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화훈장 | |
<colcolor=#fff><colbgcolor=#333> 대한민국 영화평론가협회 초대회장 이영일 李英一 | Lee Yeong IL | |
출생 | 1932년 12월 27일 |
평안북도 구성시 | |
사망 | 2001년 1월 18일 |
서울특별시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청주 이씨 |
신체 | 178cm |
종교 | 기독교 |
가족 | 형 이영원[1] 누나 이영숙, 동생 이영규[2], 막내동생 이영실[3] 장녀 이보연[4], 차남 이은세[5], 손자 이시현, 손녀 이해원, 이나영 |
직업 | 영화감독, 영화평론가[6] |
데뷔 | 1956년 비평 <역사적 경향과 문학> |
학력 |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
경력 | 평화신문사 문화부장(∼1960) 전문지 영화예술사 주간(∼1996) 한양대, 동국대, 중앙대, 同신방대학원, 청주대, 서울예전, 선문대 연극영화과 강사(∼199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초대회장(∼1977)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위원장 겸 부이사장(∼1969)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예술사, 한국예술사전 편집위원 및 필저(筆著)(∼1985) 공연윤리위원회 윤리위원 및 심사위원(∼1991) 국제비평가연맹, FIPRESCI(뮌헨) 한국본부회장(∼1998) |
1. 개요
영화 평론에는 무엇보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어야지. 잘 쓴 비평은 언제나 재미있고 상쾌하거든.
이영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초대회장
이영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초대회장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가며 <영화예술>을 간행해왔고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영화사 연구에 물꼬를 텄다. 한국영화사는 이영일이라는 개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 충무로의 거목이 지난 1월18일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빚을 탕감해야될 의무는 고스란히 우리 세대에게로 넘어와 버렸다. 괴롭고도 영광스러운 채무다. 별 수 없다. 갚아야지, 갚아야지, 갚아야지.
문학프리즘 #
문학프리즘 #
이영일은 한국 영화사의 에베레스트이다.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높고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유혹의 손짓을 멈추지 않는 산이다. 그러나 이영일이라는 산은 자애롭다. 그는 강의록에서 수많은 쟁점들을 그 산을 오르기 위한 등반로처럼 펼쳐놓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다시 길을 잃을 때, 그가 이루어놓은 연구들은 다시 후배들에게 영감의 밧줄을 내려줄 것이다. 후학으로서 내가 할 일은 그 밧줄을 움켜쥐고 씩씩하게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리라.
조영정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7]
조영정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7]
‘이영일 팬클럽’을 자처하는 최예정(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은 “복혜숙 할머니의 말투를 따라하게 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중략) 안선주(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가 팀 내부에서 가장 많은 팬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도, 비명을 내지를 만한 일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정해진 시간 안에 해치우고 나타나서 쓰윽 지어보이는 미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팀원들 모두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강했던 김경민(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임종 직전의 이영일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며 자주 울먹이던 이유미(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이 작업에 매진하는 동안 <한국영화전사>의 초고 작업을 책임졌던 김정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와 이설화(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등 7명의 예비 연구자 혹은 예비 영화인들이 나눠가진 이 경험은 훗날 제 나름의 색깔로 싹을 틔우게 되리라고 믿는다.[8]
김소희 영화평론가, 씨네21 인터뷰에서
김소희 영화평론가, 씨네21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자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초대 회장이며 동시에 국제비평가연맹의 한국 본부의 회장이다. [9]
한양대학교,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선문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의 연극영화과 강사이기도 했으며 한예종의 영상원의 영화과 교수였었다.
또한 1984년 땡볕으로 제23회 대종상영화제 특별상 각색부문을 수상했고, 1995년 영화인협회 공로상·영화평론가협회 공로상, 1996년 서울시 문화상, 1998년에는 제19회 청룡영화상 정영일영화평론가상과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 받은 한국 영화계의 아버지이자 충무로의 거인이다.
2. 생애
1932년 12월 27일 북한의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교장의 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0]어릴적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아이였다.7세가 되던 해에 중화민국 텐진으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다녔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로 귀국하여 경복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졸업하던 해인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영일은 학도병으로서 공군에 참전하게 된다. 복무 시절 공군본부 정훈감실에서 발행한 잡지 『코메트』에 시「1950년」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전역을 하였음에도 경제적인 여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북에서 피난을 오고나서 어찌나 가난했는지 이영일은 구두 닦는 일부터 별의 별 일을 다하며 학업 비용을 마련했고 결국 스스로 모은 돈으로 1956년 영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며 자수성가에 성공한다.
이영일은 졸업 직후 동년 이철범(李哲範), 최일수(崔一秀), 허만하(許萬夏), 김윤환(金潤煥) 등과 동인지 『시와 비평』을 발행했으며, 여기에 평론 「역사적 경험과 문학」을 발표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이영일은 기자 생활로 생계를 꾸렸다. 생전 주간 희망』 에서 함께 근무했던 차태(車泰辰,1924-2003)이 기삿거리를 물어오면 본인이 대신 기사를 써줬다는 말을 종종 했다. <아낌없이 주련다>를 비롯해서 많은 영화를 제작한 극동흥업의 차태진과 함께 『주간 희망』 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洪燦,1909-1964)의 눈에 띄게 된다.
홍찬은 수도영화사가 사세를확장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이 소유한 신문인 평화신문의 문화부문을 책임일 사람으로 이영일을 선택하고 그를 스카우트 해 자기 옆에 두었다. 주간 희망』 을 나온 이영일은 1957년 수도영화사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현대 영화』 의 편집장직을 맡았다.『현대 영화』 의 발행인은 홍찬, 주간은 허백년(許柏年)이었다.
『현대 영화』의 편집장 겸 평화신문 문화부장의직책을 맡게 된 이영일은 정한모(漢模,1923-1991),김성욱(金聖加),김용권(金容權,1930-?), 이절범, 이어령(李御寧,1933-)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현대평론가협회에 가입하였다. 1958년에는 현대평론가협회 기관지인 『문학평론』의 편집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젊은 시인이자 평론가이던 그는 수도영화사와 평화신문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문학보다는 영화에 보다 큰 비중을 기울였다. 이후 그는 시인으로보다는 영화평론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시 창작과 비평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957년 공동시집 『현대의 온도』를 출간했고, 『조선일보』에 「영화와 문화」를 기고하며 영화평론가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평화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1958년에는 영화잡지 『영화예술』을 창간하고, 1990년대까지 발행과 편집을 맡았다. 『영화예술』은 1960년 4·19로 휴간되었다가 1965년 재창간, 1972년 유신(維新) 시기에 휴간, 1989년 복간 등 세 차례의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며 1997년 2월까지 발간되었다.
1965년 김정옥(金正鈺), 노만(魯晩), 김종원(金鍾元) 등과 함께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했으며, 1960년부터 40여 년간 한양대학교,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주대학교, 선문대학교, 영상원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영화개론』(1960), 『한국영화전사』(1969), 『평전 한국영화인열전』(1982), 『한국영화주조사』(1988), 『한국영화감독론』(1998) 등이 있으며, 『희극의 천재 채플린』(1962), 『세계명작시나리오선집』(1973) 등을 번역했다. 「피묻은 대결」(1960, 김묵), 「수라문의 혈투」(1967, 김시현), 「무녀도[11]」(1972, 최하원), 「환녀」(1974, 김호선), 「정형미인」(1975, 장일호) 등 20여 편의 창작 시나리오의 각색 작업에도 참여했다. 2001년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을 집필하던 중 숙환으로 별세했다.
3.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
4.19 혁명 직후에 젊은 이영일은 충무로에서 어깨에 카메라를 걸친 체 영화계의 사람들에게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박인환(朴寅煥,1926-956),이봉(李奉來,1922-1998), 허백년, 황영빈(黃榮彬), 오종식(吳宗植,1906-1976) 이런 분들이 영화평론가협회를 조직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로 중단되어 있으니 우리가 제2의 평론가 협회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나?" 라며 의견을 물어보았고 그 날,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여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창설했다.
1960년 7월 6일 명동의 대홍원(大鴻園)에서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발족했다. 회원은 서울에 있는 영화평론가 6명과 부산에 있는 기자 2명을 포함해 총 8명이었다. 창립 당시 회원은 이영일, 김종원, 김정옥, 노만, 황운헌, 최일수, 허창, 최성규였다. 이중 부산에서 거주 중인 허창은 창립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위임했다.
임원진은 대표간사, 사무간사, 기획간사 각 1명으로 구성하기로 정하고 무기명 투표를 실시했다. 대표간사로는 이영일, 사무간사로는 김종원, 기획간사로는 김정옥이 선정되었다. 사무간사 투표는 김종원이 선출되었다. 영화비평가협회에서는 향후 기관지 발행, 영화상 제정, 연구발표 및 합평회 개최 등을 계획했다.
그리고 훗날 영화비평가협회는 먼저 만들어진 유명무실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의 자리를 대체하여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된다.
4. 영화계의 암흑기
[12]
집안 식구 대부분이 한국의 예체능계에서 종사하던 집안이였는데 첫째형인 이영원은 무용 전공이며, 둘째인 이영일 본인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을 맡았고 막내 동생인 이영실도 영화 감독이였다. 이 시기에 한국 영화계 여배우 트로이카 중 1명인 윤정희를 성장 시키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하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영화예술이 해체 당했었지만, 수년후 다시 설립을 하며 극복해냈다.[13] 또한 이영일이 동생과 함께 제작한 영화 반노는 당시의 시대에서 너무 개방적이고 외설적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며 약 1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상영이 허락되지 않다가 박정희 사후인 1980년대 초반에 허가된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내부에서도 박정희 사후에 새로운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성을 느낀 이영일은 초대 회장직을 내려놓으며 개인 집필과 후인 양성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5. 말년에 찾아온 전성기
협회장을 내려두고 개인 커리어에 집중하기 시작한 이영일의 영화 인생은 말년에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바로 대한민국 청룡영화상 수상과 대종상영화제 수상에 이어 대한민국 문화훈장까지 삼관왕을 따낸 것이다.
이어 한양대학교와 중앙대학교, 그리고 서울예대와 한예종의 연극영화, 영화과 교수로서 활동을 하며 한국 공연윤리위원회의 위원장과 국제영화비평가협회의 한국 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이영일이 모은 비평가협회의 회원들은 추가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게 된다.
영화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룰 것을 다 이룬 셈이지만 이영일은 조금도 게을러지거나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항상 자신의 집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14]
그러나 젊었을 때부터 북한, 중국, 한국등을 넘나들며 고생을 많이 했던 이영일의 나이는 이미 70세를 넘어 가고 있었고 자신의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을 직감한 그는 죽기 직전에 생전 작업했던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 영화예술을 복간하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두고 있었는데...
6. 한국 영화의 별이 지다
이영일의 건강은 1980년대 후반부터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얼굴 색깔은 검게 바뀌었고, 늘 가쁜 숨을 쉬었다. 특히 영화예술을 복간한 후에는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지 몸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대한극장 옆 건물 5층 518호에 있었던 이영일의 사무실은 50명도 채 들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시사실 위에 있던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서 이영일은 평론가 이명원과 함께 자주 바둑을 두었다.
신장과 연결된 주머니를 차고 있던 그는 바둑을 두다 말고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가서 신장투석을 했다. 결국 자금 부족과 건강 악화로 영화예술도 문을 닫았다.
2001년 1월 20일, 이영일 초대 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애도하는 영결식이 오전 9시 동대문 이화여자대학병원 영안실에서 있었다. 사회는 김수남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이사 겸 사무국장이, 고인의 약력 보고는 정용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이, 조사는 김종원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이 맡았다.
'영화예술' 이 나오던 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창립한 그는 닷고 전까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과 영상원 강사 등을 지내며 세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족적에 비해 장례식장은 조촐했다. 자그만한 접객실에 몇몇 동료와 후배 평론가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화려할 필요야 없지만 '한국영화계에 이렇게 사람이 없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다들 돈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라는 고인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러차례 상술했듯 그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은 '영화예술' 을 복간하는 것과 마구 쌓아둔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심지어 사망 당일까지 자제들이 보는 가운데 테이블에 몸을 겨우 의지해가며 "완성하지 못한 책이 있으니 펜을 달라"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전부 쏟아 부었다[15]
하지만 2001년 1월 송곳같이 추운 날씨가 한풀 꺾이던 날 아침, 그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아버지이자 충무로의 거인이였던 이영일은 그렇게 서울의 한 병원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사후 그의 자료들은 한예종에 기증 되었고, 한예종 측에서는 직접 이영일의 생전 자료를 모아 이영일 아카이브를 설립하였다.
7. 여담
성격이 굉장히 깐깐하고 불 같았다고 한다.3대 회장인 김종원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호현찬과 의견 충돌로 멱살잡이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분을 이기지 못한 이영일은 협회를 나간다고 했으나 김종원과 다른 사람들이 "대장이 나가는 법이 어딨습니까?" 라며 만류를 거듭해 겨우겨우 분을 누그러 뜨렸다고한다 (김종원 회고록)
손녀를 포함한 직계의 친척과 자제들은 대부분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동생인 이영실[16]이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장녀인 이보연은 경기도 안산시에 거주하고 있다.
8.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영일-「삶과 추억」영화평론가 고 이영일 씨 (중앙일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한국예술연구소 편, 도서출판 소도, 2002)
-「심산의 충무로 작가 열전 –이영일(1931~2001), 창작과 비평의 행복한 동행」, (『씨네21』290호, 2001.3.8)
-「초대석 -전 『영화예술』 발행인 이영일 씨」(『시사저널』540호, 2000.3.2)
-「창작과 비평을 모두 이루다」아트앤스터디
-「이영일과의 만남」영화평론가 김종원의 회고록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1] 무용을 꿈꾸던 청년이였지만 23살이 되던 1950년에 서울 해방을 하루 남겨두고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2] 2019년에 사망했다.[3] 해병대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국가 유공자이자 영화인이다. 영화 감독으로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큰 논란이 일어났던 반노와 대통령의 딸 등등, 수십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은퇴 후에는 미국에서 서울의 강남으로 귀국하여 홀로 거주하다가 노년에는 안산에서 장녀와 함께 생활을 하던 도중 2022년 10월에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였다.[4] 이영일이 늘 아픈 손가락으로 여겼던 딸로 한국 무용, 배우 연습을 하다 일본 유학을 떠났고 훗날 한국에 귀국해 결혼을 했다[5] 현재 미국에 거주중이며 스탠퍼드 대학교 및 연세대학교에서 강연 교수로 활동했었다[6]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고향이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한국으로 귀화를 했다. 귀국 후 중학생의 나이로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후 영화인들을 모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으로서 부임한다.[7] 이영일이 창설한 국제영화비평가협회의 한국 지부 회원들은 훗날 부산국제영화제를 설립하며 영화계의 초석을 다졌다.[8] 이영일은 사망 당일까지 펜을 붙잡으며 한국영화전사 완필에 전념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고 사후 이영일의 제자였던 한예종의 교수와 학생들이 책을 완성 시킨 후에 이영일의 자료들을 모아 한예종 도서관에 이영일 아카이브를 설립하고 보관을 하고 있다.[9] 보통 영화평론가는 평론가를, 영화감독은 감독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고 2개의 분야를 모두 해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10] 무용인을 꿈 꾸던 첫째인 이영원은 23세가 되던 1950년 인천 상륙 작전 당시에 국군의 서울 입성 환영 포스터를 벽에 붙이던 도중 도원동 골목길을 빠져나오던 인민군과 조우하고 무차별 난사 당해 사망했다. 어머니가 이영원의 시신을 발견 한 것은 슬프게도 서울이 해방이 된 직후였다.[11] 한국 영화계의 1대 트로이카인 윤정희가 탄생한 그 영화다[12] 좌측 2번째가 형인 이영일 우측 2번째가 영화감독이자 동생인 이영실이다.[13] 해당 시기에 이영일과 함께 협회를 설립한 영화인들도 강압적으로 언론사에서 쫒겨났으며 이에 항의를 하며 뜻을 모아 창설한 언론사가 현재의 한겨레이다.[14] 생전에 "요약해서 말하면 쉬지않고 공부하고 피땀흘려 예술가의 정신에 철저하라.한국 영화인들은 공부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라는 말을 남겼다.[15] 새로 쓴 한국영화전사 라는 책이며 결국 이 책은 사후 한예종의 제자들이 완성시켰다.[16] 2022년 10월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