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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금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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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정치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2. 상세
고구려 5부 | ||
절노부 왕비족 | ||
연노부 197년 독립 | 계루부 왕족 | 순노부 대막리지 |
관노부 |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다섯 부족인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는 각각 비류나부(沸流那部)·연나부(椽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로도 불렸다. 연노부와 절노부의 또 다른 표기로 소노부(消奴部)와 제나부(提那部)도 있는데 소노부의 경우, 연노부의 별칭이 비류수(沸流水) 근처에 있다는 뜻인 비류나부인 걸로 볼 때 연노부의 오기인 걸로 추정된다.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일종의 부족 연맹체적인 성격이 강해 이 5부의 부족장 중에서 선출된 연맹장이 곧 국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집권화가 진전되자 왕위는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바뀌었다. 백제의 정사암회의나 신라의 화백회의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회의가 귀족들의 합의기구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연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부터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고 한다.[1] 연노부는 계루부의 부상 이전에는 가장 강대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종묘와 영성 사직을 따로 모셨다.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후를 배출하여 왕비족으로 여겨졌다. 절노부는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부의 대가(大加)들 중 연노부와 절노부의 대가 및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는 고추가(古雛加)라 불렸다.
고국천왕 대에 부족적 5부가 행정적 5부(동·서·남·북·중)로 개편되어 순노부는 동부(東部), 좌부(左部) 또는 청부(靑部)로, 연노부는 서부(西部), 우부(右部) 또는 백부(白部)로, 관노부는 남부(南部), 전부(前部) 또는 적부(赤部)로, 절노부는 북부(北部), 후부(後部) 또는 흑부(黑部)로, 계루부는 중부(中部), 내부(內部) 또는 황부(黃部)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와 지방 또한 5부로 나뉘게 되었다.
초기[2] | 중기[3] | 후기[4] | |||
1등 | 상가(相加) | 폐지 | |||
2등 | 대로(對盧) | 1등 | 대대로(大對盧) | 1등 |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
3등 | 패자(沛者) | ||||
4등 | 고추(대)가(古鄒(大)加) | 2등 | 태대형(太大兄) | 2등 | 태대형(太大兄)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
3등 | 대형(大兄) | 7등 | 대형(大兄) 힐지(纈支) | ||
4등 | 소형(小兄) | 10등 | 소형(小兄) 실지(失支) | ||
5등 | 주부(主簿) | 5등 | 의후사(意候奢) | 3등 | 울절(鬱折) |
6등 | 우태(優/于台) | 6등 | 오졸(烏拙) | ||
7등 | (승)사자((丞)使者) | 7등 | 태대사자(太大使者) | 4등 |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알사(謁奢) |
8등 | 대사자(大使者) | 6등 | 대사(大奢) | ||
9등 | 소사자(小使者) | 8등 | 발위사자(拔位使者) 유사(儒奢) | ||
10등 | 욕사(褥奢) | 9등 | 상위사자(上位使者) 계달사자(契達使者) 을사(乙奢) | ||
8등 | 조의(皂衣) | 11등 | 예속(翳屬) | 5등 |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 |
11등 | 제형(諸兄)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 | ||||
12등 | 과절(過節) | ||||
13등 | 불(과)절(不(過)節) | ||||
9등 | 선인(先人) | 12등 | 선인(仙人) | 14등 | 선인(先人) 실원(失元) 서인(庶人) |
지방 | 욕살(褥薩) |
그 나라의 관제(官制)에서 가장 높은 것은 대대로(大對盧)로서, 1품과 비슷한데, 나랏일 전반을 총괄한다.
3년에 한번씩 바꾸는데, 적격한 자라면 햇수(年限)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 더러는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병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이긴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다만 궐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制禦)하지 않는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5]
고구려의 중앙 관제에 대한 기록에는 관부 및 관직이 없다. 관직이 없는 건 관등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되며, 관부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서는 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누락된 것이 아니라면 행정적 5부가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3년에 한번씩 바꾸는데, 적격한 자라면 햇수(年限)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 더러는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병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이긴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다만 궐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制禦)하지 않는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5]
초기의 중앙 관제는 8~10등의 관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관등 조직은 형(兄)과 사자/사(使者/奢)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 형 계열은 연장자 혹은 가부장적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 족장 세력이 관리로 편제된 것이고, 사자 계열은 조세 및 공납을 거두어 들이는 뜻을 가진 것으로 행정적 사역인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된 것을 나타낸다. 수상급인 상가(相加)는 원래 좌보-우보 체제로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 대에 국상(國相)으로 합쳐진다.
초기의 지방 행정은 부(部)-성(城)-곡(谷)-촌(村)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의 책임자는 태수(太守)[6], 곡의 책임자는 재(宰)라 하였다.[7] 미천왕 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렀던 것과 고노자의 관직 승진 사례를 통해 이러한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고국원왕 시기부터 염모라는 사람이 북부여 수사(守事)라는 지방관에 임명되고 장수왕시기에 그 후손인 모두루까지 대대로 북부여 수사라는 관직을 이었다는 기록이 모두루 묘지명에 적혀있는 걸 보아 북부여나 거란, 말갈과 신라 같은 속국에는 수사라는 지방관을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중기의 중앙 관제는 소수림왕 대부터 율령제가 도입되어 부족연맹체제에서 고대 국가적 관료제로 변화되는 것이 확인된다. 13~14등의 관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고추가(古雛加)와 대사(大奢) 관등이 세분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측 기록인 당나라 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와 수나라의 역사를 다룬 《수서》에 나타난 고구려의 관등은 중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송 때 저술된 《책부원귀》 또한 이 시기의 것을 따른다. 각 5부에 속한 관리들도 중앙 관제와 유사한 관등으로 편제되었는데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대형(大兄)을 의미하는 형태이다. 즉 각 5부의 가신체제(家臣體制)가 중앙관제에 흡수되어 일원적으로 정리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관제 정비 이후에는 국상 대신 대대로가 수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초기에 비해 강력해진 왕권 아래에서도 귀족들의 합좌 정치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국가 기밀 사무에는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5등급 혹은 5품 이상 관리) 이상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왕의 직속인 중앙 관리들과 각 부의 관리들은 품계나 등급이 같아도 동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귀족 내에서도 신분의 구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기의 중앙 관제는 《신당서》를 따르며 이 14관등은 고구려 후기 중앙 관제의 완성된 모습일 것이다. 청나라 때 저술된 《통전》은 초기와 후기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후기에는 무관직의 별도 설치도 일부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5등급 혹은 5품) 이상이 임명된 대모달(大模達)과 대형(大兄)(7등급 혹은 7품) 이상이 임명된 말객(末客)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관등이 아닌 관직명으로, 단위부대장에 해당했던 걸로 보이는 당주(幢主)가 기록에 나타난다. 당주 중에서도 신라의 수도에 주둔했던 부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가 유명한데, 이후 신라에서도 단위부대명으로 당(幢)과 그 부대장에 해당하는 당주라는 관직명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고구려의 제도를 벤치마킹하여 그대로 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의 지방 행정은 6세기 때 개편되면서 나타나는데 부(部)/대성(大城)-제성(諸城)-소성(小城)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부(部)의 책임자는 5등 이상의 욕살(褥薩)[8]로 대성에 머물렀고, 제성의 책임자는 7등 이상의 처려근지(處閭近支)[9], 소성의 책임자는 가라달(可邏達)[10] 또는 누초(婁肖)[11]라 하였다. 가라달의 경우 장사에 대응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독립된 지방관이 아니라 욕살, 처려근지의 직할지를 관장하던 막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욕살 중 네임드로는 당태종에게 주필산 전투에서 패배했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 마지막 동부욕살 이타인이 있다. 다만 지방 5부의 경우 묘지명 및 각종 기록 등을 근거로 하여 후기에는 여러 개의 주(州) 제도로 확장 발전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지방 각 부를 대표하는 장관이었던 욕살/도독이 매우 가까운 요동성과 건안성 등 근거리의 큰 성들에 동시에 배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국토를 동등하게 나누기에는 고구려의 인구 및 주요 도시는 주로 서쪽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주요 전선도 후기로 가면 북쪽과 동쪽은 이미 정리되고 서쪽과 남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행정수요에 있어서도 편차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3. 유목민 통제
이외에도 정착민과는 다른 유목민을 통제하기 위한 영(營)이나 부락(部落) 등의 지방 행정 단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영(營)이나 부락(部落) 등의 지방 행정의 총괄은 도독급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통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열말갈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다조(李多祚)가 고구려에 의해 오몽주도독(烏蒙州都督)이란 작위를 받았는데 그의 가문은 대대로 말갈추장으로서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 황두는 황두실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12] 일단 도독은 고구려 관제상 욕살에 대응하긴 하는데 기록 부재로 이 이민족을 관리한 도독급을 고구려에서는 어떤 명칭으로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4. 여담
[1]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대왕 대부터 계루부 고씨로 왕족이 바뀌었다는 이설도 있다.[2]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통전》(通典)[3] 《주서》(周書), 《수서》(隋書), 《책부원귀》(冊府元龜)[4] 《신당서》(新唐書), 《한원》(翰苑), 《통전》(通典)[5] 출처[6] 즉 군(郡)에 대응되는 단위였다는 걸 알 수 있다.[7] 곡과 촌은 군에 해당하는 성보다 낮으니 현(縣)에 해당하는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8] 별칭은 도독(都督).[9] 별칭은 도사(道使), 자사(刺史).[10] 별칭은 장사(長使).[11] 별칭은 현령(縣令). 이상 4개의 각주에서 별칭이라 표기하였지만 고구려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당나라측에서 그냥 이해하기 쉽도록 대응시킨 것에 불과하단 설이 강하다. 하지만 고구려 지식층이 한학에 능했으며, 여타 관등, 관직명에서도 별칭이 같이 기록된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아 혼재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다. 주변국인 고대 일본에서도 율령제를 도입하여 행정을 개혁할 때 기존 일본의 관직에 당나라의 관직에 대응되는 카라나(唐名)라는 별칭을 붙여서 같이 사용한 경우가 있기 때문. 다만 고구려에서 이러한 관직명들의 별칭이 정확히 어떻게 쓰였는가에 대한 정설은 없다.[12] 즉 이다조의 가문은 불열말갈과 지리상 가까운 황두실위를 불열말갈과 함께 통괄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