오랜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저들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큰 덕망에 흠집이 날 것이요, 만약 저들을 받아들여 예우한다면 우리의 물자와 비축된 식량이 손실될 것입니다. 찾아온 자들이 이미 많으니 이들을 모두 내지로 옮기는 것은, 단지 저들의 마음이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 또한 대단히 고될 것입니다. 무릇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울삼을 만한 교훈이 멀지 않으니, 수레가 뒤집힌 화는 유연(劉淵)과 석륵(石勒) 때에 있었으므로 그 어긋난 수레바퀴 자국을 결코 다시 밟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연연이 명맥을 이어나가 존재한다면 고차는 도리어 내부를 돌아봐야 하는 근심이 있어 감히 우리 상국(上國)을 엿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연연이 완전히 멸망한다면 고차가 제멋대로 날뛸 계책을 어찌 쉽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연연은 비록 그 임금이 위에서 도망쳐 오고 백성은 아래에서 흩어졌으나, 남은 무리가 실로 번성하고 부락이 여전히 많아 곳곳에 바둑판처럼 퍼져서 지금의 임금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고차 역시 일시에 그들을 모두 병합하여 다 복종시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고차의 군사와 말은 비록 많으나 그 임금이 매우 어리석고 유약하여, 위에서는 아래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를 받들지 않으며 오로지 약탈을 밑천으로 삼고 침탈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서(河西)에서 강한 적을 막아야만 하는 지역은 오직 양주(涼州)와 돈황(敦煌)뿐입니다. 양주는 땅은 넓으나 백성이 드물고 군량과 병기가 본래 부족하며, 돈황과 주천(酒泉)의 공허함은 더욱 심합니다. 만약 연연이 다시 세워지지 못하여 고차로 하여금 홀로 북쪽 변방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한다면, 서쪽을 돌아봐야 하는 근심은 단지 아침저녁 사이의 일이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연의 두 임금을 모두 보살펴 주어야 마땅합니다. 아나괴(阿那瑰)는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거처하게 하고, 바라문(婆羅門)은 서쪽 변두리에 머물게 하여, 귀순한 백성들을 나누어 각기 소속된 바가 있게 하소서. 아나괴가 살고 있는 곳은 신이 직접 본 적이 없어 그 안의 사세(事勢)를 감히 함부로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바라문에 대해서는 청컨대 서해(西海)의 옛 성을 수리하여 그를 안치해 주소서. 서해군은 본래 양주에 속하였는데, 지금은 주천의 바로 맞은편이자 장액(張掖)에서 서북쪽으로 1,200리 거리에 있으며, 고차가 살고 있는 금산(金山)과는 1,000여 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북쪽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자 한(漢)나라가 군대를 이동시키던 옛길이며,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비단 지금 바라문을 이곳에 거처하게 하는 것이 일의 형편상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곧 영구히 중요한 수자리로 삼아 서북쪽을 진압하고 방어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어진 장수 한 명을 보내어 의심스러운 상황에 대비하게 하여, 그대로 바라문을 감시하는 동시에 보호하게 하소서.
무릇 여러 주(州)와 진(鎮)에서 옮겨와야 할 병사들을 형편에 따라 나누어 배치하여, 농사짓는 한편 수비하게 하소서. 이는 겉으로는 연연을 안치하는 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으로 고차를 대비하는 계책입니다. 1년이나 2년이 지나면 식량과 병력이 넉넉해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변방을 안정시키고 요새를 보전하는 장구한 계책입니다. 만약 바라문이 스스로 분발하여 남은 무리의 마음을 얻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그 나라를 다시 일으킨다면, 점차 북쪽으로 옮겨가 유사(流沙)를 건너가게 하소서. 그리되면 곧 우리의 외번(外蕃)이 되어 고차의 강한 적수가 될 것이니, 서북방의 우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간사하게 마음을 바꾸어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배반한다 해도, 이는 도망 다니는 도적에 불과할 뿐이니 우리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지금 서둘러 도모하지 않았다가 오랑캐의 마음에 딴 뜻이 생겨, 혹여라도 저들이 먼저 서해를 점거하여 우리의 험요한 요충지를 빼앗는다면, 주천과 장액은 자연히 고립되어 위태로워질 것이며, 장하(長河) 서쪽 지역은 끝내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시작을 도모하지 않고 나중에 결과만을 걱정하신다면, 배꼽을 깨물고 싶어도 닿지 않는 것처럼 후회를 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신의 우매한 소견이 만약 허락된다면, 비옵건대 대사(大使)를 양주, 돈황 및 서해로 보내어 산곡의 요해처를 직접 살피게 하시고, 보루와 초소의 배치가 적절한지 친히 검열하게 하소서. 또한 군사와 말의 수를 상의하고 식량과 병기를 점검하여, 부대 편성을 확정하고 안치할 곳을 적절히 정하게 하소서. 봄이 되면 서해 일대에 즉시 씨를 뿌리게 하여 가을에 한 해의 양식을 거둔다면, 다시는 수송하는 수고를 들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한 서해의 북쪽 변방은 곧 넓은 사막으로서 야생 짐승들이 수천수백 마리씩 떼 지어 모여드는 곳이니, 바로 연연이 활을 쏘아 사냥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밭을 일궈 스스로 공양하고 짐승을 잡아 스스로 자급하며 서로 돕게 한다면, 충분히 스스로를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리 준비하는 것이 조금은 손해처럼 보일지 모르나, 한 해의 마지막에 큰 계책을 따져본다면 그 이익은 실로 많을 것입니다. 고차의 시라소니나 이리와 같은 마음을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들이 신하를 칭하며 정성을 보일지라도, 겉으로는 넉넉히 받아들이되 안으로는 대비를 더욱 깊게 해야 하니, 이것이 이른바 '남보다 앞서서 남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듯한 좁은 소견으로 말씀을 올리니, 망령된 것이 많을까 두렵습니다."
효창 연간(525년 ~ 528년)에 원번은 안남장군(安南將軍) 및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서흘(徐紇)과 함께 문하성(門下省)에 머물며 둘 다 문장과 기록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원번은 이미 재능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데다 아부도 잘 하였기에, 영태후부터 신임을 받았다. 또, 당시 그는 태원 왕씨 집안의 왕준업, 낭야 왕씨 집안의 왕송과 더불어 황문랑을 지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을 묶어 "삼철(三哲)"이라 불렀다. 이때 만족(蠻賊)들이 곳곳에 가득하여 효명제가 친히 토벌하려 하자, 원번이 표문을 올려 간하여 중지시켰다.
효창 3년(527년) 정월, 사공 소보인이 관서(關西) 지역에서 막절념생(莫折念生)의 반란군에게 대패하자, 원번은 효명제에게 서쪽에서 죽은 장병들을 위해 곡을 하며 슬퍼하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에게는 모두 물자를 나누어 구휼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이후 탁지상서(度支尚書)에 임명되었다가 곧 도관(都官)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원번이 상표를 올려 말하였다.
"신은 예전에 외람되게도 문하성에 있으면서 장막 안에서 폐하를 가까이 모셨기에, 당시의 동료들은 모두 곁을 떠나 나갈 때 홀로 몇 단계씩 승진하는 혜택을 입었습니다. 유독 신만이 명령을 받들매, 단지 황문(黃門)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지금 상서(尚書)가 된 뒤에는 오히려 중서령보다 직위가 아래에 있습니다. 용렬하고 보잘것없는 신에게는 진실로 과분한 자리이니, 동료들과 비교해 본다면 혹 다하지 못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안남장군과 금자광록대부는 비록 등급의 차이가 있으나 실제로는 반 단계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상서 자리는 맑은 요직이며 지위와 대우가 현달하니, 봉록과 자격을 따져본다면 조금은 지나친 듯합니다. 명망과 관직을 견주어 말하자면 대부분 사람들은 바꾸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오나 신이 스스로를 헤아리고 돌아보건대 힘써 금자광록대부 자리를 구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天地)께서 이끌어 주심에 시작과 끝이 있게 하시고, 신의 지치고 병든 몸을 가련히 여기어 신의 청을 윤허해 주소서. 그러므로 원컨대 안남장군과 상서 자리를 금자광록대부 하나와 바꾸어 주십시오."
당시 천하에 일이 많았으므로, 원번이 겉으로는 한미한 관직을 청하면서도 속으로는 승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이에 효명제는 원번에게 무군장군(撫軍將軍)의 직위를 더해 주었다.효명제와 영태후가 일찍이 화림원(華林園)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 효명제가 잔을 들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원 상서는 짐의 두예(杜預)와 같소. 이 술잔을 원개(元凱)에게 권하고자 하니, 이제 경을 위해 다 비우겠소."
이에 좌중에 신하들 가운데 원번을 부러워하고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처럼 원번은 명성과 지위가 모두 중하였고, 당시의 현달한 이들 모두 그를 추앙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원번은 오직 자기 한 몸만을 잘 건사할 뿐, 후배들을 장려하고 발탁하기는 커녕, 오히려 후배들이 자신을 능가할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배척하고 억눌렀으므로 논자(論者)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건의 원년(528년) 4월 13일[1], 원번은 하음(河陰)의 변에서 이주영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53세. 생전에 그가 지은 글 100여 편이 세상에 전해졌다. 사후 사지절(使持節)·시중(侍中)·거기장군(車騎將軍)·의동삼사(儀同三司)·청주자사(青州刺史)로 추증되었다.
원번의 적자(嫡子)인 원보수(袁寶首)는 무정(武定) 연간에 사도 기실참군(司徒記室參軍)을 지냈고, 원보수의 형 원숙덕(叔德)은 무정 말엽에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을 지냈다.
원번의 동생으로는 원약(袁躍)과 원양(袁颺), 원승(袁升)이 있다. 원약은 별도의 전(傳)이 존재하고, 원양은 예주 치중(治中), 별가(別駕), 관군부(冠軍府)의 사마(司馬)를 역임하였다. 막내인 원승 역시 관직에 올라 태학박사(太學博士), 사도 기실참군, 상서의조낭중(尚書儀曹郎中), 정원랑(正員郎), 통직상시(通直常侍)를 역임하였는데, 형 원양이 사망하자 과부가 된 형수와 간통하였다. 다만 이 사실을 알게된 원번이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에 걸리니, 그제서야 원승은 간통을 멈추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비루하고 더럽게 여겼다고 한다. 원승은 형 원번과 함께 하음의 변에서 피살되었고, 사후 좌장군(左將軍) 및 제주자사(齊州刺史)로 추증되었다.
[1] 무신년 정사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4월 13일이고, 양력으로 5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