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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 상원의원 (애리조나 주 클래스 1) | ||||
제62~76대 헨리 F. 애셔스트 | ← | 제77~82대 어니스트 맥팔랜드 | → | 제83~88대 배리 골드워터 |
미합중국 제77-82대 연방 상원의원 | |
제10대 애리조나 주지사 어니스트 윌리엄 맥팔랜드 Ernest William McFarland | |
<colbgcolor=#cf5c10> | |
출생 | 1894년 10월 9일 |
미국 오클라호마 준주 얼즈보로 | |
사망 | 1984년 6월 8일 (향년 89세) |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
학력 | 오클라호마 대학교 (B.A.) 스탠퍼드 대학교 (M.A./J.D.) |
종교 | 감리교 |
가족 | 배우자 클레어 콜린스 (1926-1930) 배우자 에블랜드 스미스 (1939-) |
'재임기간 | 연방상원의원(애리조나 클래스 1) |
1941년 1월 3일 ~ 1953년 1월 3일 | |
민주당 연방상원 원내대표 | |
1951년 1월 3일 ~ 1953년 1월 3일 | |
연방상원 민주당 의원총회 의장 | |
1951년 1월 3일 ~ 1953년 1월 3일 | |
제10대 애리조나 주지사 | |
1955년 1월 3일 ~ 1959년 1월 5일 | |
서명 | |
링크 | 홈페이지 |
{{{#ffffff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해군 |
1917년 ~ 1919년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민주당 연방상원 원내대표, 애리조나 주지사, 애리조나 주 대법원장을 역임했다.2. 생애
오클라호마 준주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형제들처럼 농부가 되기를 거부한 그는 이스트 센트럴 공립대학에서 교사 자격증을 따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다. 그 뒤 오클라호마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한다. 미시간주 오대호 인근 한랭한 해군기지에서의 훈련을 그는 적응하지 못하고 폐렴에 걸리고 만다. 갈비뼈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았지만 그의 폐렴은 폐기종, 흉막염, 심낭염으로 악화되었다. 해군병원에서 지내다가 병이 치료된 1919년에는 이미 미국이 종전을 맞이해 의병 제대한다. 다행히 퇴역군인 혜택으로 받은 농가 덕에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맥팔랜드는 제대 후 애리조나로 이사해 은행원으로 취직했지만 스탠퍼드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려고 캘리포니아로 갔다. 법학 박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딴 그는 애리조나로 복귀해 민주당 주지사 후보의 당선에 기여해 주 법무장관 보좌관으로 임명된다. 1926년에는 첫 부인인 스탠퍼드 대학교 동기 클레어 콜린스(Clair Collins)와 만나 결혼한다.피날 카운티 검사로 일하던 그는 두 아이가 죽어 실의에 빠진다. 맥팔랜드 부부는 겨우 정신적 상처를 회복하고 아내는 다시 임신하지만 셋째는 사산되고 아내는 사산의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폐렴 때문에 사망한다. 한편 맥팔랜드는 피날 카운티 고등법원 판사에 출마하지만 낙선했다가[1] 4년 뒤 재도전해 당선되었다. 첫번째 아내와의 사별 9년 후 재혼한다. 1940년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애리조나주 승격 직후부터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던 헨리 F. 애셔스트(Henry F. Ashurst)를 꺾고 본선에서도 승리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맥팔랜드는 상원의원 초선 때부터 랜드리스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초선 의원이라 조용하게 있을거라는 버튼 K. 휠러(Burton K. Wheeler) 상원의원의 생각으로 군산복합체 통제를 위한 나이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지만 위원회의 가라식 영상 검열을[2]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최대 업적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G.I. 법안(G.I. Bill)을 적극적으로 입안한 것이다. 자신이 퇴역 군인으로서 받은 부실한 대우를 2차 대전 참전용사들은 겪지 않게 하고 퇴역 군인들이 사회에 충실하게 복귀할 수 있게 의료, 경제, 주택, 교육, 대출같은 광범위한 혜택이 법안에 포함되도록 하였다. 한국 전쟁 중 의회가 G.I. 법안을 축소하려고 했지만 그의 반대로 법안의 혜택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G.I. 법률은 지금까지도 미군 참전용사가 사회의 경제적 기둥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 외에 캘리포니아와의 수자원 분쟁 해결에도 애리조나주 입장에서 도움을 주었다.
초재선 시절 업적과 1950년 미국 중간선거에서의 현직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스콧 루카스(Scott Lucas)의 낙선으로 민주당 연방상원 원내대표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는 해리 S. 트루먼 행정부와 긴밀한 동맹관계로 정부 정책을 보좌하는 법률 통과와 상원의원들의 견해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1952년 상원의원 3선을 시도했고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다.[3]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 말기의 20%대 지지율과[4] 아이젠하워의 전쟁영웅 후광, 공화당의 전폭적인 자금,유세 지원으로 피닉스 시의원 출신 배리 골드워터에게 밀려 낙선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얻는다.[5] 특히 매리코파 카운티에서의 골드워터 승리가 맥팔랜드의 낙선을 야기했다.[6] 그의 낙선으로 인해 민주당 연방상원 원내대표직은 텍사스의 린든 B. 존슨이 승계했다.
상원 낙선 2년 뒤인 1954년 중간선거에서 애리조나 주지사에 출마해 현직 주지사를 꺾고 당선되었다. 주지사 임기 중에는 교육 투자에 힘쓰고 주내 텔레비전 방송국#을 열었다. 또한 수자원과 전력 확보를 위해 글렌 캐니언 댐 건설을 진행했다. 1956년에 아이젠하워가 애리조나에서 대승했음에도 주지사로 재선되었다. 1958년에는 골드워터와 리벤지 매치를 했지만 더 표차가 벌어진 채 낙선한다. 정계를 은퇴한 그는 1964년에는 애리조나 주 대법관, 4년 뒤에는 애리조나 주 대법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84년 피닉스에서 사망한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애리조나 | | 101,495 (71.61%) | 당선 (1위) | 초선 |
194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80,415 (69.18%) | 재선 | |||
195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5,338 (48.69%) | 낙선 (2위) | |||
1954 | 미국 주지사 선거 | 128,104 (52.51%) | 당선 (1위) | 초선 | ||
1956 | 미국 주지사 선거 | 171,848 (59.55%) | 재선 | |||
19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9,030 (43.94%) | 낙선 (2위) |
4. 여담
[1] 낙선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했다.[2] 영상을 보지도 않고 검열 처리하는 일이 빈번했다.[3] 골드워터는 후일 자신의 승리 확률을 15대 1로 예상했다고 적었다.[4] 트루먼 행정부의 긴밀한 동맹이었던 기록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5]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낙선은 52년 후 2004년 미국 양원·주지사 선거에서 톰 대슐 낙선으로 다시 발생했다.[6]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대로 매리코파 카운티에서의 조 바이든 승리가 그의 애리조나주 승리를 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