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89년 7월 1~8일[1] 열린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남한의 1988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하였던 행사다.[2]
2. 배경
북한은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올림픽 개최는 체제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공동 개최 같은 것을 주장하거나 항공기 폭파 테러를 벌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단독 개최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우방이나 다름없던 중국과 소련까지 참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뒷목잡기를 시전하게 만들었다.분단 직후의 북한은 당시 기준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의 지하자원들과 일제 치하에 건설된 중공업 설비들, 소련과 중국의 경제적 지원 등으로 60~70년대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우위에 있었고, 8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과 남한의 국력은 부문 별로 일장 일단이 있지만 비등비등한 수준이였다. 지금처럼 국제사회에서 비정상의 끝을 달릴 정도로 허약해진 경제는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지나면서였고, 그전에는 그래도 국가의 틀은 갖추고 있는 모양새이였다. 그런데 우위가 있다고 믿었던 60~70년대를 지나서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니, 남한의 추격을 따돌릴 수준이 아니라 자신들이 되레 추격하는 모양새가 되자, 북한 수뇌부의 심리적 부담은 더했을 것이다.
북한은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 1985년부터 준비를 시작한 후 1987년부터 축전준비위원회를 두어 막대한 시설 투자와 준비에 열을 다해 177개 국가, 약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북한 정부도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했다고 선전할 정도였다. '5대륙 청춘들 평양으로 오네' 등의 노래까지 만들어서 선전했으니...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세력 과시는 신흥국 경기 대회 항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3. 영향
3.1. 경제적 타격
그러나 가뜩이나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든 행사를 무리하게 연속 개최하다 보니 북한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국가 연간 예산(45억 달러)를 뛰어넘고 국가 GDP(157억 달러)[3]의 30%에 육박하는 거액 47억 달러[4][5]를 이 한 행사를 준비하는 데 지출했으니... 행사 준비뿐만 아니라 청년축전을 위한 스포츠 및 주거시설 등 건설 사업에 든 돈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것을 감안해도 터무니없는 수준의 금액이 든 셈이다. #1 #2 심지어 준비 과정에서 지은 다른 건물들의 건설비까지 합하면 청년축전 준비 비용은 더 늘어난다.물론 류경호텔과 릉라도5월1일경기장, 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축구경기장,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건설[6][7], 광복거리&청춘거리를 위시한 평양내 고층아파트 건설[8], 평양국제비행장 확장 등 여러가지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시의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라 부동산 개발로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세계 곳곳에서 손님들은 많이 불러왔는데 재울 곳이 부족해서 동구권 출신 학생들은 평양 부근 선로상에 침대열차를 정차시키고 거기서 숙박시켰다고 할 정도다.[9] 동구권 나라들은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이기 때문에 북한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0]
물론 1990년대 이후로는 사정이 확 달라져서 2000년대에 평양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2018~19년 부동산 침체기 이전까지는 부동산 개발로 각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부동산 개발을 통해 돈을 왕창 벌어 왔다고는 하지만 이때는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사실 개혁개방 정책을 펴던 중국조차도 이때는 부동산 배급제를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행사를 통해 자국을 홍보해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광단을 초청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까 버는 건 10원 한 장 없고 그냥 돈만 잡아먹는 등골 브레이커였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당연히 손해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서울올림픽이 선수촌 아파트 분양으로 제법 쏠쏠하게 흑자를 냈고 한국에 대한 모습 제고를 통해 이후 관광+투자 활성화의 시발점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선진국조차도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처럼 국제대회가 충분한 경제효과를 부르지 못해 개최도시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북한은 올림픽보다도 수익이 안 나는 대회에 온 나라의 재정을 영끌했으니 그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었다.[11]
어쨌거나 북한은 이미 지나치게 과도한 군사비 부담과 충분한 물적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은 관료적 계획경제의 모순으로 인해 저성장 상태에 놓여 있었고 과도한 행사 비용 부담으로 인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북한뿐만 아니라 당대 동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동유럽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공장을 짓겠다고 서방으로부터 외채를 잔뜩 빌렸다가[12] 기름값 폭등과 이자율 상승으로 돈을 제때 갚기 힘들어진 것의 영향이 큰 반면 북한은 군사비의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때 외국인들을 위해서 찍어낸 '외화와바꾼돈표'에 의해서 일종의 통화량 팽창으로 북한의 외환경제는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어 소련 붕괴, 자연재해와 더불어서 고난의 행군을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때 김정일이 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한다고 국고를 마구 털어 북한의 예비물자들을 비롯한 최악의 경우에 사용될 식량과 필수품들이 시장에서 암거래로 판매되었다고 한다.[13]
3.2. 사회적 타격
자세한 내용은 임수경 방북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북한은 이로서 본의 아니게 대놓고 체제경쟁 패배를 인증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임수경이 남한 사람으로서 민간통일운동으로 참석하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동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일이 있었지만 임수경은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만큼 남북한 주민들 모두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임수경에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오히려 통제사회인 북한의 일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청바지를 미 제국주의 상징으로 선전했는데 정작 통일투사로 선전했던 임수경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거기다 임수경은 사람만 모여있다 하면 그 자리에서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연설을 해 북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으며,[14] 김일성 생가 만경대 순례를 거부하기도 했는데 결국 수행원이 겨우겨우 설득하고 나서야 간신히 방문했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공개석상에서 "남한도 남한이지만, 북한 체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수경의 행동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방북자가 북한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벌이던 상황이라 북한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좌파 청년들 눈 앞에서 임수경의 돌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명철 전 김일성대 교수 등 1990년대 탈북자들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임수경 충격이다. 임수경을 보고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15] 그래서인지 축전이 끝난 후 북한 정부에서 사상무장을 다시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한동안 통제가 강화되었다고 한다.[16]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서울을 대거 방문한 북한 기자단은 당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임수경의 집을 방문하여 임수경의 부모와 인터뷰하여 남한 체제를 비판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뉴스를 본 북한 주민들은 ‘아니, 정치범이 수감당하고도 가족이 멀쩡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 남한에서도 민주화 이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연좌제가 시행되었으며 6공 초기에도 그 잔재가 남아있어 임수경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그의 가족에게도 완전히 불이익이 없지는 않았다.[17] 그럼에도 정치범이 수감되면 그 정치범의 3족을 모조리 정치범수용소에 가두는 법적인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북한에 비하면 해를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어 중산층에 불과하다는 가정집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을 내놓은 데 대한 것과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진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선 외국인들이 다닐 법한 길에 위치한 가정집들에 통조림을 두어개씩 나누어주며 "혹시 외국인 손님을 받을 일이 있으면 대접하라"라고 지시했다. 한 마디로 북한에선 통조림이 부의 상징인 셈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통조림은 어느 슈퍼를 가도 쉽게 사올 수 있는 외국인들에겐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했다. #
그나마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18]이 나아서 행사가 끝나면 그 때까지 참았다가 반납 안 하고 먹어도 좋다고 했다고 하지만 이후 경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런 선전물품들의 가치가 워낙 올라가 소모되지 않았으면 도로 회수하고 있다. 외국인 왔다 가서 깠다고 뻥치고 먹어 버리려고 해도 북한에선 외국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감시 겸 가이드가 붙어서 얘들이 그런 사람 온 적 없다고 해 버리면 처벌받아서 그런 짓은 못 한다. 그런데 임수경 집의 냉장고에선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고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까지 내왔으니 그런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임수경은 당시 한국 기준으로 봐도 잘 사는 집 출신이긴 했다. 당시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23] 부친이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허나 북한 입장에선 혁명열사가 부르주아라고 말할 수 없었고. 그야말로 혹 붙여주려고 왔다가 되려 자기한테 혹 붙이고 간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5년형을 북한 언론이 비판할 때부터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그럼 사형이 아니란 말이냐?"였다고 한다. 판문점으로 남쪽에 돌아가는 임수경을 보고 "아이고 저 새파란 처녀가 죽으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을 정도였다. 당시 이를 본 북한 예술인 김용도 경악했고 우리가 속고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한 북한 사람도 많았다. 결국 김용도 이후 중국으로 가서 잠적하고 몇 해 안 가 1991년에 탈북해 한국에서 살게 되었으며 그가 써서 한때 제법 팔린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책자에서도 임수경을 언급했다.
더구나 김일성은 생전에 함경도 사람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할 정도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남한에서도 영호남 지역갈등 같은 지역감정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특정 지역 출신의 고위직 진출 금지 같은 끔찍한 상황은 결코 공공연하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임수경은 북한으로 치면 반역죄인인데 요덕 제15호 관리소나 아오지 탄광으로 간 것이면 그나마 행운이고 실제론 무시무시한 총살형이 반기는 판국에 총살은 커녕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사실을 볼 때[24] 북한에서 볼 땐 이만한 컬처 쇼크도 없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지금으로부터 [age(1989-06-30)]여 년 전인 데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기 훨씬 전이던 1989년에[25] 이미 북한 주민들은 남북한의 차이를 실감하고 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26][27]
4. 북한의 반응
당연하겠지만 아직도 저 축전을 자랑거리로 선전하는 중이다.[28]북한은 이 축전에 대해 '주체조선의 무진막강한 국력과 위용을 온 세상에 과시'한 것은 물론(?) 외국인들이 "평양축전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100% 완전무결한 축전", "축전운동이 생긴이래 있어본 적이 없는 가장 큰 사변", "규모로 보나 내용과 형식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다른 국제행사들에 비할 바 없이 방대하고 심오하며 다양하고 종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대축전, 세계적인 본보기축전"이라 호평했다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미화하며 선전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공교롭게도 김일성은 1994년 7월 8일 사망함으로서 세계청년학생축전 마지막 날에서 딱 5년 뒤에 사망했다.[2] 제13차 평양서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3] 1989년 UN 통계 기준.[4] 2024년 환율로는 120억 달러로, 한화로는 약 16조 원이다.[5] 1988 서울 올림픽 때 들어간 비용이 77억 달러(2024년 환율로 206억 달러, 한화 약 27조 원)로, 세계축전보다 예산이 두배정도 더 들었지만 그 당시 대한민국의 GDP는 1996억 달러에 달했으니 3.9%만 사용했으며, 냉전의 종식을 선언한 행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쏟아부은 돈 대비 최대의 이득을 뽑아냈다. 이후 한국은 2018 평창 올림픽을 한 번 더 치렀는데 이 때도 몇몇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성공적인 행사라는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모된 예산도 평양 세계청년축전에 들어간 비용의 현재 가치보다도 적은 도합 13조 8천억 원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 GDP(1,919조 원)의 0.7%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경제에 주는 타격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6] 이들은 아직도 미완성인 류경호텔을 제외하면 모두 1988년/1989년 5월에 딱 맞춰서 준공되었다.[7] 그 중에서도 류경호텔, 릉라도5월1일경기장,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물론 이들을 건설하는 데에도 막대한 돈이 낭비되었다.[8] 사실 고층아파트 건설 자체는 북한에서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다. 당시 북한도 한국처럼 막 베이비붐 세대들이 집을 마련해야 할 시기가 온지라 고층아파트 건설이 당연히 필요했다. 다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예산 부족으로 거의 맥이 끊겼다는 게 문제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부동산 개발업이 활성화되면서 고층아파트를 올리고 있지만 가격대가 너무 비싸고 부실공사도 판을 친다는 문제점이 있다.[9] 김길선 기자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증언한 내용. 사실 주택의 공급부족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10] 물론 참가한 동유럽 국가들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귀국한 후에는 북한의 저런 실정을 마구 까대고 비웃었다고 한다.[11]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북한경제에 후유증 심각[12] 덕택에 단기적으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다. 그 이후가 문제였지만...[13]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930년대 고난의 행군[14] 당시 임수경의 연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저 여자는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말을 거침없이 술술 하는데, 남조선은 그만큼 교육의 질이 좋은 것 아닌가?“ 라며 놀랐다도 한다.[15] 애초에 1983년 이웅평도 전두환 시기 한국이 북한보다 자유롭다는 판단 하에 탈북한 거였다.[16] 이는 이로부터 30년쯤 지난 후부터 북한에 한류가 유행하자 북한 측에서 사상무장 운운하며 청년들을 한겨울의 백두산에 강제로 등반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오버랩되는 모습이다.[17] 실제로 월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월북자와 납북자의 가족은 사회적으로 막대한 차별을 받았다.[18] 1989년 UN 통계 기준 북한의 1인당 GDP는 811달러로 수치상으로는 북한 역사상 가장 높았다. 다만 이조차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2052달러로 최빈국을 겨우 면하는 수준.[19] 취소선을 쳐 놨지만 당장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충격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푸짐하고 풍요로운 음식들과 식문화다. 웬만한 당간부보다도 수준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아쉬움과 탄식을 하기도 하는데 남한 주민들이 먹는 음식들을 북한에 보내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밥에 고깃국도 한국은 진작에 달성한 지 수십 년도 넘은 것을 넘어 아예 맛이 없는 식당은 살아남지도 못 한다.[20] 1~2주도 아니고 한 달 동안이나 거뜬하게 먹는 것은 닭을 푹 고아 사골 수준으로 우려먹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핵가족인 4명 기준으로 닭 한 마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약 1주 만에, 심하게는 3일 내외로 다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양이다. 남한에서는 흔해빠진 닭고기조차 북한에는 귀중한 음식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공급량이 매우 낮고 굉장히 비싼 음식임을 알 수 있다.[21] 저 당시 대한민국도 고기는 좀 귀하긴 했지만 닭 정도는 아무때나 사올만 했다. 사실 당시 북한에서는 고기가 워낙 귀해 고기를 삶을 때 떠오르는 기름을 따로 모아서 조명을 켜는 등에 사용했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저 에피소드가 과장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2021년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이라며 평양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특별 배급으로 공급한 것을 '위민헌신' 운운했다가 남한 네티즌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은 포기한 것 같다'는 식의 조롱을 받았다. #[22] 하다못해 유럽 공산권 국가 중 가장 빈곤했다는 알바니아조차 4인 가족 기준 한 달에 한 마리의 닭은 배급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늦어도 1989년 이전부터 북한 배급제가 평양 주민들에게 고기도 제대로 못 줄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알바니아 주민들도 평상시에는 배급받은 빵과 야채로 연명해야 했지만.[23] 1980년대 말 한국 정부가 교육용 컴퓨터를 지정할 때 16비트 컴퓨터 값이 크게 떨어졌는데 16비트 XT, AT 기준으로 올림픽 전이라면 100만 원대에서 200만 원 정도가 신문 카탈로그 표시 가격이었다. 올림픽 뒤에는 100만 원 잡고 XT라면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세트가 100만 원 안쪽이었다고 보면 얼추 비슷하다. 8비트라면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본체 30만 원대 + 모니터 30만 원대에서 조금 더 하는 수준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지금과 물가나 소득수준이 다르므로 지금의 100만 원과는 가치가 다르다. 일례로 당시 라면이나 죠스바 가격은 100원 정도였다. 지금만큼이나 교육열이 심하던 시절이라서 정부가 컴퓨터교육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자식 있는 가정에서는 집에 자동차는 없어도 자식 컴퓨터는 사주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부유층의 기준은 컴퓨터 같은 자식 교육용 비싼 장난감보다는 아파트에 사느냐(1기 신도시가 지어질 때였다)와 어떤 차를 모느냐가 확실하다. 이런 것 따지지 않아도 당시 사회에서 부친의 직장 직위가 이미 부유층이라 봐도 되지만.[24] 다만 방북 당시 반미 발언으로 봐도 북한 체제 비판을 노리고 간 것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으며 의원 시절엔 탈북 대학생에게 변절자라고 폭언하여 비판받았고 동시에 정치인의 자질도 의심받아 20대 총선 때 출마는 커녕 소속 정당에서도 쫓겨나면서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나 버렸다.[25] 즉,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데다(6.29 선언이 있던 1987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겨우 2년밖에 안 됐을 때다) 경제적으로도 비록 경제성장률은 높았을지언정 아직 부족한 게 많았던 중진국 시절이었다. 한국이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체제가 끝나고 한일 월드컵을 개최한 2002년으로 임수경의 방북으로부터 13년이나 지난 후였다.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항목 참조.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89년 기준 한국은 1인당 GDP 세계 평균을 넘긴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으며 당시 한국의 1인당 GDP(3882달러)는 세계 평균의 1.5배에도 미치지 못했다.[26] 1989년 북한의 1인당 GDP는 (UN 통계 기준으로) 811달러였고 남한은 5724달러였던 만큼 둘 사이에는 7배에 달하는 격차가 있었는데 심지어 당시 한국과 최전성기였던 일본간 1인당 GDP 격차도 5~6배로 한국과 북한간 격차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2022년에는 북한 590달러, 남한 32530달러로 격차가 62배로 더 벌어졌는데(이는 일본:콩고민주공화국 수준이다) 즉슨 버블경제 시기 일본과 북한 간 격차보다 오늘날 한국과 북한 간 격차가 훨씬 큰 셈이다. 덤으로 1961년 최빈국이던 남한(94달러)과 세계 최강대국 미국(3067달러)의 차이가 약 32.6배였다.[27] 앞의 각주에서도 설명했듯 임수경 방북으로부터 30년도 더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은 꾸준히 성장하여 이탈리아와 동급 수준의 강대국의 최소로 등극한 것과 달리 북한은 꾸준히 하락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최빈국으로 꼽히는 나라들과 동급 수준의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2022년 기준 북한의 1인당 GDP(590달러)는 소말리아(592달러)보다도 낮다.(...)[28] 이는 같은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 중 하나인 서해갑문도 마찬가지다. 물론 북한도 어느 정도 의식은 있는지 이들 둘을 합한 것 이상으로 폭망한 순천화학련합기업소는 아예 언급조차 금기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