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02:48:42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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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제4대 국왕
루트비히 2세
Ludwig II
파일:Ludwig_II_of_Bavaria.jpg
<colbgcolor=#0098d4><colcolor=#fff> 이름 루트비히 오토 프리드리히 빌헬름
(Ludwig Otto Friedrich Wilhelm)
출생 1845년 8월 25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 님펜부르크 궁전
사망 1886년 6월 13일 (향년 40세)
바이에른 왕국 슈타른베르크
재위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1864년 3월 10일 ~ 1886년 6월 10일
신체 191cm[1]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마리 공주
형제 오토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루트비히 2세(바이에른) 서명.svg
파일:external/www.kunstkopie.ch/Portrait-of-Ludwig.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치세2.3. 강제 퇴위2.4. 의문의 사망
3. 건축왕4. 평가5. 여담6.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바이에른 왕국의 제4대 국왕. 별명은 바이에른의 광인왕이다.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이다.

2. 생애

2.1. 즉위

1864년 3월 10일,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하자 19세의 젊은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되었다. 장신의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답게 잘생긴 미남에 장신으로 국민들과 여성 귀족들 사이에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허나 루트비히 2세 본인은 여성 귀족들의 과도한 관심을 매우 부담스러워하였으며, 남자 연인이 더 많았다고 한다.

2.2. 치세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통일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2년 후인 1866년 결국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바이에른 왕국은 우호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했으나 전쟁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루트비히 2세의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에서 프로이센 다음으로 강성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 제국의 한 지방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바이에른 왕국은 다른 영방들에 비해 자치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편이었지만, 루트비히 2세로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만하다. 독일 황제 칭호를 프로이센 왕과 바이에른 왕이 돌아가면서 갖자고 제안했으나 당연히 씹혔다.(...)

정치보다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15세에 리하르트 바그너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의 열렬한 애호가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의 첫 명령은 '바그너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에 푹 빠진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 유명한 일명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는 등, 국가적 규모의 팬질을 단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컸던데다가 즉위 후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 속에서,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정치를 외면하고 더욱 예술과 건축에 빠져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 강제 퇴위

장신에 미남인데다가 농부들에게도 격의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신하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정치에 무관심한데다 특히 바그너에 대한 총애가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바그너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공화주의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바그너는 이미 1848년 혁명 당시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한 혐의로 독일에서 추방된 인물이었다. 바이에른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바그너를 반대했던 것은 비단 바그너의 사치[2]가 지나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가 왕정의 존립에 위협을 가하는 극렬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그너를 청년왕 루트비히 2세는 곁에 끼고 둘 정도로 총애했고, 바그너가 국왕의 생각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했다. 바그너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라 실제 사상적 식견과 전달력도 무척 뛰어났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바젤 대학교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그너의 철학적 식견은 동시대 최고 석학 수준이라 격찬했으며, 니체 스스로가 바그너의 가르침에 경도되어 아예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직업을 바꾸게 되었을 정도였다. 바그너는 언론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식견을 표출하기도 했고, 이에 바그너를 추방하라는 바이에른의 귀족들과 정치인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보오전쟁 패배 이후 루트비히 2세는 패전으로 인해 자책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바그너를 퇴출시키라는 귀족들의 성화에 굴복하여 바그너에게 바이에른 밖으로 나가라고 명했다. 나중에 바이에른의 변두리에 있는 바이로이트에 와서 훗날 자신을 위한 신전이 되는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했다. 이 오페라 하우스의 건설 역시 루트비히 2세의 재정 지원으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추방한 이후에도 그의 오페라에서 모티브를 따온 성 만들기에 빠져서, 바이에른의 재정은 거의 파탄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국왕의 과도한 바그너 사랑과 건축 오타쿠다운 계속되는 축성 계획을 참다못한 신하들이 제발 그만두라고 간언했으나, 루트비히 2세는 끝까지 듣지 않았고 아예 궁전을 떠나 숲 속에 있는 성에 은둔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성에 감금되어 강제 퇴위당했다.

바이에른의 왕실인 비텔스바흐 가문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다. 루트비히의 동생 오토는 정신분열증으로 아예 병원에 유폐되기도 했다. 일단 국가운영 예산이 아니라 루트비히 본인의 사유재산으로 지은 성들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왕실에서 빌리려고 했다. 왕이 자산을 궁전놀음에 탕진하다못해 빚쟁이가 되려고 하자 당연히 내각에서 불만이 커졌다. 특히 내각에 왕족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왕실의 돈을 과도하게 쓰는 루트비히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것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 집안내력인지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도 재위 초기에는 명군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샀으나, 말년에 무용가 롤라 몬테즈에게 빠져 큰 돈을 써대다가 신하들과 국민들의 반발로 퇴위했던 전력이 있다.

강제퇴위 사유는 미쳐서 정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말로 미쳤던 건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루트비히에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굿덴 박사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서 정신병이라 진단했고, 루트비히 본인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3]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루트비히 2세가 퇴위한 뒤에는 루트비히의 동생인 오토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토 역시 정신병 증세가 있어서 루트비히와 오토의 숙부인 루이트폴트 공이 섭정을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루이트폴트 공은 섭정의 자리에만 머물 뿐,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이후 1912년에 루이트폴트가 사망한 뒤엔 그의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섭정 자리를 계승했다가, 1913년에 오토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2.4. 의문의 사망

퇴위 후 3일 뒤인 40세에 주치의인 굿덴 박사와 함께 산책하다가 실종되었는데 성 근처에 있던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굿덴 박사의 시신과 함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사인은 익사였는데 시신이 발견된 슈타른베르거 호수는 무릎밖에 차지 않는 얕은 호수였고 평소 루트비히 2세는 수영을 무척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굿덴 박사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타살이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또한 루트비히는 말년에 자신에게 돈 좀 아끼라고 잔소리해대는 내각과 갈등이 심해서, 그 내각을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내각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내각은 그 소식을 듣고 반발, 루트비히 2세를 퇴위시키면서 선수를 쳤다. 내각이 준비한 루트비히 2세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보고서가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손에도 들어갔는데, 그는 이 보고서를 보고는 오히려 같잖은 소리라며 내각이 왕을 희생시킬 셈이냐고 평가했다. 게다가 그 보고서에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사유들이 쓰여 있었다. 가령 정무를 보지 않는다든가, 사생활에 돈을 많이 쓴다던가, 추운 날에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더운 날에 외투를 입었다던가, 식탁에서 예절태도가 별로였다든가, 하인들에게 불친절하게 굴었다던가 같은 이유였다. 물론 다소 지적될만한 점이 있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거나, 사람을 격리시키는 수준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위에서도 언급된 섭정을 맡은 숙부 루이트폴트 왕자[4]조차 "내 조카들이[5]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퇴위는 너무 심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3. 건축왕

루트비히 2세가 생전에 건설한 건축물은 총 3개다. 명성에 비해서는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하나가 엄청난 규모의 궁전들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심지어 그런 엄청난 건축물을 거의 동시에 3개나 건설해댔으니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을지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이 건설 자금을 국가 예산이 아닌 왕실의 사비로 충당했기 때문에[6] 바이에른의 왕실 재정은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다.
  • 린더호프 궁전(Schloss Linderhof)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트리아농 궁전을 본떠 만든 궁궐로 1870년에 건설을 시작해 1886년에 완공되었다.
  • 노이에스 헤렌킴제 궁전(Neues Schloss Herrenchiemsee) : 1874년 가을에 왕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이때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의 꿈을 발견했다"며[7] 돌아와서 짓기 시작(...)한 건축물로 1878년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1886년 재정난으로 인해 건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왕의 사망과 함께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헤렌킴제라는 이름은 킴제호수의 헤렌(남자)섬이란 의미로 본래 킴제호수에는 수도원이 세워져 남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남자 섬과 수녀원이 세워져 여자들만 출입할수 있는 여자 섬이 있었는데 여자는 출입금지인 남자 섬의 전통에 매료된 루트비히가 이 섬을 사들여서 헤렌킴제 궁전을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루트비히는 남자 섬에 여성이 오지 못하도록 더욱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누나가 오겠다는 것도 단호하게 거부했을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남자 섬의 오랜 여성 출입금지 전통은 아돌프 히틀러가 깨버렸고 이후엔 그냥 남녀 모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 : 루트비히 2세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성이자 현재에도 바이에른을 대표하는 관광지. 자세한 건 항목 참조. 하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경우 17년 동안 공사되었지만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정작 루트비히 2세가 이 성에서 머무른 기간은 3개월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루트비히 2세의 예술적 기질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선물한 집짓기 장난감으로 집을 만든 적이 있는데, 이때 어린 손자의 작품을 감상한 루트비히 1세가 '상당히 훌륭한 취향이 드러나 있다'고 호평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에는 건축가를 고용하되 자기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옮겨 놓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괴짜적인 센스는 몇 가지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승마장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말을 타고선 그 거리를 환산하여 오늘은 어느 지방까지 갔다 왔다는 둥 상상 유랑일기를 쓰기도 했고[8] 낮과 밤을 바꾼 침실이 있어서 밤에는 불을 밝게 켜놓고 낮에는 커튼을 꽁꽁 닫고 잠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2차 대전 중에 미군이 이탈리아에서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 오래된 수도원을 독일 측 공수부대가 점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폭격으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는데[9] 똑같은 꼴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지 독일군에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한 고성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정식 서한을 미군에 보낸 적도 있다.

4. 평가

당대에 루트비히 2세의 광적인 축성과 예술에 대한 소비는 예산을 낭비하는 것이란 비판을 줄곧 들었었다. 군주로서의 루트비히 2세는 정치적인 감각과 책임감이 심히 떨어지는 인물이었고 자신의 능력 바깥의 일을 적절한 정치인에게 맡기는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만약 바이에른이 현재 독립국이었으면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바이에른이의 독일의 일부 지역으로서 운영되고 있는 지금은 그런 점보다는 그가 남긴 결과물들이 좀 더 알려지고 있다.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성들의 문화적 가치와 명성으로 인해 그 자신도 재평가 될 정도다. 그가 거금을 부어가며 지은 성들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당시에 진 빚을 몇 번이나 갚고도 남을 수준의 높은 수익을 관광수입으로서 벌어들이고 있으며, 그가 바이에른에 남긴 성들은 지역의 주요 관광 수입원으로 바이에른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또한 민생과 정치적인 부분을 생각하자면 그가 군주로서 바그너에게 쏟은 헌신적인 지원은 당대에는 크게 비난을 받은 부분이지만, 그의 지원 덕분에 바그너가 후기 명작들을 대거 완성할 수 있어서 후대의 바그네리안들과 독일 예술계에서 루트비히 2세는 은인으로 여겨지고 있다.[10] 이러한 사례로 인해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 후원자들과 더불어 그는 부호나 귀족이 예술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정치 역사적인 면에서 그는 결코 좋은 인물로 소개되지는 않는다. 첫 번째로, 개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바란 적도 없고 갑작스럽게 주어진 너무나 많은 관심과 정치적 중압감에 받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치세에 독일 근방의 정세는 절대로 평화롭다고 할 수 없는 시기였으며 이미 거대한 전쟁들이 유럽을 몇 번이나 휩쓸며 민족적, 사상적 충돌과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취향과 예술만을 좇기에 그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고, 비록 자신의 능력 바깥의 일이 나라 바깥에서 계속 벌어지며 압박했다고 하나 정치인이자 국가의 군주로서 그는 국가를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압박은 그에게 심적 스트레스와 더불어 도피적인 생활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의 행적은 결국 그가 시대와 상황으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물론 능력이 있는 인물을 선별하여 국가 안정에 힘을 쏟는 일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에 어색함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 안정적인 정치적 후원자가 없었으며 그의 사촌들과 가문 식구들은 유럽 각계로 흩어졌기 때문에[11] 그가 마음을 맡기거나 도움을 받을 인물이 없었다. 제아무리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다국적인 정치적 상황에 홀로 놓였던 셈이다. 또한 그는 농민과 평민들에게 위계나 예의를 요구하지 않았고 격식을 따지며 대하지 않았다.[12] 궁정인과 정치인들을 피해 혼자 산책을 나갔을 때에는 마주친 평민이나 군인들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행보는 그가 개인으로서 악하거나 문제가 있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루트비히 2세는 족적으로 보나 남겨놓은 역사적인 의미로 보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정치인으로서는 무능했고, 군주로서는 불안했지만 그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파란만장한 인생의 왕이었다.

5. 여담

파일:external/media.epochtimes.de/Wichmann_LudwigII_pt_8.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udwig_II_king_of_Bavaria.jpg
20대 시절 30대 시절
  •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엄청난 장신미남이다. 중장년인 30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살이 쪘지만, 왼쪽처럼 10대 ~ 20대 시절은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꽃미남 왕자 클리셰의 효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다만 말년에는 지나친 식탐과[13] 운동부족으로[14] 인해 심한 비만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말년의 초상화와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에 비해 살이 심하게 쪘다는 걸 알 수 있다.
  • 바그너를 워낙 숭배했던 터라 바그너와 연인관계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그냥 후원자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를 슈타른베르크에서 마차로 10분 거리인 별장에서 살게 하고 하루에 두 세번 마차를 보내서 궁정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호엔슈방가우 성에 초대받을 때마다 바그너도 왕의 침실에 쪽지를 남기곤 했다. 내용인 즉슨 "저는 천사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쪽지를 남기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요즘은 루트비히의 성적지향 이전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이해자를 찾으려고 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20살도 안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친구도 없었다고 하니 우울증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리고 본인도 어떻게든 이해자를 찾기 위해 청소년기부터 좋아한 예술가인 바그너를 초청해서 후원해주고, 또래의 친구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국왕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흔하지도 않으니 실패한 모양이다.
  •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 오촌 당고모인 바이에른의 조피 샤를로테 여공작[15]약혼한 바 있지만 도무지 결혼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파혼했다. 이 약혼은 조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비교적 친한 사이였던 둘은 파혼 후 소원해졌으나 루트비히의 장례식 때 엘리자베트가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6. 매체에서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루키노 비스콘티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예술을 사랑했고 자유주의자였으며 양성애자였던 비스콘티가 느낀 개인적인 혼란을 루트비히에게 투사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영화 자체는 비스콘티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이 볼 거리.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처럼 일생을 다룬 뮤지컬이 제작된 바 있다.
  • 명작 어드벤처 게임 가브리엘 나이트 시리즈 2편에서 바그너와 함께 주요 떡밥으로 등장한다.
  • 2012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작으로 루트비히 2세의 전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루트비히 2세 Ludwig II.>
  • 문명 6 DLC인 리더 패스에 독일 문명의 추가 지도자로 등장했다.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코르사주에서는 바이에른의 사촌 정도로 등장한다.
  • 보드게임 중에도 그를 모티브로 한 게임이 있다. 2014년 발매된 ‘루트비히의 성’은 1~4인용 건축테마 게임으로, 건축가들이 루트비히 왕의 취향에 맞는 성을 건설하는 내용의 보드게임이다. 한글판 정식 발매시 제목이 ‘루트비히의 성’으로 나왔지만, 그 이전에는 ‘미친 왕 루트비히의 성’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원제목이 ‘Castles of Mad King Ludwig'...)
  • 플랜더스의 개의 작가 위다의 작품 ‘뉘른베르크 스토브’에서 결말부에 등장, 자신처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진 주인공 아우구스트 소년의 소원을 이뤄주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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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시대 초대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키는 180cm다. 독일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신이다.[2]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진 막대한 빚을 모두 갚아주고 화려한 저택까지 만들어 주어 거주하게 했다.[3] 강제로 퇴위당할 당시 되려 쓴웃음을 지으면서 느긋하게 "짐이 미쳤다고? 그래, 그 다음은 날 죽이겠군. 그리고 누굴 또 왕위에 올려두고 마음에 안 들면 미쳤다고 또 퇴위시킬 건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4] 루트비히 2세와 오토 치세에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5] 루트비히 2세와 동생인 오토.[6] 바이에른의 왕실 재정이 이런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 왕국을 회유하기 위해,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하다가 멸망한 하노버 왕국(참고로 과거 영국의 왕실이기도 했다)의 금고를 털어서 몽땅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국 예산을 끌어다 쓰지 않고, 사비만 썼는데도 저런 막대한 건축이 가능했던 것.[7] 루트비히는 루이 14세의 중증 빠돌이었다. 심지어 루이 14세의 유명한 초상화를 따라서 옷을 입고 그린 초상화도 전해질 정도다.[8] 궁 밖으로 멀리 나가질 못하게 하니까 일부러 미친 척 했다는 설도 있다.[9] 오히려 독일군은 좋은 엄폐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폭격에 참여한 몇몇 미군은 가톨릭인이라서 괴로워했고 이 수도원에 있던 많은 유물이 잿더미가 되어서 미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욕을 바가지로 쳐먹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굳이 가톨릭 신자의 시선에서 보지 않더라도 문화유산을 박살냈을 뿐 아니라 전혀 전략적 효과도 없었으니...[10] 바그너와 바그너의 작품이 독일, 나아가 예술계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11] 유력 귀족이자 왕족으로서 당연하게도 그들은 정략 결혼을 통한 동맹 관계를 맺은 후, 각각의 나라에 지도 계층으로서 상주해야 했다.[12] 그는 이따금 평민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들어 답인사를 했다. 그 때문에 평민들 사이에서는 그를 따뜻한 인물로 평가하는 인물들도 제법 있었다.[13] 특히 단 음식을 지나치게 좋아하다보니 치아질환이 심각해 항상 치통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치아가 빠지기까지 했다.[14] 낮에는 주로 잠을 자고 밤에는 산책했는데 걷거나 말을 타지 않고 마차를 타고 다녔다.[15]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의 고종사촌으로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막내딸이다.[16] 기욤 4세의 할머니인 나사우 공작부인 루이제, 올가와 콘스탄틴 남매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가 루트비히 2세의 할머니인 테레제 왕비와 형제자매간이다.[17] 기욤 4세의 외손자가 장 대공이고, 올가 왕비의 친손자가 필립 공이다.[18] 필립공의 외증조부인 루트비히 4세가 루트비히 2세의 사촌이기 때문에 7촌 손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