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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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달현 金達鉉 | Ким Дар Хен | |
<colbgcolor=#E40001><colcolor=#fff> 도호 | 활권(活卷) |
종교 | 천도교 |
출생 | 1884년 7월 24일 |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동산리 | |
사망 | 불명 |
학력 | 보성전문학교 (졸업)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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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초대 천도교청우당 당수를 지냈으나 1958년에 숙청당했다.도호는 활권(活卷)이다.
2. 생애
2.1. 해방 이전
1884년 7월 24일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천도교 내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으로 유학하여 농대를 졸업했다고 하고 북한의 자료에 따르면 1931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연구자들은 보성전문학교 기록에서 김달현의 이름을 찾지 못했으며 50이 다 된 김달현이 뜬금포로 보성전문에서 공부할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903년, 혹은 1907년 7월 1일에 주변 천도교인의 이기완(李岐完)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도했다. 천도교 내부 기록에는 1907년 입도 기록이 있으나 그 이전에 이미 김달현이 접주를 지냈다는 점에서 1903년 입도설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도사가 되어 경원군 교중의 교역자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경원군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체포되었다.
1925년에 후배 조덕구(趙德龜)와 함께 경원소작조합을 조직하는 등 농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소작쟁의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후 천도교가 조선농민사를 결성하여 전국의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자 교양부장이 되어 함경남도 농민들의 계몽운동을 벌였다. 1933년 천도교청년당 중앙당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 1934년 1월에 조덕구의 권유로 천도교 경원군 종리원장이 되었다. 12월에는 경원공작계 위원장이 되어 공작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12월 22일, 천도교 제8회 임시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깔끔한 일처리로 천도교 중앙에서 명망을 얻었다. 이후 3년 연속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37년 김연주(金延柱)에게 의장직을 물려준 이후에도 부의장으로 일했다. 1939년 천도교중앙당사 감사로 뽑혔으나 해방 직전에는 천도교 교직을 맡지 않은 상황이었다.
2.2. 해방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김달현은 교인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경원구 종리원장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천도교임시전국대회 의장에 선출되었고 최린 출교 문제로 벌어진 다툼 속에서 급진파 손의기(孫衣基)가 그를 공격하여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퇴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 해당 회의에서는 부의장 박완이 주도한 회의 끝에 최린의 출교가 결정된다. 한편 천도교의 핵심 기반은 북한 쪽이었는데, 분단 이후로 서울의 중앙당은 더 이상 북한을 지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에 북한 쪽에 독자적 당부 설립을 허가하게 된다. 따라서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 북조선 천도교청우당이 설립되어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시점에서 당원은 40만에 이르렀다.1948년 1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로 들어오자 북한은 이들의 입북을 거절하였는데, 남한의 천도교지도자들은 3.1절을 기하여 민주통일을 촉구하는 대규모 3,1절 재현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서울 측의 연락에 김달현은 시간이 없다고 이를 묵살하려 하였으나 결국 미소 양군 철수, 단독정부 지지 반대,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 하의 총선거를 지지하는 평화시위가 당론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김달현은 이것을 알게 되고 즉시 북한 측에 이를 밀고하여 1948년 2월 24일부터 북한 측은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돌입, 1만 3천명의 당원을 체포하고 극심한 고문 끝에 87명으로부터 김일성 암살 및 북한 정권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이를 근거로 4명을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를 아오지 탄광에 보내서 굴리게 했다.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자들은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대해서 김달현을 배신자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강하긴 한데, 1948년 1월 16일, 레베데프 비망록을 보면 그 역시 처음에는 총선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한 모양이나 소련 측의 경고에 당원들의 희생이 너무 클 것이라 여겨서 입장을 바꾼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자기 당원들을 북한 정권 아가리에 던져준 것은 변명 불가능한 부분. 한편 남한에서는 김달현이 남한 천도교를 적화하고 신성모를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남한 천도교청우당을 숙청해버렸다.
1948년 4월, 천도교청우당 2차 당대회에서 김달현은 다시 위원장으로 재선되었으며 1948년 북한 초대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김달현은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는 천도교청우당으로 임명하는 등 어느 정도는 연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독재가 강화되면서 이 짧은 연정은 금세 무너지게 된다. 김달현은 1949년 조국전선 의장에 임명되었다.
한편 6.25 전쟁 준비에 한창이던 북한에서 김달현은 로동당 우당이 되느니 차라리 당을 해체하자는 보수파들을 대거 숙청하고 1950년 1월, 천도교청우당 3차 당대회에서 남한 천도교청우당을 흡수하여 조선 천도교청우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다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김달현은 간부부를 중심으로 보수파 지도자들을 숙청하고 천도교리를 과학화한다는 구실로 유물론적 해석을 하여 사실상 이때 천도교청우당은 북한의 어용우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 지도부를 따라 강계로 후퇴했으며 1951년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평양을 되찾게 되자 평양 북쪽 8킬로미터 떨어진 대성산에서 당사를 마련하고 집무를 보다가 가을에야 평양으로 돌아왔다. 1951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허헌이 사망한 이후 그의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잠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3년 4월, 자신의 측근이며 청우당 부위원장, 체신상이었던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3년 12월 22일, 최고인민회의 1기 6차 회의에서 리영에게 의장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부의장에서 소환되어 내각 무임소상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북한 정권의 꼭두각시로 여러 모임에 불려다녔으며 1954년 8월 21일, 그의 칠순을 기념하여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훈장을 수훈받았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내각 무임소상에 유임되었다.
하지만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겪은 이후 김일성은 대규모 당내 숙청을 진행하였으며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로 당내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자 더 이상 쓸모없는 천도교청우당도 숙청하였다. 1958년 9월 7일, 김달현은 김일, 박정애,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1958년 10월, 청우당 10월 전원회의에서 6.25 전쟁 중 파괴활동을 일삼았고 이후에도 같은 짓을 한 죄목으로 청우당 중앙위원장에서 철직, 당에서 제명당했으며 직후 조국전선 음모사건에 휘말려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김일성은 천도교청우당 시당, 도당 지도부를 모조리 조지고 1959년 1월에 박신덕을 새 위원장으로 삼아 완전히 파괴된 천도교청우당만을 남겨놓았다. 그의 숙청은 소련 측에도 보고되었으며 1958년 11월 14일, 소련대사 푸자노프와의 대담에서 외무상 남일은 김달현이 청우당 1958년 10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달현이 6.25 전쟁 중 미국과 내통한 것을 폭로하였으며 김원봉과 결탁한 것이 폭로되어 체포되었다고 알려왔다. 12월 19일, 김일성도 직접 김달현을 체포, 조사할 것이라고 푸자노프에게 알려왔다. 그의 숙청으로 공석이 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의석은 1959년에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현재는 복권이 됐는지 김일성을 잘 받들어모신 영감쟁이로 묘사되고 있으며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는 나에게 일상생활에서 제기되는 애로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라고 좋게 표현해주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김달현에게 산삼을 내려주는 등 잘 챙겨주었다고 이빨을 까고 있다.
3. 참고문헌
- 박세준, 천도교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 국가와의 관계변화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