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2:01:27

러디어드 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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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
파일:Rudyard_Kipling_(portrait).jpg
[[노벨문학상|{{{#white 19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생 1865년 12월 30일
인도 제국 뭄바이
사망 1936년 1월 18일 (향년 70세)
영국 런던 피츠로비아
직업 소설가, 시인
서명
파일:Rudyard Kipling 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아들 잭의 전사(戰死)2.2. 전후
3. 논란4. 주요 작품 목록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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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약 네가 승리와 좌절을 맞이하여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다룰 수 있다면
…… 너는 어른이 될 것이다, 아들아.
-러디어드 키플링, <만약―>
죽은 자를 기억해 주는 작디작은 공간이 있다면
내가 뒤에 남긴 책들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십시오.
-러디어드 키플링, <호소>
우리가 왜 죽었느냐고 누군가 묻거든(If any question why we died),
우리 아버지들에게 속아 이리 되었다 전하시오(Tell them, because our fathers lied).
-러디어드 키플링의 2줄 짜리 시 <묘비명:흔한 형태(Epitahphs: Common Form)>
아,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을지니,(Oh,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
천지가 하느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 그러하리라.(Till Earth and Sky stand presently at God's great Judgment seat;)
그러나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으리라.(But there is neither East nor West, Border, nor Breed, nor Birth,)
세계의 끝에서 온 강자가 서로 대면할 때에는!(When two strong men stand face to face, though they co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러디어드 키플링의 4줄 짜리 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

영국시인, 소설가.

2. 생애

1865년 인도 뭄바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존 록우드 키플링(John Lockwood Kipling)은 영국 지배 하의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하나였던 바이 람 싱(Bhai Ram Singh)의 협업자이자 멘토였다. 이 둘이 함께 만든 작품이 바로 와이트 섬에 있던 빅토리아 여왕의 피서용 별장 오즈번 하우스(Osborne House)의 제후접견실(Durbar room)이다.

1871년에는 부모의 품을 떠나 영국에서 수양부모와 함께 생활했는데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꺼져버린 불빛』(1891)을 발표했다. 장교 자녀들을 위한 학교인 유나이티드 서비시스 칼리지에 재학할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891년에는 『학생시집』을 자비로 출판했다. 다음 해 인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함과 동시에 산문, 단편, 시모음집을 발표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그곳에서 뛰어난 명사로 자리매김했고 1889년 영국으로 귀환했다.

1892년 키플링은 미국인 캐롤린 밸러스티어와 결혼하여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미국 버몬트에서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정글북 1』을 집필하고 1894년 출간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정글북2』를 출간했다. 1901년에는 『킴』, 1902년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출간하였다. 1902년부터 키플링은 서식스에서 거주했는데 이때 여행을 하며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을 목도하면서 그곳에 대해 현지 르포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지나친 백인우월주의적 기사로 인해 지독한 주전론자에 폭력 옹호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당대 대중의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시대의 총아이기도 했다.

이는 키플링 자신이 대단히 제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음에도 징병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병역에 면제된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1907년 영미권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41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소장 출혈로 인한 투병중 1936년 사망했다.

스티븐 킹유혹하는 글쓰기에 따르면 그가 부부동반으로 런던 여행을 떠났을 때 비행기 안에서 그의 위대한 걸작 가운데 하나가 될 소설 미저리의 영감을 꿈을 통해 떠올려내고 그 날 밤 자신이 묵던 런던 브라운 호텔에서 (밤에 잠도 안 오고 해서) 수위에게 글을 쓸만한 자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수위는 호텔 2층 층계참에 있던 책상 하나를 내 주었는데 그 책상이 바로 러디어드 키플링이 쓰던 책상이었다고 한다. 킹은 그 테이블에서 16페이지 정도를 쓰고 나서 수위에게 자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수위가 킹에게 "사실은 키플링이 거기서 죽었답니다. 뇌졸중이었지요. 글을 쓰다가."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고, 킹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뻔한 것을 괜히 알게 되는 경우가 세상에 왜 이렇게 많냐고 느꼈다. 위에 나오듯 키플링은 소장 출혈로 죽었으니 수위가 잘못된 일화를 알려준 것이라 별 걱정 안해도 됐겠지만, 스티븐 킹 또한 키플링의 사후를 모르니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2.1. 아들 잭의 전사(戰死)

키플링은 본인이 군 입대에 실패한 한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풀었다. 원래 키플링의 아들 잭[1]은 해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시력검사에서 떨어졌고, 이후 육군 장교에 지원했지만 역시 시력검사에서 떨어진다. 잭 키플링의 시력이 원체 안 좋았던지라, 후술하듯 1915년 9월 전사할 때도 포탄 착탄 충격에 안경을 떨어뜨려 땅 위를 기어다니다가 죽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예 포탄 파편에 얻어맞고 눈이 멀어서 허우적대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키플링은 군대의 인맥을 이용해 아들을 '근위 보병 제4연대' 장교로 입대시켰다. 아예 영국군 총사령관인 허버트 키치너 사령관에게 요청을 해서 성사시켰다. 하지만 아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9월 27일,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만다.

아들이 전사하고 나자, 키플링은 수뇌부들의 욕심과 무능 때문에 희생당하는 건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이라는 내용의 반전시를 쓰기 시작했다. 전후 출간된 시집 <전쟁의 묘비명들(Epitaphs of War)>을 보면 참전용사들의 용맹함을 그리는 시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당시 키플링의 가정사를 반영하듯 중간중간에 반전시들이 끼어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Common Form"에서는 대놓고 우리가 왜 죽었냐 묻거든 우리 아버지들에게 속아서 죽었다 전하시오라는 구절까지 나온다. 외아들이 사망하면서 그의 후반기 작품은 상당히 시니컬하고 내면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키플링 본인도 제국 전쟁묘지 위원회(Imperial War Graves Commission)에 참여했다. 현재 영연방권 전쟁묘지의 무명용사 기념비에 흔히 적혀있는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다(집회서 44:14)"는 문구를 고른 사람이 바로 키플링이다.

키플링이 편법을 쓰긴 했지만 안 가겠다는 아들을 어거지로 집어넣은 건 아니다. 아들 잭 역시 입대를 강하게 희망했다. 이 때는 대영제국의 남자로서 입대 못하는게 치욕이었던 시절이었고, 이 때문에 영국 중상류층 남성들이 장교로 갔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 이야기를 다룬 연극인 'My Boy Jack'(내 아들 잭)이 1997년에 개막했으며, 이 작품은 2007년에 영화화되었다. # 러디어드 키플링 역에는 데이비드 헤이그, 그리고 아들 잭 역에는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캐스팅되었다.

2.2. 전후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개과천선했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극우 보수 성향을 유지했으며, 세계 1차대전 이후의 세계가 영-불-미 동맹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국제연맹을 지지했다[2]. 또한 극우 인사들과 함께 "자유연맹"이라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치 클럽을 만들기도 했고, 램지 맥도널드의 노동당 정부를 "총탄 없는 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하기도 했다. 다만 파시즘 자체에는 반대해서 오스왈드 모슬리와는 선을 그었다.

3. 논란

인종차별적이라는 점이 현재에 논란이 되다보니 터부시되는 점도 있다. 명백하게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마크 트웨인의 걸작 허클베리 핀조차 그때는 인종차별 폄칭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니그로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고 교과서에서 빠지는 판인데[3], 키플링은 오죽하겠는가. 백인의 의무란 말을 만든 사람이 바로 키플링 본인이다. 참고로 마크 트웨인과 키플링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았다.[4] 키플링의 작품 중 인종차별 요소가 들어가는 작품은 기실 그렇게 많진 않음에도 이거 때문에 작가의 문학까지 완전히 낙인이 찍혔다. 평생 400여 편의 단편을 발표하였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서머싯 몸 등 당대의 대작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던 20세기 영국 최고의 단편소설가이자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국내에선 정글북 이외의 작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파일:external/allmults.org/3159.jpg
그의 소설 하얀 물개는 1975년 미국에서 애니화했는데(80년대 중반에 MBC에서도 더빙 방영했다) 말 그대로 물개 무리에서 태어난 알비노 흰 물개가 구세주가 되어 물개 무리를 (털가죽 때문에) 자신들을 노리는 사람이 못 오는 미지의 낙원으로 데려가서 두고두고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주인공 흰 물개는 백인을 상징하기에 현대 와서는 백인을 숭배하는 백인우월주의 동화라고 까임새도 많이 받는다. 참고로 애니 감독은 루니툰으로 유명했던 척 존스(1912~2002).


그나마 정글북 외에 20세기 후반에 알려진 작품 중 하나가 '왕이 되려던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 이다.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 퇴역 부사관 2명이 히말라야 오지의 원주민들을 속여 재물을 갈취하려고 갔다가 오지 속 작은 왕국에서 그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으로 오해하고 왕으로 받들어 모시지만 결국 정체를 들켜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5] 1975년 존 휴스턴 감독, 숀 코너리, 마이클 케인, 크리스토퍼 플러머 주연, 모리스 자르 음악으로 영화화되었다. 평은 나쁘지 않았으나 흥행은 실패했고 마이클 케인은 극중 가이드 빌리로 나온 인도계 영국 배우 새드 제프리 (Saeed Jaffrey,1929~2015)가 온갖 차별을 당했다면서 비난하여 논란이 되는 일도 있었다. 배급은 콜럼비아 픽처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 숀 코너리의 정체가 탄로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숀 코너리의 신붓감으로 나온 여배우 샤키라 바크시는 마이클 케인의 실제 아내이다.

한국에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제목으로 1984년 1월 3일 KBS1 신춘대작시리즈, 1987년 5월 31일 일요특선 세계명화극장으로 KBS3(EBS), 1989년 7월 15일 주말의 명화에서 더빙되어 TV 방영되었다.

4. 주요 작품 목록

소설

5. 기타

  • 소설 1984에서 시인 앰플퍼스는 키플링의 시집을 신어 결정판으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가했으나, McAndrew's Hymn에서 God을 대체할 단어를 찾지 못한 죄로 애정부에 잡혀온다.[6] 그리고는 먼저 애정부에 온 윈스턴에게 이 사실을 말한 뒤, 뭐가 뭔지도 모른 채로 특별 고문실/사형실인 101호실로 직행한다.
  • 28년 후의 티저 트레일러에서 그의 시 Boots가 쓰였다. 트레일러 안에서 광증에 빠진 좀비들과 기묘한 형태의 생존자 집단의 활동이 겹치면서 공포를 자아낸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영국이 독자 세력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국가 정신인 '영국 스토아 학파'에 키플링의 시 '만약에'가 실렸다.
  • 백남준의 1986년작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바이 바이 키플링>은 위에 나온 키플링의 영일동맹 헌정시 첫 구절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을지니'를 반박하는 의미로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본명은 존 키플링(John Kipling). 은 존의 애칭이다.[2] 영국, 미국은 둘째치고 프랑스는 왜 끼어들었냐면, 키플링이 프랑스 문화 애호가였기 때문이다.[3] 물론 이에 대해서는 비판도 상당하다. 문제의 '니그로'라는 표현은 의외로 1970년대까지는 중립적인 표현이나 존칭으로 간주되어, 그 본인이 미국 흑인 출신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에도 이 표현이 버젓이 나오고 있으며, 아예 이 시기까지는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을 니그로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게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은 이 말에서 파생된 멸칭인 '니거'(nigger)가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따라서 마크 트웨인이 이 표현을 썼을 때는 딱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아니었으므로, 이걸 삭제시킨다고 하자 이에 대해 비난하는 여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4] 애시당초 마크 트웨인은 인종차별을 반대한 진보적 성향의 작가고 러디어드 키플링은 그 반대로 제국주의자에 보수주의자였으니 성향상으로 맞기가 힘들었을 것이다.[5] 두 주인공 중 마이클 케인은 재물만 얻고 빨리 인도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왕으로 받들어진 숀 코너리가 계속 왕으로 군림하려다가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6] Lord, Thou hast made this world below the shadow of a dream, / An', taught by time, I tak' it so / exceptin' always Steam. / From coupler-flange to spindle-guide I see Thy Hand, O God / Predestination in the stride o' yon connectin'-rod(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