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8 21:56:08

발레리 게르기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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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발레리 게르기예프
Валерий Гергиев | Valery Gergiev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Gergiev_klarafestival_Brussels_2007.jpg
본명 Валерий Абисалович Гергиев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출생 1953년 5월 2일 ([age(1953-05-02)]세)
소련 러시아SFSR 모스크바
직업 지휘자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러시아의 지휘자. 1988년부터 현재까지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을 30년 넘게 지내고 있으며, 중간에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등을 맡은 바 있고, 2015년에 뮌헨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의 예술감독도 맡고 있다.

젊은 시절 사이먼 래틀, 정명훈과 더불어 일본잡지 '음악의 벗'에 세계를 이끌어갈 젊은 유망주 지휘자 3인에 꼽혔다.

보통은 손으로 지휘를 하지만 이쑤시개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쑤시개를 지휘봉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손이 심심할 때 이쑤시개를 들고 지휘한다는 말도 있다.

2. 생애

1953년 5월 2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부모 양친 모두 오세트인 혈통이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그는 일반적인 슬라브계 러시아인들과 달리 이목구비가 강하고 짙은 머리[1]에 턱수염이 잘 발달하는 등 중동인과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2]

어린 시절 부모의 고향인 북오세티야블라디캅카스에서 자랐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78년 키로프 오페라(현 마린스키 오페라)에서 유리 테미르카노프 밑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로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아르메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1988년 마린스키 극장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마린스키 극장에 취임한 후 세계적 음반사인 PHILIPS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되었다. 당시까지 그는 국제 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지만 PHILIPS는 그를 자사의 차세대 주자로 낙점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게르기예프를 위해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때마침 당시 클래식 음악계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잇따라 타계하며 카리스마적인 거장이 부재하는 시기가 도래했는데, 이는 젊은 신예 게르기예프가 단기간에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는 탈모가 진행되지 않아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얼굴을 표지 전면에 내세운 그의 음반들은 클래식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필립스의 전폭적인 마케팅에 힘잆어 곧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90년대에는 음반계가 침체에 빠져 들며, 신예 지휘자들이 음반 녹음을 취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게르기예프는 왕성한 녹음을 남겼다. 후발 음반사였던 필립스는 러시아쪽 디스코그라피가 상당히 빈약했는데, 이런 필립스사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게르기예프는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 보로딘, 무소로그스키, 하차투리안 등 방대한 러시아 레퍼토리를 지속적으로 녹음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90년대 서유럽 클래식 팬들에게 러시아 음악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원래부터 연주 빈도가 높았던 차이코프스키 외에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연주 수요가 크게 증가했는데, 이때 서방의 이 니치마켓에 올라탔던 이가 바로 게르기예프였다. 90년대 차세대 러시아 지휘자로 게르기예프보다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더 각광받았었지만 플레트네프는 보수적인 레퍼토리를 선호하면서 경쟁력을 잃어갔지만, 게르기예프는 상반된 노선을 탔고 그 결과 2000년대 이후 플레트네프와 게르기예프의 인지도와 위상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1991년에는 뮌헨에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지휘했다. 그의 첫 서유럽 오페라 극단 지휘였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의 첫 공연을 가졌는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과 함께 '전쟁과 평화'를 지휘했다. 또한 많은 수의 음악 축제에도 참여했는데, 그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가 있다.

1988년 객원 지휘자로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첫 공연을 가졌다. 이후 2004년 두번째로 런던 심포니를 지휘할 수 있었는데,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을 지휘했다. 2005년 콜린 데이비스의 뒤를 이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열다섯번째 수석지휘자로 지명되어, 2007년부터 8년간의 임기를 수행한 후 악단을 떠났다.

2015년 로린 마젤의 뒤를 이어 뮌헨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에 취임했다. 2016년 5월에는 ISIS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Praying for Palmyra'라는 공연에 참가했다.

고향인 러시아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강한 캅카스 지역, 그중에서도 북오세티야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둘러싼 정치적, 군사적 무력 충돌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해 왔다. 정치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친구로서, 2013년 푸틴이 부활시킨 러시아 노동 영웅상을 받았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지지했다. 이러한 전력 탓에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계기로 게르기예프를 배제 및 퇴출하는 움직임이 커진 상태이다.# 뮌헨 시장 디터 라이터는 뮌헨의 자매 도시 키이우[3]가 겪는 비극을 좌시할 수 없다며 게르기예프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2월 28일 월요일까지 응답이 없을 경우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대해 무반응하자 계약은 3월 1일자로 결국 해지되었다. 마찬가지로 바덴바덴 시의 페스티벌극장 또한 같은 절차를 거쳐 3월 1일자로 관계를 끊었고, 매니저였던 마르쿠스 펠스너도 일을 그만두고 그를 떠났다. 네덜란드스위스에서도 여러 페스티벌과 오케스트라단에서 비슷한 사례가 이어졌다.


[1] 20대 시절까지는 흑발에 가까웠다.[2] 동슬라브인, 특히 러시아인들은 추운 지방에서의 적응, 그리고 타타르인 등 아시아계 유목민들과의 부분 혼혈 등으로 서유럽인, 남유럽인보다 이목구비가 작은 특징이 있다.[3] 키예프와 뮌헨은 1989년 자매 도시 결연을 맺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