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崔忠粹? ~ 1197년(신종 즉위년) 음력 10월[1]
고려의 무신으로 최충헌의 동생이다.
2. 생애
1152년 상장군 최원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격이 음험하고 사나웠다고 전한다. 당대 권력자였던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장군으로 영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영의 하인들이 자신이 키우던 비둘기를 강탈하자 이지영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비둘기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 말투가 매우 거칠었다고 전한다. 최충수의 말투에 분노한 이지영이 종들을 불러 최충수를 결박하라고 하자 최충수는 장군이 몸소 그런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장군 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을 묶지 못할 것이라고 오히려 세게 맞섰다.#그 기세를 장하게 여긴 이지영은 최충수를 그냥 돌려보냈다. 이지광과 함께 쌍칼 형제였던 이지영의 행실을 생각하면 정말 선심이 들어서 그랬을 확률은 낮고, 순간 기세에 압도당했거나 최충수를 언젠가 자기 편 사람으로 만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으나, 고려시대 정사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들에서 이지순을 제외하면 이의민 부자들이 반역자에 난신적자들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일부러 이지영을 사실과 다르게 호의적으로 묘사했을리는 없을 것이므로 고려사 등에 기록된 것들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최충수는 형인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 부자들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최충헌은 난색을 표명했으나 최충수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계속 강하게 주장하자 마음을 바꾸어 비로소 찬동했다고 고려사를 비롯한 고려시대 정사들에서 나온다.[2]최충헌은 때를 기다리다 최충수와 그의 일족들인 박진재,노석숭 등과 같이 군사를 일으켜 이의민 일가와 일당들을 모조리 도륙을 내었다. 참고로 이의민이 암살당할 당시, 최충헌과 그 일족 몇 명은 이의민이 있었던 미타산 별장으로 갔었고, 이의민이 별장에서 개경으로 돌아올려고 문을 나서 말을 타려 했을때 최충수가 먼저 나서서 이의민에게 직접 칼을 휘둘렀으나 맞지 않았고, 이에 최충헌이 곧장 앞으로 나가 이의민을 단칼에 목 베어 죽였다고 전한다.
이의민 일가와 일당들을 주살한 이후, 형과 함께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건의했으나 임금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형에게 그를 폐위시키자고 제안했다. 이 때 최충수는 사공 왕진을 임금 자리에 올리려 했다. 왕진의 여종을 총애하였기 때문. 반대로 최충헌은 명종의 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여 의견이 갈렸고 결국 박진재의 중재로 왕민을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 때 옹립된 임금이 신종이다.
이렇게 형과 함께 한순간에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으나 최충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종을 협박해 태자비를 강제로 내쫓아 버렸으며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고 획책까지 한다. 이에 크게 놀란 최충헌은 최충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자기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다 패망한 이의방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냐?"고 타일렀고, 최충수도 천정을 바라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형의 말을 따라 계획을 물렸다.
하지만 최충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음을 돌려 원래대로 자기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장남 충헌에게서 차남 충수가 태자비로 자신의 딸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모친 역시 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최충수를 만류하지만, 전혀 듣지 않았고 도리어 모친을 아녀자라고 부르면서 밀어서 넘어뜨리는 패륜까지 저지른다.
결국 이 일로 형제 사이가 완전히 갈라졌고, 이에 최충헌이 군대를 동원해서 흥국사에 오자 최충수 역시 사병들을 이끌고 공격하면서 골육상쟁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최충수는 참패하였고 권토중래를 위해 일단 도주했으나, 파평군(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의 금강사에 이르러 추격군한테 붙잡혀 참수되어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최충헌은 추격군들에게서 동생의 수급을 받아들자, 크게 통곡하며 "나는 사로 잡을려고 했는데 무엇이 급해 죽여버렸냐?"며 추격군들을 꾸짖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 주었다. 비록 생전에는 완전히 돌아서버린 형제라 해도 차마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라지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는데 아닌 척 쇼를 한 것일 개연성도 있다.
조선 초 1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인 이방번 등을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이방간 등이 죽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마찬가지로 최충수 사후에 나온 최충헌의 발언 역시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고려사 등의 고려시대 정사들에서 최충헌이 반역자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최충헌을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호의적으로 묘사했을리는 없으므로 최충헌이 동생인 최충수의 죽음을 진심으로 원치 않았으며, 진정으로 동생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존재한다. 게다가 당시에 최충헌 형제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으니 어머니를 의식해서라도 동생인 최충수를 죽이는 것만은 삼가했을 가능성도 있다.[3][4]
3. 대중매체
- 남춘자 작가가 그린 학습만화 <태조왕건과 고려왕조 500년>에서는 최충수가 죽은 뒤 최충헌이 홀로 진수성찬을 우걱우걱 먹으며 '옛날에는 동생이랑 같이 먹었는데...'하며 쓸쓸해하는 모습이 나온다.
- 박흥용 작가가 그린 <학습만화 한국사>에서는 이지영에게서 무사히 풀려나고도 최충헌에게 "비둘기를 빼앗기고 며칠 동안 갇혀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이지영의 애기(愛妓) 자운선을 탐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소인배스러운 면을 부각시켰다.
[1] 고려사절요 고려사절요 권13 명종2(明宗二) 명종(明宗) 27년 기사 참조.[2] 하지만 실제로 최충헌은 드라마 무인시대처럼 오래전부터 이의민 일가를 주살할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최충헌 등이 이의민을 제거한 후, 이의민의 아들들과 그 일당들과의 전투들에서 전승들을 거두며 이후 그들을 모두 제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3] '제 1차 왕자의 난'에 태종 이방원이 이복동생들을 살려줄려고 했는데 이방간 등이 이들을 죽였다고 조선왕조태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조선왕조태조실록이 이방원 측에 의해 쓰여진 것이므로, 이방원의 뜻대로 사건의 전말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했을 확률이 매우 높으나,[4] 고려사 등의 고려시대 정사들은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고려왕조의 적인 조선왕조에서 기록한 것이라 조선왕조에서 반역자로 기록한 최충헌을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호의적으로 기록했을리는 없으므로 둘의 경우를 무조건 동일시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