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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포시 (파자마 게임) | → | 밥 포시 (댐 양키즈) | → | 마이클 키드 (라일 애브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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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로빈스 (지붕위의 바이올린) | → | 밥 포시 (스위트 채리티) | → | 론 필드 (카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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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베넷 (팔리즈) | → | 밥 포시 (피핀) | → | 마이클 베넷 (시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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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1985년) | → | 제40회 (1986년) | → | 제41회 (1987년) |
수상자 없음 | → | 밥 포시 (빅 딜) | → | 질리언 그레고리 (미 앤 마이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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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24B48><colcolor=#fff> 밥 포시 Bob Fosse | |
이름 | 로버트 루이스 포시 Robert Louis Fosse |
출생 | 1927년 6월 23일 |
일리노이 주 시카고 | |
사망 | 1987년 9월 23일 (향년 60세) |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댄서, 안무가, 배우, 영화감독, 각본가 |
활동 | 1947년 – 1987년 |
신체 | 173cm |
배우자 | 메리 앤 나일스(1947년 결혼 ~ 1951년 이혼) 조앤 맥크라켄(1952년 결혼 ~ 1959년 이혼) 그웬 버든(1960년 결혼) |
자녀 | 딸 니콜 포시(1963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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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ive like you'll die tomorrow, work like you don't need the money, and dance like nobody's watching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돈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일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을 춰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돈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일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을 춰라.
미국의 댄서, 안무가, 배우, 영화감독, 각본가, 뮤지컬 연출가.
독특한 스타일의 춤으로 뮤지컬과 댄스계에 혁명을 일으킨 안무가다. 또한 영화 감독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뮤지컬 영화의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2. 생애
밥 포시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
감독 겸 안무가인 밥 포시는 20세기 후반에 무대와 영화 산업에서 춤을 보는 전 세계 관객들의 시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환상적이고, 강렬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진력이 있는, 포시는 항상 자극적이고, 재미있고, 이전에 본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른 작품을 한 예술가였다. 그의 춤은 성적이고, 육체적으로 가장 훈련된 댄서들에게도 요구되었고, 유쾌한 유머와 암울한 냉소주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영화들을 통해 그는 스크린에서의 춤의 표현에 혁명을 일으켰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춤을 보여주며, 뮤직 비디오 댄스의 MTV 시대의 부상을 예고하며, 영화와 비디오 감독의 전 세대를 위한 길을 닦았다.
― PBS #
― PBS #
2.1. 어린 시절 ~ 안무가 활동
1927년 6월 23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보드빌 배우인 노르웨이인 아버지 사이 포시(Cy Fosse)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새디 포시(Sadie Fosse) 사이에서 6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밥 포시는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병약했는데, 천식과 뇌전증을 모두 앓고 있었다. 연약했던 포시는 춤이라는 흥미로운 취미를 발견했다. 포시의 아버지는 연극 무대를 떠돌기도 하고 나이트클럽의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포시에게는 이런 가정 환경이 자연스럽게 각종 춤을 배우며 자라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그의 최고 우상은 프레드 아스테어였다. 8살 때 시카고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서 프레데릭 위버(Frederick Weaver)의 지도하에 무용수로 훈련을 시작했으며, 13살에 전문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포시는 고등학교 시절, 시카고 불레스크 씬의 유명 댄서였다. 또 다른 젊은 퍼포머 찰스 그래스와 팀을 이룬 후, '리프 브라더스(The Riff Brothers)'라는 팀명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미국 해군에 입대했고, 연예 부대에 배치되었다. 1947년 제대 후, 브로드웨이 댄서로서의 직업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첫 번째 부인 메리 앤 나일스(Mary Ann Niles)와 함께 뮤지컬과 '유어 히트 퍼레이드'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팀을 이루어 춤을 췄다. 또 당시 아메리칸 시어터 윙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몇 차례의 전국 투어에 참가한 후, 1950년 뮤지컬 '댄스 미 어 송(Dance Me a Song)'의 코러스로 참여해 브로드웨이 데뷔를 했다. 1952-53년에 포시는 '팰 조이(Pal Joey)'의 타이틀 롤의 임시 대역을 맡았다. 1953년에는 MGM과 계약을 맺어, 영화계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이 해에 뮤지컬 영화 '어페어 오브 도비 길리스', '키스 미 케이트', '기브 어 걸 어 브레이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뛰어난 댄스 실력을 보여줘서, 당대 브로드웨이의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듀서들 중 한 명인 조지 애보트(George Abbott)와 제롬 로빈스(Jerome Robbins)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54년, 조지 애보트와 제롬 로빈스가 연출한 뮤지컬 '파자마 게임'의 안무를 담당했다. 이 작품은 포시가 모든 안무를 창작한 첫 번째 뮤지컬이었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재즈, 맘보와 같은 대중적인 춤, 그리고 엉덩이를 찌르는 것과 같은 작지만 정확한 기계적인 제스처, 에로티시즘과 같은 독특하고 선정적인 안무 스타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포시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무용수들에게 검은색 옷을 입히고 하얀 장갑과 더비복을 입혔다. 또 어린 시절 배운 보드빌의 모든 기술을 통합했다. 이 작품으로 포시는 첫 번째 토니상 안무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댄스 넘버는 ‘스팀 히트’(Steam Heat)인데, 애보트와 로빈스는 포시에게 ”회사 직원들끼리 연습해서 장기자랑 하는[1] 수준의 소박한 춤“으로 안무해 줄 것을 주문했고 포시는 나름대로 그 요구에 맞춰 안무를 짰다. 허나 완성된 춤을 본 연출자들은 “춤이 너무 정교하잖나!”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로 스팀 히트 춤을 보면 아크로바틱하거나 화려한 동작은 없지만[2] 눈을 사로잡는 세련됨이 있다. 원래는 그냥 중간에 집어넣은 댄스 넘버여야 할 장면이, 작품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면이 되어버린 것.
'스팀 히트‘ 댄스. 세 댄서들 중 누구도 주연이 아니다.
이듬해인 1955년 조지 애보트는 뮤지컬 '댐 양키즈'의 안무가로 포시를 발탁했다. 이 작품으로 두 번째 토니상 안무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가 될 브로드웨이 스타 그웬 버든(Gwen Verdon)을 만나게 됐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큰 성공을 거둔 포시는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안무가로 발탁됐다. '마이 시스터 에일린(1955)', '파자마 게임 극장판(1957)', '댐 양키즈 극장판(1958)'의 안무를 만들었다. 영화에 등장한 Steam Heat, Whatever Lola Wants 같은 춤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인 1959년에는 그웬 버든[3]이 주연을 맡은 뮤지컬 '레드헤드'로 브로드웨이에서 감독 데뷔를 했다. 당시 포시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실현시키고 자신의 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안무가뿐만 아니라 감독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수많은 뮤지컬 히트작들의 안무와 연출을 담당해,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안무가 반열에 올랐다. '리틀 미(1963)', '스위트 채리티(1966)'로 토니상 안무상을 다시 한번 수상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포시는 많은 획기적인 뮤지컬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미국 전역에서 표현되고 있던 성적 자유에 대한 열망을 반영했고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출가 겸 안무가로 승승장구 한 포시는 직접 연출, 각본[A], 안무를 담당한 뮤지컬 '피핀'을 제작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커리어 첫 토니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3년 뒤인 1975년에는 연출, 각본[A], 안무를 담당한 뮤지컬 '시카고'를 공개했다. 밥 포시 특유의 재즈 풍의 안무 스타일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개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포시를 대표하는 뮤지컬이 됐다. 1996년 시작한 리바이벌 공연은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뮤지컬 리바이벌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미국 뮤지컬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 2002년 제작된 영화판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포시의 안무에는 사실 위대함이 숨어 있다. 자신의 결점을 활용해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낸 것이다. 안짱다리였던 그는 발을 바깥쪽으로 돌리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 결점을 이용해 크고 시원시원한 동작들보다는 꾸부정하면서도 소소한 근육들의 움직임을 시각화했다. 또 자신의 콤플렉스였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검은색 모자를 항상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했다. 박자에 맞춰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내기, 어깨 돌리기, 엉덩이 흔들기, 엉덩이를 보이면서 퇴장하기, 점잔빼며 걷는 걸음걸이, 흰 장갑과 한쪽 손만을 쓴 제스처 등이 바로 ‘포시스타일’의 구성물들이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리드미컬하고, 퇴폐적이고 섹시하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동작들로 가득하다."
― [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7)] 끔찍하지만 유쾌하게… 역설적 풍자 빛나는 '시카고'
― [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7)] 끔찍하지만 유쾌하게… 역설적 풍자 빛나는 '시카고'
3년 후인 1978년, '댄싱'으로 토니상 안무상을 수상했으며, 사망하기 1년 전인 1986년에는 '빅 딜'로 마지막 토니상 안무상을 수상했다. 커리어 내내 토니상 안무상을 8차례 수상했는데, 이는 역대 토니상 안무상 최다 수상 기록이다. 포시가 안무를 맡은 뮤지컬들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안무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안무들 중 많은 것들은 관능적인 것들이었고, 특히 의자, 지팡이, 그리고 볼러 모자와 같은 소품들이 자주 등장했다. 그의 특징적인 동작들은 무릎을 구부리고, 어깨를 흔들며, 손가락을 흔드는 "재즈 핸드"로 유명하다. 또 보드빌 쇼의 전통이 강한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재즈 리듬을 도입했고 재즈에서 영감을 얻은 안무로 브로드웨이와 댄스계의 혁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이용하여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춤을 사용하면서 장르의 경계를 폭넓게 넘나들며 독창적이고 모던한 스타일의 안무스타일을 추구했다. 또 그의 무대 메커니즘 기법은 현대 공연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사교댄스인 탱고나 지루박, 차차차 등과 같은 대중적인 춤 형식을 무대 위의 공연 형식으로 새롭게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서커스의 공중 묘기, 판토마임 같은 신체 표현의 확대와 무대 공간을 확장시키는 무대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하였다. #
2.2. 영화 감독 활동
스위트 채리티 (1969) |
1969년 2월 14일, 3년전 직접 연출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위트 채리티'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공개했다.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영화감독 활동을 시작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카비리아의 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개봉과 동시에 평론가들 사이에서 반응이 엇갈렸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길고 극적인 장면들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몇몇 넘버에서 포시 특유의 활기찬 안무를 강조했지만, 많은 장면들이 실험적인 연출로 인해 지루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어느정도 재평가를 하는 분위기도 있다. 또한 2,000만 달러로 만들어져서, 겨우 8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여 박스오피스에서도 엄청난 실패를 기록했다. 그나마 위안거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후보에 올랐고, 주연을 맡은 셜리 맥클레인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두 후보에 그쳤다.
카바레 (1972) |
'스위트 채리티'로 실패를 겪은 밥 포시는 '카바레'라는 작품으로 3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왔다. 존 판 드루텐의 연극 '나는 카메라', 칸더와 엡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카바레', 영국 소설 '굿바이 투 베를린'을 원작으로 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던 1930년대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 뮤지컬 영화다. 라이자 미넬리가 나이트클럽 퍼포머 샐리 역을 맡았으며, 마이클 요크가 영국 작가 브라이언을 연기했다. '카바레'는 포시의 대부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쇼 비즈니스의 어두운 면을 다루었으며, 뮤지컬 특유의 가볍고 낭만적인 스토리보다는 좀 더 어두운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포시는 이 작품에서 카메라의 움직임, 편집, 화려한 색상과 조명의 표현적이고 때로는 과장된 사용으로 이야기의 쇠퇴와 추악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으며, 흥행도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 폴린 카엘(Pauline Kael)[6]은 "훌륭한 영화 뮤지컬. 정치적인 카바레에서 그 형태를 취하며, 그것은 유혹의 풍자이다."라고 평했다. '카바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8개의 상을 수상했으며, 포시는 감독상[7]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주연 라이자 미넬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레니 (1974) |
1974년 11월 10일, 전기 영화 '레니'를 공개했다.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원작자가 직접 영화판의 각본을 썼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Lenny Bruce)의 인생을 다루었으며, 브루스의 비범한 코미디 재능과 검열 대상이 된 후의 그의 몰락을 그렸다. 더스틴 호프먼이 주인공 레니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으며, 밸러리 페린이 히로인 허니 역을 맡았다. 지금까지 포시는 화려한 뮤지컬 감독으로 유명했지만, 이 작품은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흑백 영화를 효과적으로 연출해서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폴린 카엘은 "나는 인생에서 이렇게 늦게 영화 제작에 입문하여 기술적인 숙련을 발전시킨 다른 영화 감독을 알지 못한다. 포시는 진정한 신동이다."라고 평했다. '레니'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뒀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포함한 6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 한 부문에서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니'를 편집하는 동안 발생한 심장마비로 인해 이 성과는 무색해졌다. 1973년 포시는 영화 '레니'와 뮤지컬 '시카고'를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의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포시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건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엄청난 속도로 마약, 술, 담배를 소비했다고 한다. 또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서 여배우들과 자주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결국 이 해에 심장 수술을 받았다.
올 댓 재즈 (1979) |
1979년 12월 20일, 뮤지컬 영화 '올 댓 재즈'[8]로 5년 만에 영화계로 복귀했다. 자신의 삶을 그린 반(半)자전적인 판타지 영화다. 뮤지컬 '시카고'를 작업하고 영화 '레니'를 편집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했으며, 포시의 극단적인 작업 일정, 자기 파괴적인 약물 남용, 복잡한 여성 관계가 자세하게 그려졌다. 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로이 샤이더가 주연을 맡았으며, 의욕적이고, 여성적이며, 바람둥이인 감독이자 안무가 조 기디온[9]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밥 포시가 쌓아온 모든 것을 집대성한 결정판'이라고 평가받았을 정도로, 포시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이다. 포시는 인터뷰에서 "좋든 나쁘든, 좋든 싫든, 그것은 어떠한 작품도 따라한게 아닙니다.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걸작[10]이자 위대한 뮤지컬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올 댓 재즈'는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으며, 제33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11] 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포함한 9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으며, 미술상, 편집상, 의상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스타 80 (1983) |
1983년 11월 10일, 마지막 영화 연출작 '스타 80'을 공개했다. 남편 폴 스나이더에 의해 살해된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 도로시 스트래튼의 인생을 그린 전기 영화이며, 퓰리쳐상을 수상한 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매리얼 헤밍웨이[12]가 도로시를 연기했으며, 에릭 로버츠가 폴을 연기했다. 박스오피스에서 큰 실패를 기록했지만, 로저 이버트가 만점을 주는 등 북미 평론가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광적인 소시오패스를 훌륭하게 연기한 에릭 로버츠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참고로 플레이보이의 설립자 휴 헤프너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묘사를 싫어하여 제작자들을 고소하기도 했다.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장편 연출작은 다섯 편 밖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카바레'와 '올 댓 재즈'를 탁월하게 연출해서, 뮤지컬 영화의 한 획을 그은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이 영화들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뮤지컬 영화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197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이다.(타임 아웃, 인디와이어, AFI)
영화 감독으로서 포시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카메라 연출이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가 활약하던 고전적인 뮤지컬 영화의 양식과는 크게 달랐다. 전통적인 뮤지컬 영화는 시공간의 통일성을 보전하면서 배우의 춤 실력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스타일이었지만 포시는 배우가 춤을 출 때 다양한 각도에 카메라를 놓고 고전적인 편집규칙을 마음대로 무시하면서 재즈의 파격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줬다. #
2.3. 사망
사망 당시 뉴스 |
1987년 9월 23일, 포시는 뮤지컬 '스위트 채리티' 리바이벌 공연의 리허설을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휘했다. 그리고 오후 6시 30분경 자신이 묵고 있던 윌러드 호텔에서 극장으로 향하던 중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당시 그는 부인이자 '스위트 채리티'의 코디네이터인 그웬 버든과 함께 있었다. 포시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사망했고, 그의 죽음은 저녁이 끝날 무렵 기립박수를 받은 후 출연진들에게 발표되었다.
한편, 유언 중 하나가 아주 독특했는데, 생전 친하게 지냈던 지인과 동료들들 66명에게 자신의 재산 중 2만 5000달러를 나누어[14] 밖에 나가 자신의 이름으로 식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유언을 따라 지인들은 그가 죽은 지 1년 후, 식당을 하나 대여해 그를 기리는 파티를 벌였다고.
1999년에는 밥 포시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만든 안무로 작품을 구성한 뮤지컬 '포시(Fosse)'가 공개됐다. 이 뮤지컬은 토니상에서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했다. 또 2007년 4월, 국립 무용 박물관 및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시카고의 파울리나 스트리트의 한 구역은 현재 '밥 포시 길'이라는 명예 명칭을 가지고 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포시의 공헌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뮤지컬 리바이벌과 댄스 수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3. 작품 목록
3.1. 뮤지컬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안무감독 | 배우 | 비고 |
1947년 | 콜 미 미스터 Call Me Mister | ○ | 코러스 | |||
1948년 | 메이크 마인 맨해튼 Make Mine Manhattan | ○ | 퍼포머 | |||
1950년 | 댄스 미 어 송 Dance Me a Song | ○ | 댄서 | |||
1951년 | 빌리언 달러 베이비 Billion Dollar Baby | ○ | ||||
1952년 | 팔 조이 Pal Joey | ○ | ||||
1954년 | 파자마 게임 The Pajama Game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 |||
1955년 | 댐 양키즈 Damn Yankees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 |||
1956년 | 벨 알 링잉 Bells Are Ringing | ○ | 공동 안무감독 토니상 안무상 후보 | |||
1958년 | 뉴 걸 인 타운 New Girl in Town | ○ | 토니상 안무상 후보 | |||
1959년 | 레드헤드 Redhead | ○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 ||
1961년 | 정복 영웅 The Conquering Hero | ○ | ||||
성공 시대 How to Succeed in Business Without Really Trying | ○ | |||||
1962년 | 리틀 미 Little Me | ○ | ○ | 공동 연출 겸 공동 안무감독 토니상 안무상 수상, 감독상 후보 | ||
1963년 | 팔 조이 Pal Joey | ○ | 토니상 남우주연상 후보 | |||
1965년 | 즐거움과 궁전 Pleasures and Palaces | ○ | ○ | |||
1966년 | 스위트 채리티 Sweet Charity | ○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감독상 후보 | ||
1972년 | 피핀 Pippin | ○ | ○[A] | ○ | 토니상 감독상, 안무상 수상 | |
라이자 Liza | ○ | ○ | ||||
1975년 | 시카고 Chicago | ○ | ○[A] | ○ | 토니상 감독상, 각본상, 안무상 후보 | |
1978년 | 댄싱' Dancin' | ○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감독상 후보 | ||
1986년 | 빅 딜 Big Deal | ○ | ○[A] | ○ | 토니상 안무상 수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 |
3.2. 영화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안무감독 | 배우 | 비고 |
1953년 | 어페어 오브 도비 길리스 The Affairs of Dobie Gillis | ○ | ||||
키스 미 케이트 Kiss Me Kate | ○ | |||||
그녀에게 기회를 Give a Girl a Break | ○ | |||||
1955년 | 마이 시스터 에일린 My Sister Eileen | ○ | ○ | |||
1957년 | 파자마 게임 The Pajama Game | ○ | ||||
1958년 | 댐 양키즈 Damn Yankees | ○ | ○[B] | |||
1969년 | 스위트 채리티 Sweet Charity | ○ | ○ | 영화 감독 데뷔작 제22회 칸 영화제 개막작 | ||
1972년 | 카바레 Cabaret | ○ | ○ |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1995년 National Film Registry 등재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74년 | 레니 Lenny | ○ | ○[B] |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 ||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 | ○ | ○ | ||||
1977년 | 도둑들 Thieves | ○ | ||||
1979년 | 올 댓 재즈 All That Jazz | ○ | ○[A] | ○ | 제33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카데미 감독상, 각본상 후보 2001년 National Film Registry 등재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83년 | 스타 80 Star 80 | ○ | ○ | 제34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출품작 |
3.3. TV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제작 | 안무감독 | 배우 | 비고 |
1953년 | 조지 번즈 앤 그레이시 앨런 쇼 The George Burns and Gracie Allen Show | ○ | 에피소드: Gracie the Artist | |||
1959년 | 조지 번즈 앤 그레이시 앨런 쇼 The George Burns and Gracie Allen Show | ○ | ○ | 에피소드: The Wonderful World of Entertainment | ||
1972년 | 라이자 위드 어 Z Liza with a Z | ○ | ○ | ○ | 에미상 최우수 버라이어티, 음악 및 코미디 스페셜 수상작 |
4. 여담
- 1972년, 한 해에 아카데미상, 토니상, 에미상을 모두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2023년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이 기록을 달성한 인물이다. 포시는 토니상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안무가이기도 하다. 그래미상을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EGOT은 달성하지 못했다.
- 본명은 로버트 루이스 포시이다. 포시의 부모는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 엄청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여배우들, 댄서들과 불륜을 했다. 자신의 제자인 댄서 앤 라인킹(Ann Reinking)[21], 배우 제시카 랭 등과 불륜을 하기도 했다. 1971년 지속적인 외도로 인해 배우자 그웬 버든은 포시와 별거했다. 그러나 1987년 포시가 사망할 때까지 법적으로는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포시는 그웬 버든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했고, 꾸준히 함께 일했다. 이러한 여성 편력을 본인도 인식하고 있는지, 자신이 직접 만든 전기 영화 '올 댓 재즈'에서 셀프 디스를 하기도 했다.
- 어린 시절부터 뇌전증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무대에서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
- 대부분의 안무 작품에서, 포시는 보통 페도라와 장갑을 착용했다. 17살에 대머리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모자를 썼다. 또한 자신의 손을 싫어했기 때문에 장갑을 많이 사용했다.
마이클 잭슨에게 영향을 준 안무가다. 1974년 영화 어린 왕자에서 뱀이 어린 왕자에게 'A Snake in the Grass'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페도라, 장갑 등의 복장과 안무가 훗날 마이클 잭슨이 보여주는 트레이드마크와 거의 판박이다. 1983년 6월, 마이클 잭슨은 포시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고 포시의 안무가 얼마나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에게 'Thriller'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포시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
2012년 7월 28일, 혁신적인 안무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4개의 '미국 포에버' 기념우표 세트' 중 하나에 등재됐다. 이사도라 덩컨, 호세 리몬, 캐서린 던햄과 함께 기념 우표 인물로 선정됐다.
- 2019년 밥 포시와 그의 아내 그웬 버든의 인생을 그린 드라마 '포시/버든(Fosse/Verdon)'이 공개됐다. 샘 록웰이 포시를 연기했으며, 미셸 윌리엄스가 버든을 연기했다.
- 영화 '네트워크'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22]의 친한 친구였다. <스타 80>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가 이 영화의 기반이 되는 테레사 카펜터의 퓰리처상 수상 기사 <플레이메이트의 죽음>을 추천해줬고, 개봉하기 2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 가장 존경한 댄서는 프레드 아스테어였다. 어렸을 때 프레드 아스테어의 모든 영화를 보러 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춤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 가장 존경한 영화 감독은 페데리코 펠리니였다. 펠리니를 존경했던 포시는 자전적인 영화감독의 얘기를 찍었던 펠리니처럼 자신의 얘기, 안무가의 얘기를 영화 (올 댓 재즈)로 만들었다.
- 1979년 미국 연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12년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NL)에서 밥 포시의 춤을 패러디했다. #
- 딸 니콜 포시(Nicole Fosse)는 댄서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드라마 마이애미 바이스에 출연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실제로 그런 설정이므로.[2] 다만 클라이막스 부분에는 나름 다이나믹한 동작이 있다.[3] 1960년 4월에 그웬 버든과 결혼했다.[A] 공동 각본[A] [6] 로저 이버트와 함께 미국 현대 영화 비평의 혁명적인 인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 쿠엔틴 타란티노가 위대한 평론가라고 평하기도 했다.[7] 당시 경쟁자가 '대부'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였기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코폴라는 2년 뒤에 '대부 2'로 감독상을 수상했다.[8] 국내에서는 '재즈는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9]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냥 밥 포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비주얼도 상당히 닮았다.[10] 카바레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11]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와 공동 수상했다.[12]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손녀다.[13] 기자가 핀처에게 "완벽한" 영화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핀처는 밥 포시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완벽하다고 말했다.[14] 명당 378달러 79센트 꼴.[A] [A] [A] [B] 카메오 출연[B] [A] [21]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사실혼 관계이기도 했다.[22] 아카데미 각본상을 최다 수상한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