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18:04:06

비르투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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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이 칭호를 가진 음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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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virtuoso/virtuosa [1]
이탈리아어로 '덕이 있는'[2]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17세기부터 특별히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학자나,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음악가들에게 사용되었고 현재는 주로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거장 음악가들에게 사용된다. 해당 악기의 전공자들에게는 '이 양반들이 후대 생각은 안 하고 힘든 곡을 만들어놨다'는 원망 섞인 드립을 좀 듣긴 하지만(...). 미디어 믹스에서는 음악가가 아니어도 '거장' 칭호를 붙일 때 사용하곤 한다.

2. 이 칭호를 가진 음악가들

2.1. 바이올리니스트

  •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오티
  • 니콜로 파가니니
    굉장히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리스트등의 후대의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활대신 나뭇가지를 사용해 곡을 연주했다던가, 현 하나로 곡을 연주했다던가 하는 뛰어난 기교를 나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당대에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 때는 비르투오소라는 표현이 파가니니만을 가리키는 것인 적도 있었을 정도.
  • 루이스 슈포어
    니콜로 파가니니의 동시대에 독일에서 활동[3]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활동 당시 파가니니의 라이벌로 꼽혔다.[4] 파가니니와 달리 제자 양성 및 바이올린 기교의 개혁에 힘을 쏟았으며, 그 과정에서 현대적인 턱받침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음악적으로는 바이올린의 기교보다는 선율을 중시하였으며 본인의 작품에도 그러한 점이 반영되었다. 지휘자로도 활동하여 현대적인 지휘봉을 이용한 지휘법을 처음 시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독일 낭만파의 태동을 이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5][6]
  • 요제프 요아힘
    헝가리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동시대 활동한 사라사테의 라이벌로 꼽혔다. 12세의 나이에 베토벤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멘델스존의 지휘로 연주함으로서 그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였으며[7] 이후 독일에서 활동하며 브람스와 친한 친구로 지내며[8]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기도 하였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도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것. 슈포어가 현대적인 턱받침을 고안했다면, 요아힘은 그것을 사용하여 바이올린을 턱을 사용하여 강하게 고정시키는 연주법을 정착시켜서 현대 바이올린 주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4대 바이올린 협주곡'[9]을 언급한 사람이기도 하다.

2.2. 피아니스트

  •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 등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아믈랭은,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가 슈퍼 비르투오소(Super Virtuoso)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을 정도로 상당히 어렵고 난해하다고 알려진 곡들을 깔끔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2개 단조 연습곡'을 포함한 그의 곡들도 마찬가지라서, 심하게 까다로운 기교를 요구함과 동시에 근현대 특유의 음악적 난해함과 더해져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도 곡을 다수 작곡했다.


[1] 전자는 남성형, 후자는 여성형 단어.[2] 영어의 'Virtue'와 어원이 같다.[3] 독일식 이름인 Ludwig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4] 실제 두 명은 같이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5] 그러나 당대에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후계자, 혹은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도 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은 것에 비해 현대에 와서는 거의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바이올린 작품보다는 클라리넷, 하프 등 다른 악기를 위해 작곡한 작품이 그나마 연주되는 수준이다.[6] 생전 베토벤을 매우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와중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엄청 비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정확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이후의 후기 작품을 싫어하여 많은 비판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바그너의 작품은 높이 평가하여 손수 지휘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슈포어 등의 혹평 때문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래의 요아힘(그리고 멘델스존)에 의해 재발굴되기 전까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7] 현재까지도 널리 연주되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카덴차를 작곡하기도 하였다.[8] 브람스를 스승인 슈만에게 소개한 것이 바로 요아힘이었다.[9] 베토벤, 브람스, 브루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10] 이 둘은 그나마 개정 후라서 난이도가 하락한 것이지, '라 캄파넬라'의 원류가 되는 "'작은 종'에 의한 대환상곡(S. 420)", 개정 전 초절기교 연습곡(S. 137) 등 1830년대 작품들은 그야말로 피아노의 파가니니와도 같은 악보 상태를 보인다.[11] 13도라는 어마무시한 크기부터 CEGCE 화음을 23451로 짚어 연주했다는 설까지 있을 만큼 인간이 아닌 듯한 손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