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4 08:53:47

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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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비정통 황제
汝南文宣王 | 여남문선왕
<colbgcolor=#DC143C>묘호 없음
시호 여남문선왕(汝南文宣王)
작호 여남왕(汝南王)
연호 경흥(更薨, 532년)
원(元)
열(悅)
선공(宣孔)
생몰 494년 ~ 533년 2월 7일
재위 530년 6월 ~ 532년 4월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북위 조정 복귀
3. 가족4. 참고 항목

[clearfix]

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족으로 제7대 고조 효문제의 6남이었고, 나부인(羅夫人) 소생이었다. 양무제 소연에 의해 괴뢰 황제로 책봉되었으나 무산되어 정식 황제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2. 생애

2.1. 초기

494년에 태어났고 503년 제8대 세종 선무제에 의해 여남왕(汝南王)에 책봉되었다.

원열은
남색(南色)을 밝혔다.
는 등의 기록으로 봤을 때 동성애자로 추정되며 그로 인해 왕비인 여씨(閭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툭하면 왕비를 폭행했으며 부인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하녀처럼 여기는 등 학대를 일삼았다. 결국 영태후 호씨는 여씨의 사례를 계기로 모든 친왕과 번왕에게 정비(正妃)가 100일 이상 병치레를 계속하면 조정에 상소를 보내는 걸 의무화했고, 정비를 학대하는 자가 있으면 강봉하도록 했다.

이 외에도 형 원유의 아들 원보월(元寶月)에게 죽은 부친처럼 복장을 갖출 것을 명령했다가 조카인 원보월이 거부하자 그를 호출해 막대기로 폭행하기까지 했으며[1], 당시 원보월은 부친의 장례까지 치러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때린 원보월을 아이마냥 어루어 만지는 등 납득이 힘든 행동을 취했다.

이렇듯 위법을 일삼다가 결국 518년 8월 18일 저지른 살인죄로 면책되어 자신의 사저로 귀향했다. 단 중서감같은 공직에만 직위해제되었고 여남왕의 작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2. 북위 조정 복귀

5년 후인 523년 제9대 숙종 효명제에 의해 복귀하여 상서의 업무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후 태보, 태위, 사주목사(司州牧使)도 겸직하게 되었다. 원열이 사주목으로 지낼 당시 구념(丘念)과 매우 가까이 지냈는데 원열이 사주의 관리를 선발할 때면 대부분 구념의 뜻대로 될 정도였다. 구념은 원열의 사저에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 정도였고, 이러한 월권 행위는 역도원(酈道元)에게 발각되어 구념은 투옥되고 말았다.

원열은 구념을 살려달라고 영태후 호씨에게 빌었고, 이를 호씨가 승낙했으나 역도원은 그 명령이 다다르기 전에 구념을 처형했다. 더불어 역도원은 원열을 탄핵시키고자 하는 뜻을 내비쳤다. 그를 제거하고자 계획한 원열은 527년에 일어난 소보인의 반란에 역도원을 파견시키고자 하는 바를 조정에 요청했고, 결국 본의 아니게 출격한 역도원은 소보인의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이듬해 이주영하음의 변(河陰之變)을 일으키자 자신도 휘말릴까 두려워한 원열은 남조의 소량으로 전향하여 양무제에게 의탁했다. 무제 소연은 그를 후하게 대했고 원열이 북위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내비치자 그를 북위의 황제로 책봉한 후 북위로 귀순하게 하여 양나라의 괴뢰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이주조낙양에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열이 제위를 포기하고 양나라로 다시 돌아가면서 무산되었다.

532년 양무제는 원열에게 호위 병사를 붙여줘 낙양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이주영의 후계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된 고환도 고조 효문제의 후사인 원열을 황제로 세울 생각이었으나 그의 품행이 바르지 않아 계획을 중단했다.

이후 원열은 북위에서 시중, 대사마 등 여러 벼슬을 지내며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가 자신보다 정통성이 부족한 효무제 원수의 시기를 받게 되었고, 그가 보낸 걸로 추정되는 자객에게 목이 베여 533년에 사망했다. 조정에선 그의 시호를 문선(文宣)이라고 했다.

3. 가족

  • 부황: 효문제(孝文帝)
  • 모후: 나부인(羅夫人)
  • 왕비: 여씨(閭氏)
  • 첩: 가씨(賈氏)
  • 아들: 원영(元颍, ? ~ ?)
  • 손자: 원작(元綽) - 동위의 낭사왕(琅邪王).

4. 참고 항목



[1] 약 100대를 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