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7 14:29:01

김보당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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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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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직도3. 전개 과정4. 평가5. 창작물6. 같이보기

1. 개요

고려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일으킨 반란. 계사년(1173)에 일어났으므로 계사난이라고도 하고 동경을 중심으로 난 일어났다고 하여 '동경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2. 조직도

김보당파
김보당이 지지한 군주
의종 장효대왕
병마사
동북면남로서해도
김보당 유인준 장순석 배윤재
지병마사
동북면
한언국
무신파
무신이 지지한 군주
명종 광효대왕
장군
이의민
산원
박존위

3. 전개 과정

김보당은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3년 후인 1173년 8월에 동북면병마사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다. 김보당은 무신정변의 주역인 정중부 등을 토벌하는 한편 명종을 폐하고 의종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해 병마녹사 이경직 및 장순석 등과 모의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 유인준, 배윤재가 동시에 군사를 일으키고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도 이에 합세하였으며 장순석은 거제에 유배되었던 의종을 받들어 동경으로 모셨다. 반란이 세가 커지자 집권자 정중부는 이의민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동경으로 향하게 하는 한편 서해도에도 군사를 보냈다. 9월에 먼저 지병마사 한언국이 체포되어 죽었고 김보당과 녹사 이경직은 붙잡혀 개경에 보내져 이의방 등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이의민 등은 동경에 가서 장순석 등 수백 명을 학살했다. 무신정변으로 쫓겨났던 의종은 김보당의 난 이전까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으나 1173년 난이 터지자 반란파에 의해 경주로 옮겨졌다. 결국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동경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의종은 이의방의 지시를 받은 이의민에게 향년 47세에 비참하게 시해당했다. 얼마나 끔찍하게 시해되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1] 박존위[2]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4. 평가

김보당은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처음에는 무신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반무신의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동북면 병마사의 직에 오른 것을 기회로 의종을 옹립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보당이 죽으면서 이 일에 문신이 모두 가담했다고 고변하여 많은 문신이 살해당했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많은 문신이 살해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문신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 살아남은 문신들 역시 김보당의 난의 계기로 살해된 것이다. 김보당의 난은 무신정권에도 영향을 줬다. 김보당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의종을 시해한 결과 집권자 이의방은 큰 반발에 직면했다. 그리고 1년 후 이의방은 조위총의 난이 일어난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암살당한다. 또한 경대승은 김보당의 난 당시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집권하였고, 그 이후 집권한 이의민 역시 의종을 시해한 사건으로 인해 정치권력을 크게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최충헌이 보다 쉽게 정변을 단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결과 무신정변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무신정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의종이 살해되고 그나마 남은 문신들도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의종이 1년만 더 살았으면 조위총의 난이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결국 김보당의 난의 결과 향후 100년간 무신정권이 지속되는 고착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보당을 고려사에선 열전으로 올리지 않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암군의 모습을 보인 의종을 복위시키려했다는 점에서 김보당도 처음에 무신정변을 지지했고, 하필 김보당이 입이 가벼워 문신들이 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불어버린 통에 조선왕조에서 그를 열전에 올리지 않았으나 동국통감에선 오히려 이의방 정중부의 난 이후 무정부상태에 빠지며 나라가 더 추락할 기미가 생기고 의종도 정신을 차렸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하고 김보당의 난이 아닌 의종복위사건 혹은 의종복위운동으로 재평가가 되고 있다. 종합해보자면 김보당 본인은 의종과 무인권력자들 모두 비판하고 생각의 취지는 좋았으나 명분만 좋았을뿐 실리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점에서 보면 김보당 개인은 매우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고 반란 역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여러모로 김보당은 고려 문관들의 장점과 단점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5. 창작물

5.1. 무인시대

향후 스토리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주요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반부 주인공 이의방이 타락하기 시작했고, 중/후반부 주인공 이의민의 개인 스토리가 여기서 시작하였기 때문.

의종 복위를 꿈꾸던 김보당과 추종 세력들은 몰래 의종과 접촉하였다. 당시 총애하던 후궁 무비에게까지 버림받고 일시적으로 멘탈붕괴했던 의종은 자신을 버린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자신이 귀양가 있는 섬의 지도를 그려 김보당 측에게 준다. 덕분에 김보당 측은 아주 손쉽게 거제현의 주둔 병력[3]을 물리치고 의종을 데려가는데 성공한다.

김보당이 북계의 안북도호부를 점령하고, 의종 측이 경주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과 중방에서는 북계에는 조원정을, 경주 주변에는 두경승이춘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한다. 조원정은 안북도호부를 공격하다가 김보당이 쏜 화살에 부상을 입는 등 첫 전투에서 굴욕을 겪긴 했으나, 다음 전투에서 김보당을 유인하여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한편 남로선유사로 파견된 두경승은 의종과 협력한 토호와 관리만 처형하고 진압군의 군율을 엄격히 하여 민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여 민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김보당을 체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제 최대 걸림돌인 선왕 의종을 어찌하느냐가 문제였다. 처음에 중방과 무신집권자들은 의종을 도로 귀양지에 집어넣는 선에서 끝내려고 했으며, 당시 군주 명종 역시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형을 죽일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의종과 명종의 모후 공예태후는 고심 끝에 의종이 죽어야 현 임금인 명종의 정통성이 바로 설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이의방과 이의방 가문에서 태자비를 들이는 조건으로 의종을 시해한다는 거래를 한다. 이의방은 고심 끝에 충복 이의민을 경주로 파견하는데,[4] 이때 이의민은 두두을을 만나 황룡의 대업에 대해 듣게 되고, 경주 근처에서 옛 의형제 부루와 재회하게 된다. 한편 정중부는 이의방을 궁지로 몰아넣고자 조정 신료들과 만나 의종의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여론을 모은다.

그리고 경주로 내려간 이의민은 반란군들을 한큐에 쓸어버리고[5] 의종과 만나게 되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고심한 끝에[6] 결국엔 이의방을 믿고 의종을 끔살시켜 버린다. 그러나 중방에서는 이의방을 탄핵하기로 뜻을 모았고, 정작 이의방을 지켜주기로 했던 태후는 이의방을 만나지 않는다. 결국 이의방은 김보당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을 구실삼아[7] 많은 대신들을 옥에 가둔 뒤 죽여버린다. 그리고 정중부와 부자결의를 맺고 이의방의 강력한 비호로 하마터면 처형당할 뻔했던 이의민 역시 목숨을 건지고 벼슬을 받음과 동시에 이의방은 태자의 장인이 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싶었으나, 의종이 죽은 걸 명분삼아 김보당의 난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 일어난다. 이의방이 권력을 지키는 과정에서 많은 대신을 죽였고 많은 학살을 저질렀기에 여러 곳에서 깊은 원한을 샀는데, 조위총의 난은 이의방의 명분이 흔들리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결국 그게 한 원인이 되어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죽고 만다.

6. 같이보기


[1] 이의민이 수박도를 잘 했다는 점 때문에 1980~1990년대 여러 택견 관련 서적에서 이 구절을 많이 인용하곤 했는데, 해당 서적들에서는 웃은 주체를 의종이라고 오역하여 '의종이 크게 웃고 절명했다'는 매우 기묘한 내용이 되었다.[2] 이 사람은 훗날 조위총의 난 때 반란군 세력권인 운중도에서 자기가 왕을 죽였다고 자랑질하다가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한다.[3] 지도의 덕도 컸지만 지휘관이 이광정인 것도 한몫했다. 실제로 전투가 발생하자 부하한테 가서 진압하라고 명령만 내려버리고 자신은 빤스런했다.[4] 처음에는 역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죽게 될까봐 거절하였으나, 태후가 딸을 태자비로 들여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의방은 외척이 되니까 누구도 대역부도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설득에 의해 결국 받아들인다.[5] 사실 한 번에 반란군을 격파한 건 기습과 내통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의종이 자신한테 위해를 가하면 100% 역적이 될 것이니 그 누구도 본인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만 믿고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대책도 세우지 않으면서 안일하기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6] 처음에 이의방이 이의민을 보고 의종을 죽이라고 내려보낸 건데 죽이기 전까지도 죽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었고, 의종도 어차피 본인에게 위해를 가하면 역적이 될 것이고 이의민을 보낸 이의방 역시 이의민을 토사구팽 시킬 게 뻔한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시 한 번 본인의 신하가 되어 본인과 손을 잡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한다.[7] 조정의 모든 문신들이 공모하였고 그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그들이 또다시 거병할 것이고 의종을 복위시킬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