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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 몬테즈

<colbgcolor=#D57E83><colcolor=#000000> 란츠펠트 여백작
롤라 몬테즈
Lola Montez, Gräfin von Landsfeld
파일:Lola-Montez.png
이름 엘리자베스 로잔나 길버트
(Elizabeth Rossanna Gilbert)
출생 1821년 2월 17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아일랜드 코노트 슬라이고 주 그레인지
사망 1861년 1월 17일 (향년 39세)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배우자 토마스 제임스 (1837년 결혼 / 1842년 이혼)
조지 트래포드 힐드 (1849년 결혼 / 1850년 이혼)
패트릭 헐 (1853년 결혼 / 1853년 이혼)
아버지 에드워드 길버트
어머니 엘리자 올리버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왕의 정부2.3. 폭동과 추방2.4. 추방 이후2.5.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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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출신의 무용가.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정부로 그가 퇴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1821년 2월 17일 영국의 장교 에드워드 길버트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로잔나 길버트.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에서 자란 롤라는 어릴 적 콜레라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다. 롤라의 어머니는 사별 후 이듬해에 다른 군인과 재혼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롤라는 자랄수록 예의없고 방종한 태도로 부모님을 걱정시켰다. 결국 1837년에 16살의 나이에 토마스 제임스라는 군인과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했다.[1] 두 사람은 짧은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842년에 인도 캘커타에서 헤어졌다.

영국으로 돌아온 롤라는 스페인어와 춤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이국적인 외모를 이용해 스페인 출신의 무용수라는 컨셉으로 1843년에 런던 무대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롤라 몬테즈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춤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과거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 런던을 떠나야 했다. 이후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독특한 춤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한번은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러시아 제국니콜라이 1세 앞에서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롤라는 프란츠 리스트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유명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

2.2. 왕의 정부

파일:Lola Montez.jpg
1846년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 도착했다. 옥토버페스트에서 춤을 추던 롤라는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 만났을 때 루트비히 1세는 그녀에게 가슴이 진짜냐고 물었고, 롤라는 옷을 찢어서 가슴을 확인시켜줬다고 한다. 머지 않아 25살의 롤라 몬테즈는 예순이 된 루트비히 1세의 애인이 되었다. 롤라는 자신에게 푹 빠진 왕을 쥐고 흔들었다.

루트비히 1세가 인색하기로 유명했음에도 롤라는 그에게서 수많은 보석과 장식구를 얻어냈다. 롤라는 한번은 1만 3천 플로린 어치의 다이아몬드 장식구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루트비히 1세의 왕비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가 공연을 보고 있는 오페라 극장에 나타났다.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수수한 모습의 테레제 왕비는 극장 구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루트비히 1세는 롤라에게 바이에른 국적과 막대한 금액의 연금을 부여하고 뮌헨에 위치한 성을 선물로 주었다. 또한 루트비히 1세는 롤라에게 작위를 내려주려 했다. 과거에는 유럽의 군주가 애첩에게 작위를 내리는 일이 흔했지만, 19세기에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루트비히 1세는 내각의 승인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관료들의 반발과 사퇴에도 루트비히 1세는 작위 수여를 밀어붙혔고, 1847년 8월 25일에 롤라 몬테즈는 로젠탈 여남작과 란츠펠트 여백작 작위를 받아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상류층 사회는 롤라를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3. 폭동과 추방

바이에른 사람들은 롤라를 굉장히 싫어했다. 이전에도 루트비히 1세에게는 애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독일인이었고, 롤라만큼 사치스럽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은 성실한 테레제 왕비를 좋아했기에 더욱 롤라를 미워했다.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롤라의 성격이었다. 인내심이 없고 성질이 대단했던 롤라는 조금이라도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한번은 롤라가 키우는 개가 한 배달부의 발을 무는 사건이 있었다. 롤라는 적반하장으로 배달부에게 화를 내며 그를 구타했다. 성난 사람들이 몰려들자 롤라는 은제품 가게로 들어가 뒷문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대단히 오만했기에 국왕이 나타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그를 맞이하곤 했다. 사람들은 롤라의 흉을 보며 그녀가 나타나면 오물을 던졌다.

악명에도 불구하고 롤라에게는 파트너 남성들과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팬클럽이 있었다. 알레마니아(Alemannia)라고 불렸던 이들은 롤라의 경호원을 자처했다. 롤라는 가끔 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레마니아를 경멸했다. 알레마니아 멤버 대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가면 다른 학생들은 모두 강의실에서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연이은 수업 중단과 싸움으로 뮌헨의 대학교가 잠시 문을 닫는 사건도 발생했다.

1848년 2월 10일, 대학생들을 위시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폭동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루트비히 1세의 폐위와 롤라의 추방을 요구했다. 폭동이 거세지자 뮌헨 경찰은 롤라의 추방이 결정되었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폭도들은 환호하며 롤라의 집 앞에 몰려들었다. 롤라는 총을 들고 집 밖에 나와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죽일테면 죽여보라고 소리를 지르며 응수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롤라의 지인들은 그녀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마차에 롤라를 태워 뮌헨 밖으로 내보냈다.

며칠 후 롤라는 남장을 하고 몰래 뮌헨에 잠입했다. 롤라와 루트비히 1세는 폭동이 진정되면 외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롤라가 돌아왔었다는 걸 알아챈 뮌헨의 시민들은 격분했고, 폭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루트비히 1세는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롤라가 추방되고 루트비히 1세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롤라는 루트비히 1세의 정부로 있을 때부터 다른 남자를 종종 만났고, 뮌헨에서 쫓겨난 뒤에도 수많은 남자들과 노닥거렸다. 루트비히 1세는 롤라에 대한 문란한 소문이 들릴 때마다 중상모략이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롤라가 신나게 남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상심한 루트비히 1세는 한적한 곳으로 이주해 여생을 보냈다.

2.4. 추방 이후

뮌헨에서 쫓겨난 롤라는 스위스를 시작으로 유럽 곳곳을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조지 트래포드 힐드라는 젊은 장교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롤라는 추방된 후에도 루트비히 1세에게 하사받은 자신의 작위를 내보이며 으스댔는데 이는 진짜 귀족들의 조소를 샀다. 1851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야 롤라는 귀부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엄격한 유럽의 귀족들과는 달리 미국인들은 롤라를 진짜 독일 귀족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연을 재개한 롤라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옛날처럼 춤을 추기 힘들어지자 롤라는 바이에른에서 있었던 일들을 연극으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극중 롤라는 자신을 자유의 수호자이자 현명한 여성으로 미화했고, 테레제 왕비와 자신이 친구였다는 얼토당토 않는 설정을 덧붙이기도 했다.

1853년 패트릭 헐이라는 신문 기자와 재혼해 캘리포니아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1년도 안 가 헤어졌다. 이후 미국과 호주를 전전하며 공연 또는 강연을 하며 살았다. 유럽의 미인과 유럽인들에 대한 롤라의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2.5. 말년

파일:Lola_Montez_c1860.jpg
롤라 몬테즈, 1860년

1860년 6월 매독으로 인한 발작으로 전신이 마비되었다. 친구들의 간호와 노력으로 12월이 되었을 무렵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1861년 1월 17일, 폐렴으로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3. 여담

파일:Lola_Montez.jpg
롤라 몬테즈, 요제프 카를 슈틸러 作, 1847년
  • 루트비히 1세의 님펜부르크 궁전 미인 갤러리에 요제프 카를 슈틸러가 그린 롤라 몬테즈의 초상화가 있다.
  • 롤라와 루트비히 1세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서 롤라를 향한 루트비히 1세의 성도착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루트비히 1세는 롤라의 발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하며 종종 입 안에 롤라의 발을 넣고 빨았다. 한 편지에는 "네가 돌아오면 씻을 시간도 주지 않고 네 발을 입에 넣고 싶구나."라고 써있었다고 한다.우욱 그 외에도 롤라가 수개월 입은 속옷을 달라고 졸라서 자신이 입는 등, 두 사람은 직접적인 성관계보다는 변태적인 행위들을 주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보석에 대한 엄청난 집착은 롤라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뮌헨에서 추방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폭도들이 밀려오자 롤라는 지인들에 의해 억지로 마차에 태워져 허둥지둥 방랑길에 올라야 했다. 폭동이 가라앉은 뒤 루트비히 1세는 롤라가 남긴 보석과 드레스, 가구를 팔아 롤라의 빚을 갚아주었다. 정부 시절 루트비히 1세에게 수많은 보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치가 워낙 심해서 빚이 엄청났기 때문에 추방된 직후 롤라에게는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채찍을 사용했다. 한 기록에 의하면 뮌헨에서 폭동이 심화되었을 때 테아티너 교회로 피신하던 롤라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다고 한다. 이후 미국에서 활동했을 시기에 자신에게 악평을 한 신문 기자를 쫓아와 채찍으로 내리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 영국인이지만 스페인인스러운 외모인 것이 현대 인물 캐서린 제타 존스와도 비슷하다.

[1] 일설에 의하면 롤라의 어머니가 그녀를 60이 넘은 군인과 결혼시키려고 해서 도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