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0:25:43

대방국


예맥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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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록3. 관련 연구4. 여담

1. 개요

帶方國

원삼국시대의 국가로 3세기 후반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국내 기록에서 등장한다.

대방국에 대해서는 대방군에 소속된 소국이었다는 견해[1]와 낙랑군 남부의 호족인 장씨(張氏)가 세웠다는 견해[2], 백제가 대방태수를 예우 차원에서 왕으로 불렀다는 견해[3]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 등이 있다.

2. 기록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髙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寳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髙句麗怨. 王慮其侵冦, 修阿旦城·虵校勘 001城備之.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년)
(300년) 3월에 우두주(牛頭州)[4]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양국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两國歸服.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3년(300년) 3월
(6월)... 癸酉 右衛士督 從3位 兼 下總守 坂上大忌村苅田麻呂 등이 表를 올려, “臣 등은 본래 後漢 靈帝의 曾孫인 阿智王의 후손입니다. 漢이 魏로 바뀌자 阿智王은 神牛의 가르침을 따라 帶方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홀연히 진귀한 보옥으로 장식한 상서로운 띠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궁성과 비슷하였습니다. 이에 국읍(國邑)을 세우고 백성들을 길렀습니다. 후에 아버지와 형[父兄]을 불러 놓고 ‘제가 들으니 동쪽 나라에 성스러운 임금이 있다고 합니다. 어찌 귀속하여 따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오래도록 이 곳에 머무르면 아주 없어지게 될까 두렵습니다’라 말하고, 곧 친동생인 𨑲興德 및 일곱 姓氏의 백성들을 데리고 귀화하여 來朝하였습니다.
이것은 譽田天皇(應神天皇, 270∼310)이 천하를 다스리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阿智王이 ‘臣은 옛날에 帶方에 살았는데 (그곳의) 백성들은 남녀 모두 재주와 솜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百濟와 高麗 사이에서 살면서 마음 속으로 아직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天皇의 은혜로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불러 주십시오’라고 아뢰어 청하자, 이에 勅을 내려 신하인 八腹氏를 우두머리로 삼아 보냈습니다. 그 백성들 남녀는 모두 마을을 들어 사신을 따라 와서 영원히 公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중략)
(六月) 癸酉 …… 右衛士督從三位兼下總守坂上大忌寸苅田麻呂等上表言 臣等本是後漢靈帝之曾孫阿智王之後也 漢祚遷魏 阿智王因神牛敎 出行帶方 忽得寶帶瑞 其像似宮城 爰建國邑 育其人庶 後召父兄告曰 吾聞 東國有聖主 何不歸從乎 若久居此處 恐取覆滅 卽携母弟𨑲興德 及七姓民 歸化來朝 是則譽田天皇治天下之御世也 於是阿智王奏請曰 臣舊居在於帶方 人民男女皆有才藝 近者寓於百濟高麗之間 心懷猶豫未知去就 伏願天恩遣使追召之 乃勅遣臣八腹氏 分頭發遣 其人民男女 擧落隨使盡來 永爲公民 積年累代. (중략)
속일본기(續日本紀) 권 38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4년(785년)

3. 관련 연구

김미경, 「高句麗의 樂浪ㆍ帶方地域 進出과 그 支配形態」, 『學林』 17, 1996, p12-15
권오중, 「중국사에서의 낙랑군」,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p28
김성한, 「漢 郡縣을 둘러싼 한국고대사의 몇 개 문제 -문헌자료를 중심으로」,『인문학연구』, 2014, p68-69
김성현, 『삼국사기』에나타난 대방국의 실체와 존재양상, 2022

4. 여담

파주 염씨가 대방국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1] 손진태, 1979, 『韓國民族史槪論』, 乙酉文化社[2] 천관우, 1972, 『朝鮮史硏究』, 乙酉文化社[3] 김성한, 「漢 郡縣을 둘러싼 한국고대사의 몇 개 문제 -문헌자료를 중심으로」,『인문학연구』.[4] 우수주(牛首州), 수약주(首若州)라고도 하며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된다. 그러나 신라가 우두주를 설치한 시기는 선덕여왕 6년(637년, 삼국사기 잡지4 지리2 삭주조 참조)이고,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몰아낸 이후 신라의 땅이 되었기 때문에 해당 기사는 논란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