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8-18 15:17:02

왕려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王勵
(512 ~ 537)

1. 개요

서위의 인물. 이름은 려(勵)[1], 자는 추흥(醜興), 시호는 충식(忠武)이다.

2. 생애

북위에서 왕맹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 사촌형[2] 우문태를 따라 관중에 들어왔고, 우문태가 진롱(秦隴)·관중을 평정하는 중에 그를 따랐다. 우문태는 왕려에게 "장수에 있어서는 앉은 자리에서 승패를 헤아리는 자가 으뜸이고, 갑주를 입고 창을 잡는 자는 그 다음이다."[3]라고 조언했는데, 왕려는 "무릇 그 둘을 겸하려고 합니다."[4]라고 답해 우문태가 크게 웃었다. 북위에서 왕려는 평동장군 산기상시에 임명됐고 양보현공(梁甫縣公)에 봉해졌다.

서위가 건국되고 대통(大統) 연간 초반에 천우위 비신직장 영좌우에 임명돼 문제의 침실에서 숙위를 맡았다. 왕려는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으며, 문제는 "왕려는 가히 두 마음이 없는 신하라고 할 수 있다."[5]라며 칭찬했다.

537년 10월 도독으로서 금군을 거느리고 우문태를 따라 사원 전투[6]에 종군했다. 왕려는 좌익에서 막하의 장수 수십명과 함께 단병기를 들고 적과 접전을 벌였다. 서위군 선두 병력이 큰 피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았는데, 왕려도 중상을 입었고 결국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우문태는 사촌동생 왕려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 사후 사지절 태위 영상서령 십주제군사 옹주자사 함양군공에 추증됐고 시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

왕려 사후 아들 왕필(王弼)이 습작했다. 왕필은 서위 안국공주와 결혼했고 관직은 무군장군 대도독 통직산기상시에 이르렀다.


[1] 북사에서는 매(勱)라고 한다.[2] 우문태의 모친 왕씨가 왕려의 부친 왕맹과 남매간이다. 왕려가 5년 연하.[3] 為將, 坐見成敗者上也, 被堅執銳者次也.[4] 意欲兼之.[5] 王勵可謂不二心之臣也.[6] 동위의 승상 고환이 서위를 공격해 서위의 승상 우문태가 응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