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22:54:14

울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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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尉遲運
(539 ~ 579)

북주의 관원으로 울지강의 아들이었다.

2. 생애

울지운은 젊은 시절에 강단이 있고 노련했으며, 공을 세우는 것에 뜻을 두었다. 550년 아버지 울지강이 세운 공으로 인해 안희현후(安喜縣侯)에 봉해졌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557년, 서위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우문호공제 원곽에게 선위를 압박하여 우문각이 천왕의 자리에 올랐다. 울지운은 우문각이 즉위한 뒤 사지절(使持節),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우문각은 실권을 잡으며 전횡을 휘두르던 우문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이 탄로나서 폐위되었다. 우문호는 영도공(寧都公) 우문육을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울지운을 기주(岐州)로 보내 우문육을 맞이하도록 명했다. 우문육이 즉위한 뒤 울지운은 주성현공(周城縣公)에 봉해졌고 식읍 500호를 추가로 받았다.

무성(武成) 2년(560년), 우문호의 전횡을 근심하던 우문육이 죽고 동생인 우문옹이 즉위하니 이가 무제였다.

무제가 즉위한 뒤인 보정(保定) 원년(561년), 울지운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제수되었다.

보정 3년(563년), 양충에게 종군하여 북제를 공격하고 병주(幷州)를 함락했으며, 아들인 울지단(尉遲端)을 보성현후(保城縣侯)로 봉하고 식읍 1,000호를 내렸다.

보정 4년(564년), 농주(隴州) 자사로 전출되었다. 당시 농주는 견하(汧河)와 위수를 끼고 있어서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웠는데, 울지운은 농주로 부임하면서 인심을 살피는데 힘써서 칭찬을 받았다.

천화(天和) 5년(570년), 소우무백(小右武伯)으로 임명되었다.

천화 6년(571년), 좌무백중대부(左武伯中大夫)로 전임되었고 군사마(軍司馬)가 더해졌다. 울지운은 직무의 재능과 더불어 문무의 재능도 겸비하며 무제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북제의 장수 곡률광이 분북(汾北)을 침공하자, 울지운은 우문헌과 함께 곡률광의 침공을 막고 복룡성(伏龍城)을 함락했으며, 작위가 광업군공(廣業郡公)으로 올라가고 식읍 800호를 더 받았다.

건덕(建德) 원년(572년), 울지운은 우시백(右侍伯)으로 제수되고 우사위(右司衛)로 전임되었다. 당시 무제의 태자인 우문윤이 동궁에서 아첨꾼들을 가까이하면서 여러 잘못을 저질렀는데, 무제는 조정 대신들 중에서 충성스럽고 강직한 신하를 선발하여 우문윤을 보좌하며 바로잡게 하려고 했는데, 결국 울지운이 우궁정(右宮正)으로 임명되었다.

건덕 3년(574년), 무제가 운양궁(雲陽宮)으로 행차할 때 울지운에게 사무(司武)를 겸임하고 장손람과 함께 황태자를 보필하도록 명했다.

건덕 4년(575년), 동주포진동관등6방제군사(同州蒲津潼關等六防諸軍事), 동주 자사로 전출되었다. 이때 무제가 북제에 대한 친정을 행하고자 울지운을 불러 논의에 참석하게 했다.

건덕 5년(576년), 주국(柱國)으로 임명되고 노국공(盧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식읍 500호를 추가로 받았다.

선정(宣政) 원년(578년), 울지운은 사무사대부(司武上大夫)로 전임되어 숙위군(宿衛軍)을 거느렸다. 이때 무제가 운양궁에서 붕어하면서 이를 대외에 공포하지 않자, 울지운은 시위병들을 이끌고 수도로 복귀하였다. 이윽고 태자 우문윤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선제였다.

울지운은 선제가 즉위한 뒤 상주국(上柱國)으로 제수되었다. 울지운은 우궁정으로 있을 때 선제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는데, 선제는 울지운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울지운을 멀리하고 시기하였다. 또한 당시 울지운과 더불어 왕궤, 우문효백 등이 모두 무제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고 왕궤는 무제에게 여러 차례 선제의 잘못에 대해 보고하였는데, 선제는 울지운이 여기에 가담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점점 더 울지운을 원망했다. 그리고 왕궤가 주벌된 뒤 울지운은 자신도 화를 입을까 염려해서 우문효백에게 계책을 물었다. 다음은 울지운과 우문효백이 나눈 문답이다.
울지운: 우리는 틀림없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무슨 방법이 있겠소?
우문효백: 지금 집안에는 노모가 있고 지하에는 무제가 있으니, 신하 된 자이자 자식 된 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고 있소. 하물며 충성을 드러내고 남을 섬기면서 본디 대의명분을 좇고 간언을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장차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겠소? 족하(足下)가 만약 목숨을 보전하려고 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소.

울지운은 이윽고 진주(秦州) 총관, 진위등6주제군사(秦渭等六州諸軍事), 진주 자사로 전출되었으나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도 오히려 자신이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결국 대상(大象) 원년(579년), 울지운은 진주에서 근심 속에 죽었다. 울지운은 대후승(大後丞), 진위하선성도문등7주제군사(秦渭河鄯成洮文等七州諸軍事), 진주 자사로 추증되었고 중(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