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03:46:04

고노자

고노자
관등 소형(小兄)
대형(大兄)
직위 신성태수(新城太守)
봉토 곡림(鵠林)[1]
소속 부족 북부(北部=절노부絶奴部)
성씨 고(高)
이름 노자(奴子)
생몰년 미상

1. 개요2. 활약상3. 평가4. 여담5.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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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봉상왕 때 국상을 지냈다. 그 때 모용외가 국경을 어지럽히니 왕과 신하 무리가 말하길, “모용씨의 군대가 강성하여 우리의 땅을 여러 번 범하니, 어찌 해야 할까.”라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길, “북부대형 고노자(高奴子)가 현명하고 또 용맹하니, 대왕께서 만약 도적을 막고 백성을 평안히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 외에는 쓸 사람이 없나이다.” 왕이 그를 신성 태수로 삼자 모용외가 다시 오지 않았다.
삼국사기 제49권 창조리 열전

고구려명장.

선비족 모용부가 고구려를 침략해왔을 때 이를 격퇴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벼슬이 북부대형(大兄)을 거쳐 신성(新城) 태수(太守)에 이르렀으며, 국상 창조리의 추천을 받아 이후로도 모용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마다 막아냈다.

2. 활약상

293년,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략해왔는데, 그 군세가 매우 강하여 고구려 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서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소형의 벼슬을 지내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모용외의 군사는 고노자에게 패하여 물러났고, 왕은 고노자의 공로를 인정하여 벼슬을 북부대형으로 올려주었으며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후 296년, 모용외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이번에도 그 군세가 강해서 선왕인 서천왕의 무덤[2]이 도굴당하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고심하던 봉상왕에게 국상(國相) 창조리가 모용외의 침략을 막을만한 인물로 고노자를 추천하였다.[3]

봉상왕은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하였다. 고노자는 신성에서 백성들을 잘 보살펴 선정을 베푸는 한편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위세와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고노자가 신성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봉상왕이 쫓겨나고 미천왕이 즉위한 후에는 기록이 없다. 이후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후일 고구려의 도성을 털게 된다.

3. 평가

한마디로 평하자면 고구려의 대 모용부 결전병기. 모용외가 침략했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반드시 이를 막았다. 모용외의 입장에서는 늘 고구려를 좀 이길만 하면 어디선가 갑툭튀해서 다 이기던 싸움도 지게 만들었으니 참 얄미웠을 것이다.[4] 게다가 이 양반이 신성태수가 된 이후로 다시는 모용외가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고 하니 모용부에서 얼마나 그 악명이 자자했을지 짐작이 간다.

또한 고노자가 백성들을 상대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단순히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어진 성품과 현명함을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도 창조리는 고노자를 왕에게 추천하면서 '현명하면서도 용맹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4. 여담

'이제 영(令)하니, 고밀(高密)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봉후(封侯)될 것이다.

오두(烏頭)[5]가 하얘질 때까지, 압록(鴨綠)[6]이 마를 때까지 승습(承襲)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 고자 묘지명 중 발췌. 고밀이 받은 금문철권에 쓰인 글귀다.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수 고자의 20대조 ‘고밀’이 고노자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모용선비의 침략을 격퇴하는 공로를 세웠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5. 대중 매체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도 등장한다.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동생 능애를 맡은 전병옥씨가 담당했다.

김진명소설 고구려에서는 상부의 명을 받고 을불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숙신으로 오지만 을불이 상부를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음모에 의해 을불이 고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 그를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평민으로 변장해 그와 같이 지내다가 그에게 정체를 밝히고 같이 가자고 말한다. 고노자는 이후 을불을 따라 도성으로 가 정반대장군의 지위에 복직한다. 그러나 이는 고증오류에 가깝다. 고노자 만한 인물이 미천왕 때 중용되었다면 기록이 남을 텐데 전혀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봉상왕 파로 분류되어 그가 쫓겨났을 때에 함께 제거되었거나, 혹은 정변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 훗날 '곡향강상왕'이라고도 불린 안원왕이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곡림은 불교 용어로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가 있는 쿠시나가르의 숲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던 날 숲의 나무들이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여 그만 하얗게 말라버렸고, 그 모습이 마치 고니떼와 같았다는 데서 고니 곡 자를 써서 '곡림'이라고 부른 것이다.[2] 고구려 서천원에 있었다고 한다.[3] 국상 창조리는 훗날에 폭정을 일삼던 봉상왕을 몰아내고 미천왕을 옥좌에 앉힌다.[4] 봉상왕을 잡으려 했더니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 이를 막아버리고, 이제 좀 고구려를 바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신성태수가 되어서 이를 막는다.[5] 까마귀의 머리.[6] 압록강을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