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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게오르크 루카치[1] Lukács György | Georg Lukács | |
본명 | 뢰빙게르 죄르지 베르나트 (Löwinger György Bernát)[2] |
출생 | 1885년 4월 1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1971년 6월 4일, (향년 86세) |
헝가리 인민 공화국 부다페스트 |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헝가리 [3] |
모교 | 프란츠 요제프 대학 베를린 대학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스 대학 |
직업 | 철학자, 정치인, 문예비평가, 미학자 |
학파 | 신칸트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 서구 마르크스주의[4][5], 부다페스트 학파[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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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elig sind die Zeiten, für die der Sternenhimmel die Landkarte der gangbaren und zu gehenden Wege ist und deren Wege das Licht der Sterne erhellt.“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정치인이자 비평가. 자본주의를 "물화(Verdinglichung; Reification)"[7] 개념으로 분석하여 비판 이론을 위시한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론과 문예비평, 미학 등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2. 생애
2.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까지
1885년 4월 1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은행가였던 뢰빙게르 요제프(Löwinger József, 1855–1928)와 유대인 은행가 집안 출신 베르트헤이메르 어델(Wertheimer Adél, 1860–1917) 부부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부친인 요제프가 독일어식 성씨인 뢰빙게르에서 헝가리어식인 루카치(Lukács, '루가')로 개성하며 헝가리 주류 사회에 편입되었다. 이후 1907년에는 루카치 일가는 루터회로 개종하였다.루카치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게오르크 짐멜, 막스 베버 등 저명한 사회학자가 되는 이들과 교류하고 자유주의적인 철학 성향을 내비쳤다. 이때까지만해도 루카치는 신칸트주의에 속하는 이였고, 더 나아가 반공주의에 가까운 성향까지 내비쳤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점차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1917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에게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다. 루카치는 레닌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로 인해 인간성을 잃어가던 당시 사회에 있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1918년 12월 중순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한 루카치는 베버, 짐멜과 결별한 후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2.2. 이후의 정치활동
1918년 일어난 헝가리 혁명의 과정에서 헝가리 공산당은 1919년 3월 2일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루카치는 이 때 젊은 나이에 교육문화인민위(문화부 장관) 직위에 오른다.[8] 하지만 동년 8월 루마니아의 개입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공화국 정부수반이던 쿤 벨러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당시 루카치는 쿤 벨러의 명령으로 헝가리에 남아 코르빈 오토와 함께 지하 지도부를 구축하여 당조직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연말 코르빈이 체포되자 빈으로 망명했다.1929년까지 코민테른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루카치는 1930년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소련으로 입국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며 초기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발견했다. 1931년에 잠시 베를린으로 떠난 뒤 1933년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간 루카치는 1945년까지 코민테른 요원이자 연구원으로 일했다.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주류와 멀었던 루카치는 숙청 대상 중 하나로 지목되어 타슈켄트로 귀양을 다녀왔다.
2.3. 헝가리 귀국과 학술활동
1945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해방하자 귀국하여 헝가리 공산당원이자 부다페스트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1948년 헝가리 공산당은 헝가리 노동당으로 재창당하고 1949년 헝가리 인민 공화국을 성립했다.2.4.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기간 집권당인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너지 임레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루카치는 너지와 그의 정권에 대해 애초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비판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너지가 재집권 이후의 계획, 즉 "강령"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민중운동에 휘둘리면서도 동시에 민중운동을 그나마 사회주의적 틀 안에서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각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는 것을 반대하여 먼저 사임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남는 것이 서구와 소련 모두의 개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루카치는 부다페스트가 함락되자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끌려나와 소련군에 의해 너지와 함께 잠깐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그는 다음해 헝가리로 송환되어 연금되었다. 다른 내각 성원들이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루카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건으로 먼저 사임했기에 너지 정권의 완전한 동조자가 아니라고 취급되었다.
2.5. 연금생활
2.6. 복권과 말년
그는 비공식적으로 출당되었으나[9], 1967년 복권되었다. 그는 복권 다음 해 벌어진 프라하의 봄을 지지했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철학자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간접적 방식으로 의견을 피력했다.[10][11]1971년 6월 86세로 세상을 떴다.
3. 사상
루카치는 코민테른과 헝가리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공산권의 주요 철학자이자 이론가로 활동했다. 주요 개념으로 총체성, 물화, 미메시스 등이 있고 주되게 변증법, 사회철학, 문학평론, 미학, 사회적 존재론 연구에 집중했다.그는 레닌주의를 옹호하면서도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노선도 동시에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레닌주의가 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려 한 동시에 레닌주의에 철학적인 기반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특유의 행동주의적 성향을 가진 다른 당원들에게 좋지 않게 보였고 결국 루카치는 1920년대 코민테른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전개하기에는 힘든 환경에 놓인다. 결국 루카치는 자신이 본래 관심이 있던 미학 이론에 더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과 그 파시즘을 철학적으로 지지하는 (루카치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합리주의"가 준동하자, 이들에 대한 격럴한 비판을 전방위적으로 쏟아내기도 했다.[12]
전후에도 상기한 비합리주의 비판을 이어나갔으며, 당대의 실증주의와 실존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론을 연구하기도 했다.
4. 이론
5. 저서
- <영혼과 형식>, 1910
- <소설의 이론>, 1916[13]
- <전술과 윤리>, 1919
- <레닌>, 1924
- <역사와 계급의식>, 1927
- <역사소설론>, 1937
- <괴테와 그의 시대>, 1947
- <청년 헤겔>, 1948
- <이성의 파괴>, 1954
- <미학> 등
6. 참고문헌
게오르크 루카치, 김경식, 오길영 편역, 삶으로서의 사유: 루카치의 자전적 기록들, 산지니, 20197. 관련문서
[1] 헝가리어 이름은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이후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라는 독일어 이름으로 활동한다.[2] 헝가리어 이름으로 성싸인 뢰빙게르가 앞에 오고 이름인 죄르지 베르나트가 뒤에 온다. 1890년에 그의 부친이 성씨 뢰빙게르(Löwinger)를 루카치(Lukács)로 바꾸는데, 이때 아들인 그의 성도 루카치로 바뀌게 된다.[3] 유학을 독일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했고, 헝가리 혁명 때 루마니아로 잠시 망명한 적도 있다.[4]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일반적으로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1927년 루카치의 논문집인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어, 1990년 루이 알튀세르의 사망으로 끝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추구와 별개로 초기의 신칸트주의 성향은 총체성 이론 등 루카치 철학 전반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5] 다만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영향과 별개로, 루카치 본인은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하기에는 매우 애매하며, 동구권의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랐다.[6] 루카치 본인이 수장격이다.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의 일종이다.[7] 物化. 사물화, 물상화라고도 번역한다. 루카치 본인이 만든 개념은 아니고,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을 루카치가 발전시켰다.[8] 이후 루카치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도 또 문화부 장관을 맡는다. 그런데 두번 다 좋지 못하게 끝났다.[9] 루카치에 따르면 그에 대해서 차마 출당하자고 외칠 수 있는 간부가 없어, 당원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꼼수로 출당되었다고 한다. 그 실례로, 루카치는 귀국 후 "앞으로도 자신을 당원으로 여기겠다"라고 편지를 썼는데, 한 통도 아니라고 답장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10] 루카치는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인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가 1918년 헝가리 공산혁명에 대항해 헝가리에 무력 개입했던 역사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고 술회했다. 민주화 된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헝가리의 인민공화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쁜 민주주의라는 견해였던 것이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지 않았는데, 루카치는 말년인 1971년 3월에서 5월 중 과거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 제자 외르시 이슈트반(Eörsi István, 1931–2005, 헝가리 혁명에 참여하여 1960년 석방)이 이 대목을 지적하며 결국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위한 핑계가 아니었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체코는 상황이 달랐다고 부정했다. (출처: 삶으로서의 사유 : 루카치의 자전적 기록들-루카치 다시 읽기 02, 249쪽)[11] 다만 이에 대해서는 루카치가 1971년 죽을 때까지 '문화판 러이크 라슬로'로서 숙청 당하는 것을 우려하여 "노회한"(외르시의 표현) 입장을 취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러이크 라슬로는 헝가리의 전 내부무·외무부 장관으로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음에도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핑계로 헝가리 인민공화국 지도자 라코시 마차시에게 숙청되었다. 이후 헝가리 혁명 기간 복권되었다.[12] 루카치는 이 "비합리주의"의 범위를 하도 넓게 잡았는데, "비합리주의"를 비판하는 루카치의 저작 중 하나인 『이성의 파괴』에 대하여 아도르노는 "혹시 "파괴"된 게 루카치 본인의 "이성"임?"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얼마나 넓게 잡았냐면은 까이는 양반들 중에서 네임드만 열거해도 대충 리하르트 바그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후기 프리드리히 셸링, 빌헬름 딜타이,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에르케고르, 앙리 베르그송, 오스발트 슈펭글러, 마르틴 하이데거, 에른스트 윙어, 에른스트 마흐, 율리우스 에볼라, 에드문트 후설, 막스 셸러, 카를 만하임, 루드비히 클라게스,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 카를 야스퍼스,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막스 베버, 알프레드 베버, 게오르그 짐멜, 장-폴 사르트르, 로베르트 미헬스, 칼 슈미트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으로 광역 딜을 쏟아부었다. 생철학과 신칸트주의, 현상학, 지식사회학, 실존주의, 신헤겔주의, 보수주의 철학과 베버나 짐멜 같이 신칸트주의스러운 사회학까지 묶어서 다 비판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루카치 본인도 젊을 적에는 베버나 짐멜을 비롯한 신칸트주의자들과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13] 루카치의 책 중 가장 잘 알려져있고 또 문학 이론의 고전이 된 책이지만, 정작 이때 루카치는 그의 철학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기 및 후기 루카치의 미학 이론과는 꽤 차이가 있는 편이다. <소설의 이론>은 신칸트주의와 헤겔주의에 가깝게 쓰였으며 이 책만으로 루카치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