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프랭크 처치 Frank Chur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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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랭크 포레스터 처치 3세 Frank Forrester Church III |
출생 | 1924년 7월 24일 |
미국 아이다호 보이시 | |
사망 | 1984년 4월 7일 (향년 59세) |
미국 메릴랜드 베데스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소속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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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2. 생애
3.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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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처치 특별위원장[2] |
처치 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실추된 미국 정부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정보기관이 우선 투명성을 갖춰야한다는 신념 하에 세워졌고, 월터 먼데일, 필립 하트, 존 타워, 배리 골드워터, 리처드 슈바이커, 하워드 베이커 등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중진의원들이 위원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음모론으로 치부되었던 CIA와 FBI의 여러 뒷공작을 캐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이 조직의 조사 하에 살바도르 아옌데를 몰아낸 1973년 칠레 쿠데타가 CIA의 뒷공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었으며, 쿠바 공산주의 정부를 향한 미국 정보부의 편집증적인 음해 시도도 발각되었다. 또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재조사했는데, 이때 조사된 방대한 문건은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 때 기밀 해제되었다. 물론 음모론자들이 기대한 새로운 건 없었고 FBI와 CIA가 자신들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몇몇 사소한 사건을 은폐했다는 점만이 공개되었다.
처치 위원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진보 진영에서는 베일에 감추어져있던 CIA와 FBI의 더러운 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정보 조직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한 위대한 진상규명 행위였다고 평가하는 반면, 보수층은 이러한 노골적인 CIA, FBI 찍어내기가 결국 지미 카터 정권의 안보 무능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1979년 이란 인질극 사건 당시 특히 미국의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었고 결국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처치 위원회는 해체되고, CIA와 FBI의 조직을 확장하는 정책이 백악관 행정명령 12333호를 통해 추진되며 처치 위원회의 정보조직 개혁은 반쪽짜리의 성공으로 끝났다. 더불어 프랭크 처치 본인도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3]
그럼에도 처치 위원회의 활동은 미국 정보조직의 장막을 걷어내고 이를 개혁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이후 CIA와 FBI 개혁을 추진한 여러 정치인들에게 동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