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성기였던 1988년 사진 왼쪽부터 저프 테이트, 에디 잭슨, 크리스 디가모, 스캇 로큰필드, 마이클 윌튼 |
퀸즈라이크는 1981년 미국 워싱턴 주 벨뷰에서 결성된 프로그레시브 메탈(파워 메탈) 록밴드이다. 세계적으로 2000만장 이상, 미국내에서 6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밴드로서, 프로그래시브 메탈의 전성기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밴드이다.[1]
2. 상세
동 시대를 10년 이상 앞서간 밴드로 불리곤 했으며, 언제나 평단의 대호평을 받아왔고, 팬들에게도 한 차원 높은 밴드, 그리고 다른 밴드에게서도 뭔가 격이 다른 느낌을 주는 경외감을 불러오는 존재였다. 드림시어터 역시 그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라면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밴드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프로그레시브 메탈이라는 장르의 스타일 확립에 기여했다. 실험적이고 난이도 높은 연주 스타일, 악기들이 각자 특색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플레이[2], 엄청난 표현력을 바탕으로 고음역과 중저음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풀어나가는 보컬까지, 드림시어터를 비롯한 후대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확고한 선구자가 되어주었다.밴드명의 원어 발음은 퀸"즈"라이크에 가까우나, 한국에서는 주로 퀸스라이크라고 부른다. 밴드명의 y자 위에 움라우트가 있는데, 그냥 멋으로 찍은 것일 뿐[3], 그냥 y발음으로 읽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름때문에 그들은 밴드명을 바꾸고 나서도 십여년 동안 이름을 읽는 방법을 설명하고 다녀야 했다고.
3. 역사
3.1. 결성과 초기 활동
기타리스트 마이클 윌튼(Michael Wilton)은 드러머 스캇 로큰필드(Scott Rockenfield)와 함께 1980년,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카피 밴드였던 크로스플러스파이어(Cross+Fire)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1년, 밴드를 재정비하면서 윌튼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기타리스트 크리스 디가모(Chris DeGarmo)와 대학시절 친구인 베이시스트 에디 잭슨(Eddie Jackson)를 멤버로 받아들이고 밴드명을 더 몹(The Mob)으로 바꾼다.더 몹에는 보컬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음악에 맞는 보컬리스트를 찾던 중 워싱턴 주 지역 록 페스티벌에 출연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더 바빌론(The Babylon)의 보컬리스트인 저프 테이트(Geoff Tate)를 보고 점찍어 뒀다가, 나중에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기용한다. Geoff는 발음상 jeff와 차이가 없지만 철자때문인지 한글 표기가 다르게 정착된 케이스로 이하 저프 테이트로 기술한다.
이후 바빌론이 해체된 뒤, 더 몹에서는 테이트와 함께 몇 번의 공연을 한 뒤 그를 정식 영입하려 하였으나, 그는 프로그레시브 록이 아닌 (정통)헤비메탈에는 관심이 없어서 거절한다. 1981년, 더 몹은 "Queen of the Reich" 등의 여러 가지 데모를 녹음하여 음반사를 찾아가나 모두 탈락하고 만다. 테이트는 당시 미스(Myth)라는 밴드에 몸담고 있었다.[4]
밴드는 새 매니저를 맞이하고, 그의 주장에 따라 밴드명을 더 몹에서 퀸즈라이크(Queensrÿche)로 바꾸는데, 이는 그들의 첫 싱글인 "Queen of the Reich(제국의 여왕)"를 줄인 것이다. 그들이 녹음한 데모는 록 전문 잡지인 Kerrang!에 소개되고 관심을 얻게 되어, 데모 음원을 모아서 자체 레이블에서 EP로 출시한다. 이 EP는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저프 테이트는 미스를 떠나 그들과 합류하는 데 동의하게 된다.[5] 1984년 그들은 EMI와 계약을 체결하고, 그들이 자체 레이블에서 발매한 EP를 재발매하고 그 앨범은 빌보드 메인스트림 락 차트에서 81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둔다. 그들 최초의 히트곡인 Lady wore black이 이 EP에 수록 되어있다.EP 투어를 마치고, 밴드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핑크 플로이드와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작업했던 프로듀서 제임스 거스리(James Guthrie)와 함께 앨범 녹음을 시작한다. 1984년 9월 발표된 그들의 데뷔 앨범 The Warning은 그들의 이전의 EP에 비해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경향이 매우 강한 작품이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61위까지 오르며 상당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은 화이트칼라 US 파워 메탈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올드스쿨 파워 메탈 리스너들은 이들 앨범 가운데 가장 작품성있는 앨범으로 평가한다. 1986년에는 Rage for Order라는 앨범을 발매하고, 여기서 그들은 키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프로그레시브 메탈과 팝 메탈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더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3.2. 성공
1988년, 프로그레시브 메탈 사상 최대 명반 중 하나인 Operation: Mindcrime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컨셉트 앨범으로서, 발매 직후에 평단으로부터의 엄청난 극찬과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이후 이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드림 시어터의 Metropolis Pt. 2: Scenes from a Memory, 그리고 더 후의 Tommy와 함께 최고의 컨셉트 앨범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앨범 발표 후 1989년까지 데프 레파드,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등 쟁쟁한 밴드들과 함께 투어를 돈다.1990년에는 퀸즈라이크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준 앨범인 Empire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7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앨범의 수록곡인 "Silent Lucidity"는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발라드인데, 빌보드 핫 100에서 9위, 메인스트림 락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퀸즈라이크 최초의 빌보드 Top 10싱글이 된다. 이 앨범 한장에서만 6장의 싱글이 커트되었으며, 그 중 3곡이 빌보드 메인스트림 락 싱글차트에서 10위 안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둔다.
앨범의 성공과 동시에 퀸즈라이크는 "Building Empire" 투어를 시작한다. 밴드는 그 투어에서 Operation: Mindcrime의 전곡과 Empire의 곡들을 연주하여, 이는 18개월 동안 이어진다. 이 기록은 밴드 투어 역사상 가장 긴 투어로 기록되어 있다. 투어 도중에, 그들은 MTV 언플러그드에도 출연하기도 한다.
1994년 10월에는 Promised Land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은 멀티 패키지로, 동명의 인터렉티브 게임을 포함하여 판매되었다. 이 앨범은 등장하고 나서 빌보드 앨범차트 3위에 오르고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3.3. 새로운 시도 혹은 변절
이후 밴드의 고향인 시애틀과 벨뷰를 기반으로 하는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등의 그런지/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등장하여 Promised Land 앨범 발매 이후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헤비메탈과 하드 록 역시도 전체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1997년 Hear in the New Frontier 앨범은 당시 유행했던 그런지 장르를 받아들인 작품으로 그들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앨범은 퀸즈라이크의 기존 팬들에게 완전히 외면을 받는다.[6]
결국 앨범을 발매하고 얼마 안돼서 밴드의 창립 멤버이자 퀸즈라이크가 상업적, 음악적 성공을 거둔 거의 모든 곡을 만든 크리스 디가모가 음악적 견해차 등을 이유로 밴드를 떠난다.
또한 프록메탈을 변절했다는 이유로 한 때 드림 시어터 멤버들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한번은 DT 투어 때 퀸즈라이크가 참여를 했는데, 한 성질 하는 테이트와
3.4. 이후 활동
이 실패를 돌이키기 위해,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영입하고 1999년 프로그레시브적 사운드를 강화한 앨범 Q2K를 발표하지만 이미 등을 돌려버린 팬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이후 밴드의 사운드는 더욱 강한 실험성을 띠게 된다.2006년 발표한 Operation: Mindcrime앨범의 후속작 Mindcrime II 앨범에는 로니 제임스 디오가 보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2012년 5월, 멤버들과 주도권 다툼 및 칼부림 난동, 저프 테이트의 마이클 윌튼과 스캇 락큰필드에 대한 공격 등으로 갈등을 빚다 못해 막장까지 간 상황에서 결국 보컬 저프 테이트가 해고되였다. 이로써 Empire 시절의 주축이었으며 퀸즈라이크 사운드의 두 축이던 크리스 드가모와 저프 테이트 두 명 모두 탈퇴하게 되었다. 밴드는 마이클 윌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새 보컬로 미국의 중견 프로그레시브 메탈/파워 메탈 밴드인 크림슨 글로리에서 활동했던 토드 라 토레를 영입하여 '라이징 웨스트(Rising West)'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정식 보컬로 영입하였다.
탈퇴한 저프 테이트는 솔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가 본인을 중심으로 퀸즈라이크를 결성하게 된다. 결국 마이클 측과 저프 양 측이 따로따로 퀸즈라이크 밴드를 운영하게 된다. 양측은 서로를 인정하지않으며 자기만이 진정한 퀸즈라이크라고 우기는 중. 미묘하게 핑크 플로이드의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의 상황을 보는 듯 하다(...).
2014년 결국 마이클 윌튼의 퀸즈라이크가 밴드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저프 테이트의 밴드는 퀸즈라이크의 명반 제목이기도 한 Operation:Mindcrime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고 있다.
4. 멤버
- 에디 잭슨(Eddie Jackson) – 베이스 기타, 백 보컬 (1981– )
- 파커 룬드그렌(Parker Lundgren) –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백 보컬 (2009– ), 가입 이전에도 저프 테이트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퀸즈라이크에 가입했다. 여담이지만 저프의 양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 토드 라 토레(Todd La Torre) - 보컬 (2012 - ), 크림슨 글로리 출신.
4.1. Operation:Mindcrime 멤버
- 저프 테이트(Geoff Tate) – 보컬, 키보드, 색소폰 (1981– ) - 불세출의 슈퍼 보컬. 국내는 퀸즈라이크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7] 언급이 뜸한 편이지만 외국에선 거의 롭 핼포드, 로니 제임스 디오급의 본좌 레벨로 취급받는다. 실제로 모 평론가는 락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보컬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켈리 그레이(Kelly Gray)[8] –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백 보컬 (1998–2001, 2012-) - 저프 테이트가 새로운 밴드의 발족을 선언하면서 기타리스트로 가입.
- 랜디 게인(Randy Gane) - 키보드 (2012-)
- 로버트 사르조(Robert Sarzo) - 기타 (2013-) - 루디 사르조의 동생이다.
- 사이먼 라이트(Simon Wright) - 드럼 (2013-)
4.2. 전 멤버
- 크리스 디가모(Chris "The Legend" DeGarmo) –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백 보컬 (1981–1998, 2003, 2007) - 퀸즈라이크 전성기의 리드 기타리스트이자 뛰어난 작곡가로서 퀸즈라이크의 대부분의 명곡은 이 사람 손에서 나왔다.[9] 하지만 1998년 음악적 견해차로 탈퇴 후 간혹 앨범 작업이나 공연 때 게스트로 참여하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국 그는 아예 음악계를 떠나 비행기 기장으로 전업하기도 했다. 그래도 전성기 시절 실력은 어디 안 가서 오랜 시간 후에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는데, 2009년 딸 라일리가 The Rue라는 이름으로 데뷔할 때부터 작곡가로서 도움을 많이 줬고, 현재는 앨리스 인 체인스의 제리 캔트렐과 자주 같이 활동하고 있다.
5. 디스코그래피
Queensrÿche (EP, 1982, 1983[10])The Warning (1984)
Rage for Order (1986)
Operation: Mindcrime (1988)
Empire (1990)
Promised Land (1994)
Hear in the Now Frontier (1997)
Q2K (1999)
Tribe (2003)
Operation: Mindcrime II (2006)
Take Cover (2007)
American Soldier (2009)
Dedicated to Chaos (2011)
Queensrÿche (2013)
Condition Hüman (2015)
The Verdict (2019)
Digital Noise Alliance (2022)
※ 저프 테이트의 퀸스라이크 (현재 밴드명 Operation: Mindcrime)
Frequency Unknown (2013)
The Key (2015)
6. 대표곡
1988년 발매 싱글 "Eyes of a Stranger", 밴드의 최대 명곡 중 하나로 꼽힌다.[11]
1991년 발매 싱글 "Silent Lucidity". 밴드의 최대 히트곡이다.
[1] 물론 아래의 "변절" 사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드림 씨어터에 프로그래시브 메탈의 대명사 위치를 넘겨주긴 했지만...[2] 크리스 디가모와 마이크 윌튼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그 둘이 만들어내는 유니즌 사운드는 어떠한 밴드들이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플레잉을 보여준다.[3] 이런 밴드가 종종 있었다. 블루 오이스터 컬트라든지 모터헤드라든지 머틀리 크루라든지. 참고로 움라우트의 기원인 독일어 정서법에서는 ä, ö, ü에만 위에 두 점이 붙을 수 있고, y 위에 붙은 두 점은 움라우트라 하지 않는다.[4] 이후 크리스 디가모가 탈퇴한 뒤 2001년까지 기타를 맡았던 켈리 그레이(Kelly Gray)는 이 밴드 출신이다.[5] 그들의 앨범에서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이전의 단순한 헤비메탈 밴드라는 편견을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6] 메탈리카의 Load 앨범이나 메가데스의 Risk 앨범을 생각하면 된다... 상업적 실패의 측면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할지도?[7] 물론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은 밴드가 한둘이 아니지만. 밴 헤일런이나 머틀리 크루도 미국에서는 본좌급이나 한국에서는 듣보잡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8] 저프가 이전에 소속되어있던 밴드 더 미스의 멤버[9] 1982년 이후부터 그의 탈퇴 이전까지 크리스 탈퇴전까지 작곡 지분의 거의 70%를 넘어갈 정도로 정말 사운드의 핵심이었다.[10] EMI 재발매. 메이저 데뷔 EP이기도 하다.[11] 이 뮤비 말고도 1991년 라이브에 맞춰 제작된 애니메이션 버전의 뮤비가 있는데, 여기서는 1980년대 한국의 시위 장면도 몇 컷 들어가 있다. 이를테면 서울역 시위장면이라든지, 화염병 투척이라든지, 불타는 성조기라든지, 대학 교내 노천극장에서의 궐기대회라든지. Eyes of a Stranger뿐만 아니라 Revolution Calling 뮤비에도 이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