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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카레라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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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2. 1970년대3. 1980년대4. 1990년대 이후

1. 어린 시절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탈루냐인이다.[1] 이런 연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고 본인이 주제가인 '아미고스 빠라 씨엠쁘레(Amigos Para Siempre)'를 직접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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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카레라스

카레라스의 어린 시절 내용 중에서 이런 일화가 전해지는데, 카레라스는 꼬맹이 시절부터 타고난 영재로 손꼽혔고, 여덟 살 때는 지방방송에 출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때, 방송 출연한 꼬맹이 카레라스가 엄청난 노래를 불러서 방송을 보고있던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바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을 어린 나이에 열창했다는 것. 이것은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카레라스의 어린 시절을 언급할 때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카레라스가 꼬맹이 시절에 시청자들 앞에서 "여자의 마음"을 불렀다는 그 증거 영상. 6분 34초쯤에 나온다.


2. 1970년대

커리어 초기인 1970년대 초중반에는 동향 출신의 선배이자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몽셰라 카바예의 상대역으로 단골로 출연하며 토스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투란도트, 운명의 힘 등의 음반을 녹음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카레라스가 3테너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면서 잊혀진 사실이지만, 카레라스는 카라얀에 의해 발굴되고 육성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카레라스의 인지도가 국제적으로는 무명이던 시절인 1976년 카라얀이 처음 발굴하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시킨 후 카라얀이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공연과 녹음에 카레라스를 기용했다. 성악가를 고르는 기준이 다소 독특했던 카라얀은 이전에도 다소 특이한 성악가들과 주로 작업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바그너 오페라에서 당대 최고의 헬덴 테너들과 바그너 소프라노들을 외면하고 헬게 브릴리요트, 존 비커스, 헬가 데르네슈 등 다소 생소한 성악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카라얀의 이러한 선택은 득과 실이 있었는데, 최소한 바그너 음악 쪽에서는 실이 많았던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카라얀 본인 역시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실황 무대에서는 자신이 녹음에서 선택한 가수들이 아니라 기존의 유명한 비르기트 닐손, 제스 토마스 등을 캐스팅해서 공연하곤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 쪽에서도 카라얀은 대중들에게 다소 호불호가 강한 존 비커스를 중용하여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녹음했다. 하지만 비커스의 목소리와 발성, 딕션이 워낙 호불호가 있었고 비커스도 약간 하락세에 들어서면서 카라얀은 다른 테너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0년대 중반 카라얀은 루치아노 파바로티(라 보엠, 나비부인), 플라시도 도밍고(나비부인 영상물), 프랑코 보니솔리(일 트로바토레) 등 몇몇 테너들과 함께 작업했으나 모두 1, 2회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6년 카레라스를 알게 된 카라얀은 이후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 오페라 분야의 거의 모든 음반 녹음과 공연을 카레라스와 함께 했다. 카레라스는 197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르디의 돈 카를로의 타이틀을 맡게 되었다. 당시 연주를 맡았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중견 단원의 회고에 따르면 1975년 당시 빈 국립 가극장도 섭외가 쉽지 않았던 플라시도 도밍고를 카라얀이 데려와 돈 카를로의 놀라운 공연을 지휘하여 놀라게 했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무명 테너를 한 명 데려와 같은 작품을 공연해서 놀라게 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카레라스는 카라얀의 남자로서 1976년 이후 카라얀이 녹음한 음반 아이다, 토스카, 돈 카를로, 카르멘, 베르디 레퀴엠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영상물로 남겼다.

3. 1980년대

카라얀의 음반에 주연을 도맡으며 단번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은 카레라스는 80년대 이후 세계 유명 오페라 하우스에 단골로 출연하게 되었으며, 아직 탈모가 오기 전 젊은 시절의 빼어난 외모로 인해 영상물에도 자주 출연하기 시작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 카레라스는 정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데,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생사를 오가는 투병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고 무대에 복귀할 수 있게 된다. 복귀 이후에 급속도로 기량이 쇠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샀지만, 1988년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여 백혈병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수많은 자선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사회공헌에 전념하고 있다. 다만,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백혈병 치료를 도우면서 좋아졌다"는 설이 많이 돌고 있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친했다고 한다.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유명한 다음의 이야기가 적혀 있으니 참고할 것. #
카탈루냐 출신인 카레라스와 카스티야 출신인 플라시도 도밍고지역감정 그리고 엘 클라시코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백혈병 투병을 하게 된 카레라스는 계속된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에르모사 백혈병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료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완치판정을 받은 카레라스는 에르모사 재단에 감사를 표하는 마음으로 후원회원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는데, 알고보니 에르모사 재단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설립한 재단이며, 설립한 취지가 호세 카레라스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라이벌인 카레라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익명으로 처리했던 것.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그 이후로 둘은 절친이 된다. 카레라스가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그 재단의 홈페이지에서는 이 일화가 거짓임을 공지하고 있다고 하나, 워낙 전세계적으로 퍼져버린 루머(?)이다보니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서프라이즈"에서 방송을 탄 이후, 기정사실로 알려져 버렸다. 이와는 별개로, 절친한 또 다른 불세출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투병 당시,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격려했다고 전한다, "힘내요. 당신이 쓰러지면 나는 누구와 경쟁한단 말이오."

4. 1990년대 이후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는 예술로 세계 개선에 기여한 공으로 다보스 크리스탈 어워드를 수상했다. 수상 후 파씨오네(열정)으로 화답해주었다.


5분 41초부터 수상자 소개. 7분 33초 호세 카레라스 수상 소감. 12분 52초부터 공연.


[1] 카탈루냐어로는 주제프 카레라스(Josep Carreras)라고 부르는게 맞다. 허나, 카레라스가 태어난 시기의 스페인은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분리주의 운동이 거셌던 지역을 억압했던 프랑코의 철권통치 기간이었고, 카레라스가 그 시기에 태어난 탓에 카탈루냐어 본명보다 스페인어(=카스티야어)로 된 '호세 카레라스'로 많이 불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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