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09:21

영화 평론가

1. 개요2. 진로자질3. 평론4. 비판과 논란5. 영화 평론가 일람
5.1. 국내5.2. 국외
6. 참고 링크

1. 개요

영화평론하는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나름대로 참고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직함이 '평론가'인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편에 속한다.

2. 진로자질

영화 평론가가 되는 방법은 문학 평론가와는 달리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일례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정관을 보면, 정회원 가입 요건이 (1) 협회에서 공인된 언론매체에 영화평론가로 데뷔한 후 2년 이상 활동했거나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2년 이상 재직한 자, (2) 협회 정회원 3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총회에서 가입이 승인된 자, (3) 협회가 제정한 '영평 신인평론상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자 정도로 규정되어 있다. 한 마디로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 일정기간 이상 '영화 전문 기자'나 '영화평론가' 타이틀로 활동했거나, 각종 평론 공모전에서 당선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 평론가로 불릴 수 있다는 뜻이다.

문학 평론가는 대체로 인문대학의 각 어문학과에서 훈련받은 전공자들이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전의 문학 평론 부문 당선을 통해 문학 평론가로서 정식 데뷔하는 절차를 거치지만, 영화 평론가는 보통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 일간지 문화부 기자, 또는 영화 잡지의 기자가 되거나, 아니면 영화 평론을 개인적으로 하던 사람들이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 지면에 데뷔하여 영화평론가로 '이름 붙여지는' 식으로 활동하게 된다. 미국의 전설적인 평론가 로저 이버트나 국내의 이동진, 정성일, 김혜리 등의 경우에도 모두 영화 전문 기자로서 본격적인 영화 평론가 생활을 시작한 경우이다. 참고로 영화 취재를 본업으로 하는 '영화 기자'와 영화에 대한 평론을 본업으로 하는 '영화 평론가'의 영역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영화 기자와 영화 평론가의 구분이 상당히 애매하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영화 전문 매체가 주목받던 시절에 영화 기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경력을 쌓아서 영화 평론가가 되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

간혹 작가가 영화 평론을 겸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르 문학인 SF 소설 작가인 듀나가 그 예다. 그 외 영화학 전공인 사람도 있고, 학사도 있고, 석사에 박사 학위까지 따고, 외국 유학까지 갔다와서 평론가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으로 박찬욱처럼 영화감독과 평론가를 공식적으로 겸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상당수는 그만큼 많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잠재적인 영화 평론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반대로 프랑스의 카예 뒤 시네마 출신 영화 감독들처럼 평론가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의 경우는 정성일 평론가도 감독 데뷔를 했다.

영화 잡지사에 독자 비평이라고 해서, 정기적으로 영화 비평을 투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실 비평을 하면서, 비로소 평론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 정말 잘 정리되어 있는 비평은 뽑혀서 잡지사 독자 비평란에 실리기도 한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화제가 되어서 고정 지면을 얻어 평론가로 이름을 알리는 경우도 있고, 일부는 블로그도 운영하면서 비평을 아예 블로그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평론가라 함은,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사용하여, 해당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에 그 의의를 두는 경우가 많다. 영화 평론으로 논문을 쓰는 경우도 많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일례로 영화학 전공자들이 모여서 영화 토론을 하는 소모임 같은 곳에 들어가면 보통 열띤 토론을 하게 되는데, 원숏, 투숏, 오버더숄더, 하이앵글, 로앵글 같은 촬영 용어부터 갖가지 연출 용어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가령, 영화 《물랑 루즈》가 1899년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면, 그 해 19세기 말 파리가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대학교 영화학과 과목 중 영화학개론을 수강할 경우엔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 배우가 움직이는 손짓, 발짓, 몸짓이 의미하는 것을 추론해야 한다. 아예 영화의 한 시퀀스만 가지고, 이 장면을 평론해보라는 것이 리포트 주제일 때도 있다(...). 그리고 모든 영화학도가 멘붕하지

어떤 영화를 평하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그 영화를 수십 번이고 보는 경우도 있다. 시대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그 당시 정치적 성향부터 사회 분위기까지. 심지어, 촬영장의 분위기를 본다든가, 배우들의 표정과 떨림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원스》에는 열악한 제작비와 촬영 환경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이 분들이 뭐하시는 건가?'며 구경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평론가들은 그런 세세함을 집어내면서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이야깃거리를 풀어내는 것은 기본이고, 보다 훨씬 근원적인 영화적 결점들까지도 지적해 내야 한다. 정통 사극인데 장터 상인이 파는 물건 중에 뿔테안경이 놓여져 있다든가 하는 가벼운 옥에 티를 지적하는 것은 일반 네티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평론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심도있는 차원에서 영화적 텍스트를 해석하고 감독의 연출 의도와 다양한 의미들을 잡아내야 한다. 예를 들어 극중 인물들이 대화하는 신에서, 영화 촬영의 가장 기본적인 '180도 법칙'을[1] 어기는 신이 나올 경우에는, 최소한 영화 평론가라면 그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 영화 속 장면을 세밀하게 지적한 후, 그런 기법 속에 감독의 어떤 의도가 숨어져 있고, 편집에서 어떻게 변주되어 나타났고, 영화적으로 어떤 리듬을 발생시키고, 현재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지 등을 해설할 수 있어야 한다.

3. 평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하는 건 별점 평가와 20자 평이다. 물론 별점 체계는 평론가마다 각각 달라서, 누구는 별 네 개가 사실상 만점인데 다른 평론가에겐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별 몇 개와 20자 평 정도로는 평론가 입장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기 힘들고, 평론을 보는 사람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20자 평 같은 경우, 가뜩이나 짧은데 평론가들이 함축적이거나 시적인 표현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정성일 평론가처럼 별점 평가를 혐오하는 평론가가 있는가 하면, 박평식 평론가는 별점과 20자 평을 주로 이용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어찌 되었든 직업상 작품에 대해 호평도, 혹평도 하며 살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영화감독들과의 사이는 대체로 좋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대중들에게는 잘난척한다는 취급을 받는 경향이 있다. 특히 디 워 사태 때 진중권 교수가 100분 토론에 나와서 시종일관 혹평을 하던 것이 화제가 되면서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다. 물론 영화 평론가들이 소위 '예술 영화'를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2], 기본적으로 대중 예술인 영화의 특성 때문에 순문학 평론가들처럼 학계에서 정한 예술성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작품을 평하려고 하기보다는 상업성이나 오락성 같은 대중적인 요소도 반영해가면서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로저 이버트만 해도 호불호가 크게 갈렸던 영화 《2012》에 별 네 개 만점 기준 세 개 반을 주었고, 이동진이나 듀나 같은 국내 평론가들도 "그래서 이 영화는 재미있는가 없는가?"를 철저하게 따진 평가를 올렸다.

사실 제대로 된 평론가라면 균형 감각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이 갈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소수의 평론가들이 내린 평점을 중심으로 운영되거나, 이에 영향을 받는 누리꾼이 많은 국내 포털 사이트, 영화 사이트 등에서 이러한 곡해가 많이 발생한다. 해외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국내에서는 동 시기 개봉한 국내 작품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발생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해외 작품은 국내 평론가들의 평만 볼 것이 아니라 해외 평론 사이트들을 참고하거나, 로저 이버트처럼 작품 특성에 맞춤식 평가를 하는 평론 영상 및 문헌 등을 참고하는 것이 낫다. 국내 영화에 대한 평론 역시 특정 사이트 평만 참고하기보다는 다양한 사이트 및 작품 자체에 대한 정보를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건 어느 분야에서든 유효한 이야기이다.

네이버 영화에서는 마르지 않는 떡밥으로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된다. 보통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으면 '감독이 열심히 만든 건데 니가 뭔데 평가를 함?', '10점은 절대 안 주네', '어휴 그럼 뭐가 재밌다는 건지?' 같은 비난이 쏟아지고 이에 반박을 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릴 때가 잦다. 당연하지만 평론가 또한 한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평가할 권리가 있고, 10점을 준다는 행위는 모든 영화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영화 중 하나라는 평이 되기 때문에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3] 그리고 영화 평론가들이 높게 평가한 영화들은 사실 널리고 널렸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이 시네필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 가끔은 이런 현상이 심해져서, 단지 평론가들이 높게 평가했다는 이유로 영화에 별점 테러를 하거나, 반대로 '전문가 별점이 낮군요. 꼭 보러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상황까지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영화 평론가와 일반 관객 사이에는 대개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쉽고, 그 영향으로 인해서 영화 평론가가 높게 평가한 작품은 일반 관객에게서는 낮은 평가를 받고 또 반대로 영화 평론가가 낮게 평가한 작품은 일반 관객에게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케이스도 적지 않은 편이 되고 있다.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려운 수준의 흑역사망작이 되어야 비로소 평론가와 일반 관객이 합심해서 해당 작품을 까게 되는 케이스가 많고, 그 정도로 엉망인 작품이 아니라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해도 대개 영화 평론가와 일반 관객 사이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때문에 영화 평론가와 일반 관객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극히 어렵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영화 평론가를 위한 영화'와 '일반 관객을 위한 영화'를 서로 분리해서 별도로 제작하는 쪽이 오히려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일 것이라고 보는 극단적인 시각까지도 점차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무언가 주객전도논리적 오류가 일어난 듯한 상황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는 않긴 하지만 영화 평론가와 일반 관객 사이의 사회적인 갈등과 대립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상기한 시각도 설득력을 얻어가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한국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정치극단주의에 경도되어 정치병에 빠진 영화 평론가들도 적지 않은 지라 그들을 좋지 않게 보는 일반 관객 사이에서 이러한 시각이 갈수록 강화되는 중. 당연하지만 정치병은 일반 관객들 중에도 있어서 딱히 극단적이지 않은 평론가마저도 정치적인 쟁점으로 공격받기 쉬우므로 꼭 정치병이 있는 평론가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4. 비판과 논란

자세한 것은 평론가 참조.

5. 영화 평론가 일람

가나다 순.

5.1. 국내

5.2. 국외

6. 참고 링크



[1] 대화를 나누는 등장 인물들의 얼굴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이 있고, 촬영 시에 카메라는 이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법칙. 만약 촬영된 쇼트가 이 가상의 선을 넘을 경우에는 등장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며 바라보는 방향의 일관성과 등장 인물의 시선이 계속해서 어긋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왼쪽에 있는 어떤 인물과 대화를 나누며 말하던 인물은 일관성 있게 왼쪽을 바라 봐야 하고, 반대로 자신의 오른쪽의 그 사람을 보면서 답변하는 사람은 계속 오른쪽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두 사람의 대화와 영상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따라갈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아주 기초적인 문법이긴 하지만, 때론 영화의 장면 속에서 새로운 리듬이나 특정한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 감독이나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이 법칙을 깨트리는 경우도 있다.[2] 당연히 경향에는 논리적 이유가 있다. 상업영화들의 경우 몇몇 정말 뛰어난 상업영화가 아닌 다수의 상업영화는 예술영화에서 사용된 기법들을 따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따라하기도 제대로 못하면 별점이 낮게 되는거고, 잘하면 꽤나 후한 점수를 받는다.[3] 그러나 일반 네티즌의 평가에서 1점, 10점이 많이 나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이 공신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티즌 의견은 가장 대중적인 사이트인 네이버의 경우 웬만한 영화는 리뷰가 수천 단위이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수만 단위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 빠르게 묻히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별점 테러'를 시도하는 것.[4] 2022년 현재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하다.[5]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초대회장[6]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긴 했으나 영화계에서 저지른 각종 만행 때문에 정상적인 평론가로 인정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