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07:05:19

국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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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제1기 국수전 출범식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각천 최두선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다.

國手戰

1. 개요2. 역사
2.1. 폐지
3. 상금 규모4. 대회 방식5. 전패준6. 대회 연혁7. 역대 우승자

[clearfix]

1. 개요

국내 바둑 기전인 국수전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에서 시작한 최초의 정식 기전이다. 주최사는 동아일보로 1956년부터 2016년까지 개최했으며 후원사는 기아자동차였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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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국수전 도전국 복기 장면. 오른쪽은 그 유명한 조남철, 왼쪽은 그의 아성을 깬 김인. 김인은 조남철의 10년 권좌를 무너뜨렸다. 결승대회는 운당여관에서 진행되었다. 결정국은 당시 백번이었던 김인의 반면 2집[1], 총 6집반승을 거두었다.

1956년 당시 정식 명칭은 국수 제1위전. 제1기 대회에는 조남철 九단[2]이 전승으로 국수에 등극했고, 이후 10년 가까이 국수전 반상을 지배하게 된다. 당시 국수전은 엔터테인먼트가 절대 부족한 전후 한국에 가장 큰 재미였으며, 現 일민미술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사옥이었던 광화문 네거리 앞은 국수전 실황 중계로 인산인해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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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제13기 국수전의 야외 공개해설. 지금의 일민미술관인 동아일보 舊사옥 앞에서 진행되었다. 사진 중앙의 세모꼴 기와지붕은 고종 황제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왼쪽 검은 지붕 자리는 1966년에 완공된 광화문 지하보도 출구로, 지금의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 출구다.

당시 그의 권좌를 깨러 등장했던 김인은 1대 3이라는 끔찍한 전적에 실망하고 곧바로 도일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귀국 직후 가진 국수전에서는 곧바로 조 국수를 꺾어 김인 시대를 개막한다.

파일:external/www.baduk.or.kr/showImg.asp?sKind=talk&main_no=54&main_seq=&seq=5&size=600.bmp
1972년 제16기 국수전 도전 4국. 왼쪽이 김 국수, 오른쪽이 윤기현 기사. 장소는 최고위전과 마찬가지로 운당여관에서 열렸다.

이후 국수전 반상은 김 국수가 점령하게 된다. 약 7년여간 타이틀을 방어한 김 국수는 1972년 제 16기 국수전에서 새롭게 등장한 윤기현을 꺾지 못하고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반상의 군웅할거가 시작되었다.

파일:external/www.donga.com/200604010084-1.jpg
1973년 제18기 국수전 도전기 계가 직후. 오른쪽이 하찬석 도전자이고 왼쪽은 윤기현 국수. 하찬석 도전자의 승리로 윤기현 국수의 2년 치세는 막을 내렸다.

2000년 1월에는 바둑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루이나이웨이가 여류기사 최초로 국수전 타이틀을 획득했다. 예선에서 유창혁 九단,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창호 九단을 꺽고 올라갔으며, 도전기(결승전)에서는 국수 조훈현 九단을 연파하며 따낸 것이다. 정말 한국 바둑계에 쟁쟁한 거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따낸 어마어마한 승리였다. [4]

2.1. 폐지

한국 바둑의 전설이 한데 모인 역사적인 대회를 동아일보[5]는 계속 유지하려 하고 있으나 한국기원은 방관 상태. 프로바둑기사 김영삼, 조혜연, 송태곤 등 SNS하는 기사들이 공히 2016/2017 국수전 예선 모집이 취소[6]된 상태라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기아차가 후원을 끊은 것이 알려진 것이다.기사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공히 국수전은 후원사(기아차)의 후원 중단 통보로 기전이 중단되었다고 기사를 냈다. 기사 기사2 동아일보는 국수전을 해볼 생각은 있었던 것 같으나, 기아자동차가 후원을 철회했고 경기 침체로 후원사가 나오지 않아 제 60회 대회가 미뤄지고 있으며 다음 후원사를 찾지 못하면 JTBC 생기기도 전에 사라진 왕위전과 마찬가지로 채널A 중계조차 한 번도 못한 채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다.

동아일보에서 기전 중단을 계속 부인했으나 2017년 들어서도 기아자동차의 대체 후원사를 전혀 구하지 못하여 공식 폐지되었다. 한국기원에서도 공식적으로 폐지 기전 항목에 편입함으로써 완전 폐지가 확정되었다. 공식 폐지를 인정한 동아일보알파고 vs 알파고 기보를 동아일보에 전재하는 것으로 바둑 란을 대체해버렸다.

역사와 전통의 국수전이 폐지된 것에 대해 바둑 팬들은 여전히 크게 성토하고 있다. 만약 국수전이 명맥을 유지했더라면 후에 동아방송의 후신이 된 채널A가 전속중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3. 상금 규모

2010년 기준으로 총상금 한화 4억 5000만 원, 우승자에게는 4500만 원, 준우승자에게는 1/3수준의 상금이 돌아갔다.

4. 대회 방식

1956년의 첫 대회에서는 참가한 기사들이 리그전을 치렀으나 차회부터는 일종의 플레이오프제인 도전기 방식을 채용하여 전 대회 국수에게는 자동으로 도전기에 진출하여 타이틀 방어전을 갖는 형식을 취했다. 도전기는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치러지며, 최종 결승전인 도전자 결정전은 3전 2선승제로 진행한다. 브라켓 리셋은 없었다. 이 결승기에서 직전 대회 우승자가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방어에 실패할 경우에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패준이 되어 버린다. 첫 도전기는 무려 13전 7선승제(!!!)[7][8]였으며 그 다음부터는 7전 4선승제 방식을 쓰다가 5전 3선승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한때는 3전 2선승제를 채택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5전 3선승제로 돌아왔다.

2009년 한정으로 이세돌 기사의 휴직과 관련하여 2008년의 우승자였던 이세돌 기사의 타이틀을 반납받으면서 도전기 방식을 치를 수 없게 되자 토너먼트 우승자가 바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5. 전패준

역사가 오래되었고 도전기라는 대회 방식 때문에 전패준이 나온 경우도 많은데 총 6회가 나왔다. 그런데 전패준은 이전 대회 우승자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기에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국수전에 우승해서 '국수' 타이틀을 한번은 보유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전패준에 대해서는 조훈현 九단이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는데 일단 본인이 2번이나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조훈현은 3번이나 상대방에게 전패준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전패준을 주고 받는 조훈현-서봉수 라이벌 관계와 조훈현-이창호 사제 관계가 무시무시하다.
연도 승자 기록 전패준 달성자
1986 서봉수 3-0 조훈현
1988 조훈현 3-0 서봉수
1990 이창호 3-0 조훈현
1998 조훈현 2-0 [9] 이창호
2001[10] 조훈현 3-0 루이나이웨이
2008[11] 이세돌 3-0 윤준상

6. 대회 연혁

아래의 표는 우승 연혁과 우승한 기사의 당시 단수를 적는다. 연도는 결승 1국이 시작된 해 기준.[12]
횟수 연도 우승 준우승
1 1956 조남철 五단[13] 신호열 二단
2 1957 조남철 五단 민영현 二단
3 1958 조남철 六단 김명환 四단
4 1959 조남철 六단 김명환 四단
5 1961 조남철 七단 김봉선 五단
6 1962 조남철 七단 김인 四단
7 1963 조남철 七단 이창세 三단
8 1964 조남철 八단 이창세 三단
9 1964 조남철 八단 윤기현 四단
10 1966 김인 五단 조남철 八단
11 1966 김인 六단 윤기현 六단
12 1967 김인 六단 윤기현 六단
13 1968 김인 六단 조남철 八단
14 1970 김인 七단 김재구 五단
15 1971 김인 七단 조남철 八단
16 1972 윤기현 七단 김인 七단
17 1972 윤기현 七단 노영하 四단
18 1973 하찬석 五단 윤기현 七단
19 1975 하찬석 六단 강철민 五단
20 1976 조훈현 六단 하찬석 六단
21 1977 조훈현 七단 홍종현 五단
22 1978 조훈현 七단 김수장 三단
23 1979 조훈현 七단 하찬석 六단
24 1980 조훈현 八단 서봉수 六단
25 1981 조훈현 八단 서봉수 七단
26 1982 조훈현 九단 서봉수 七단
27 1984 조훈현 九단 서봉수 八단
28 1985 조훈현 九단 서봉수 八단
29 1986 조훈현 九단 서봉수 八단
30 1987 서봉수 九단[14] 조훈현 九단
31 1988 서봉수 九단 조훈현 九단
32 1988 조훈현 九단 서봉수 九단
33 1989 조훈현 九단 이창호 三단
34 1990 이창호 四단 조훈현 九단
35 1991 조훈현 九단 이창호 五단
36 1992 조훈현 九단 이창호 五단
37 1993 이창호 六단 조훈현 九단
38 1994 이창호 七단[15] 조훈현 九단
39 1995 이창호 七단 조훈현 九단
40 1996 이창호 九단 조훈현 九단
41 1997 이창호 九단 서봉수 九단
42 1998 조훈현 九단 이창호 九단
43 2000[16] 루이나이웨이 九단[17] 조훈현 九단
44 2001 조훈현 九단 루이나이웨이 九단
45 2002 이창호 九단 조훈현 九단
46 2003 이창호 九단 조한승 五단
47 2004 최철한 六단 이창호 九단
48 2005 최철한 九단 이창호 九단
49 2006 이창호 九단 최철한 九단
50 2007 윤준상 四단 이창호 九단
51 2008 이세돌 九단 윤준상 六단
52 2008[18] 이세돌 九단[19] 목진석 九단
53 2009 이창호 九단[20] 홍기표 四단
54 2010 최철한 九단 이창호 九단
55 2011 조한승 九단 최철한 九단
56 2012 조한승 九단 최철한 九단
57 2013 조한승 九단 이세돌 九단
58 2014 박정환 九단 조한승 九단
59 2016[21] 박정환 九단 조한승 九단

7. 역대 우승자

아래는 역대 국수 칭호를 가졌던 기사들이며, 총 12명의 기사가 이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기록 순서는 최초 타이틀을 딴 번기의 오름차순으로 정렬함을 기준으로 한다.
국수 통산 우승
조남철 9회
김인 6회
윤기현 2회
하찬석 2회
조훈현 16회
서봉수 2회
이창호 10회
루이나이웨이 1회
최철한 3회
윤준상 1회
이세돌 2회
조한승 3회
박정환 2회
대굇수 셋이 보인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1] 덤을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가된 결과의 경우 '반면'이라는 용어를 쓴다. 당시 덤은 4집반. 만약 당시 김인이 흑번인 상태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면 덤에 걸리게 되므로 조남철의 2집반승이 되었을 것이다.[2] 당시 기력은 四단이었다.[3] TV 보급이 매우 더뎠기에, 엄청 큰 바둑판을 걸고 수순에 따라 돌을 두는 형식이었다. 지금의 TV 바둑 중계에서 해설자들이 해설하는 형식.[4] 루이나이웨이는 2004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타이틀도 획득하였다. 이후로 정규 기전에서 우승한 여류기사는 단 한명도 없다. 그나마, 2022년 최정제27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의 결승전까지 올랐다가 준우승을 기록한 것이 비견될만한 일이다.[5] 동아일보는 사시로 "문화주의를 제창함"이 있을 정도로 문화에 쏟는 관심이 지대하다. 그 일례로 바둑에 대한 지원이 국수전이다. 아쉽게도 채널A에선 방송을 못했지만...[6] 한국기원 서버 내에 프로기사들이 예선 등록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예선 등록을 해야 하는 것.[7] 13번기가 아니라 도전7번기 다승제. 4승자가 나와 승부가 결정 되어도 무조건 7판을 채워야했다. 당시에는 신문바둑연재란을 채워야하다보니 대국수가 필요해 선승제를 할 수가 없었던 것. 결과는 7대0이었는데, 조남철은 훗날 7대0은 좀 너무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도전기무대에서 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고.. 다만, 4기~5기 도전3번기 다승제에서는 2승으로 방어가 확정된 후 최종 3국에서 1패씩을 기록하기는 했다. 2기 도전기 7대0 이후 심경의 변화가 있어 져준것인지, 도전자가 분전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3기 도전기부터 선승제가 도입되었다.(도전7번기 결과는 4대0) 4기 도전기에서 다시 도전3번기 다승제(조남철이 2승을 먼저한 뒤, 의미없던 3국을 김명환이 승리. 조남철의 국수전 첫패였다)가 되었다가 6기 도전기(김인 첫 도전, 도전5번기)부터 선승제가 일반화되었다.[8] 6기 도전기는 3승1무1패 조남철 방어였는데,1국이 무승부였다. 1국 결과 판빅(바둑판 위 집수가 동일)이 나와, 동아일보사옥 앞에서 중계를 보던 바둑팬들은 덤 4집반을 적용해 백이었던 김인이 승리했다고 생각해 환호하였는데, 당시 한국기원 기전 규약상 도전기 최종국 전에는 덤이 없다는 규약(4국까지는 흑백을 번갈아 두니까)이 발견되어 무승부처리된다는 발표를 듣고 다시 탄식하였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이 규약은 차기국수전부터 1~4국에도 덤이 적용되도록 개정되었다.[9] 3전2선승제[10] 결승 대국 기준[11] 결승 대국 기준[12] 예를 들어 43기는 1999년에 예선이 시작되었으나 결승전은 다음 해인 2000년 1월 17일에 1국이 시작되었기에 2000년으로 기록함.[13] 지금도 전설로 추앙받는 전승 우승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때는 리그전이었음에도 전승으로 우승[14] 조훈현의 3차 전관왕을 무너뜨리며 우승을 차지. 국수전 도전 10년 만에 우승한 것이라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다. 당시 언론도 조-서 10년 대결을 특집으로 다뤘다.[15] 이창호가 3:2로 조훈현을 꺾고 타이틀을 방어. 특히 마지막 5국은 밤 11시 5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이창호가 반집승을 거뒀다. 1994년 당시 이창호는 무려 13개의 기전을 석권하며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세울 만큼 극강의 위력을 보여줬다.[16] 43기는 결승이 해를 넘어감에 따라 2000년 1월 17일에 도전기 1국이 시작되었다.[17] 사상 최초로 여성기사 우승이자 외국인 기사의 우승이다. 결승 번기의 대전 상대는 국수전 최강자인 조훈현 九단, 준결승전에서는 이창호 九단을 이기고 올라왔다.[18] 52기는 결승까지 빠르게 진행되어 도전1국이 11월 13일에 시작되었다.[19] 휴직 사건으로 인해 현재 타이틀은 반납되었다. 하지만 우승 기록은 그대로 유지.[20] 이때는 이세돌 九단의 국내기전 휴직 사건으로 이세돌 九단이 결승기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도전기 방식을 제외하고 풀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렸다.[21] 59기는 도전 1국이 2015년 12월 5일에 시작되었으나 도전 2국부터 해를 넘겨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