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5 04:27:04

라나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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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라나 터너
LANA TURNER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241 Hollywood Blvd.
}}}}}}}}}}}} ||

<colbgcolor=#000000><colcolor=#efd88f> 라나 터너
Lana Turner
파일:Lana_Turner.jpg
본명 줄리어 진 밀드러드 프랜시스 터너
Julia Jean Mildred Frances Turner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21년 2월 8일
미국 아이다호주 월리스
사망 1995년 6월 29일 (향년 74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직업 배우
활동 기간 1937년 - 1985년
영화 데뷔 1937년, '데이 원트 포겟'
학력 할리우드 고등학교
신장 160cm
배우자 아티 쇼(1940년 - 1940년 이혼)
조지프 스티븐 크레인(1942년 - 1943년 무효) (1943년 - 1944년 이혼)
밥 타핑(1948년 - 1952년 이혼)
렉스 바커(1953년 - 1957년 이혼)
프레드 메이(1960년 - 1962년 이혼)
라버트 이튼(1965년 - 1969년 이혼)
라널드 펠러(1969년 - 1972년 이혼)
자녀 슬하 1녀
종교 개신교가톨릭
서명 파일:Lana_Turner_signature.jp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및 활동
2.1. 딸의 자니 스탐파나토 살인 사건
3. 주요 출연 작품4. 사생활
4.1. 결혼4.2. 그 외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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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Qe57.gif
미국의 배우.

2. 생애 및 활동

아버지 잔 버절 매디슨 터너[1]테네시주 호언왈드(Hohenwald) 출신으로 광부였다. 어머니 밀드러드 프랜시스 카우언[2]아칸소주 토박이로 16살 때 줄리어 터너를 낳았다. 주변에선 애칭인 "주디(Judy)"로 불렸다.

개신교도였던 어머니 때문에 태어났을 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7살 때 가톨릭에 이끌려 어머니의 허락 하에 개종했다. 심지어 원래는 수녀를 장래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29년 9살 때 밀주업을 하던 아버지가 도박판에서 돈을 너무 많이 땄다가 길에서 강도에게 살해 당했다.

1936년 줄리어 터너는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에서 재학 중이던 학교 맞은편의 몰트[3] 탑 햇 카페(Top Hat Cafe)에서 더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를 창간한 윌리엄 R. 윌커슨[4]에게 발굴되었다. 그때까지 연기는 학교 공연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윌커슨에게서 줄리어 터너를 소개 받은 감독 머빈 러로이가 라너(Lana)라는 예명을 주었다.

그렇게 라너 터너는 16살 때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악행을 많이 저질렀으나 스타를 만드는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당대의 유명 에이전트 헨리 윌슨이 키운 몇 안 되는 여성 스타들 중 대표적 예로 꼽힌다. 헨리 윌슨은 보통 록 허드슨 등 남성 연예인들만 관리했었다.[5]

원래 타고난 머리색은 갈색이지만 스타로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금발로 염색 당했다. 그 당시에는 흑백영화가 흔했기에 MGM의 거의 모든 여배우들은 스크린상에서 더 튀어보이는 금발로 염색하는 경우가 많았다.[6]
파일:lana_turner_brunette.jpg

첫 영화 출연작은 러로이 연출의 <데이 원트 포겟>(1937)였는데, 당대에 유행하던 몸에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고 길거리를 걷는 장면만으로 "스웨터 걸(sweater girl)"이라는 별명과 함께 단숨에 미국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이후 비슷한 스웨터를 입고 가슴선을 강조한 많은 후발주자들이 이 별명을 이어받았다.
파일:861755479781157fc4a519ec7d48d05b.jpg

1937년 발탁 일주년 기념으로 해당 카페에서 작은 파티를 열고 자신에게 음료를 만들어줬던 종업원과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파일:Top_Hat_Cafe_party_1937.jpg

같은 해 머빈 러로이가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로 이직할 때 함께 옮겨갔다. 앤디 하디 시리즈 중의 하나인 <러브 파인즈 앤디 하디>(1938)에 출연하는 등 순수한 소녀(ingenue) 역을 많이 했다.

1940년대 초부터 <지그펠드 걸>(1941), <Honky Tonk>(1941), <지킬 박사와 하이드>(1941), <자니 이거>(1941), <너를 찾을 거야>(1942) 등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주연급 배우로서 성장했다.
파일:Lana_Turner_-_Ziegfeld_Girl_set_by_C._S._Bull.jpg
<지그펠드 걸>(1941)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가장 인기 있던 핀업걸 중 하나다. 미국 전역을 돌며 전쟁 채권을 열심히 팔고 참전 군인들을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1946년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통해서 강렬한 팜 파탈을 선보이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이때 대중과 업계에서 터너가 실은 진지한 배우라는 인식 전환이 이뤄졌다.
파일:Lana-Turner-The-Postman-Always-Rings-Twice.jpg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46)

1950년대에 들어서도 인기를 이어갔으며, <미녀와 건달>(1952) 같은 작품들을 찍었다. 영화 <페이튼 플레이스>(1957)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지명되기도 했다.

1959년 더글러스 서크가 연출한 <슬픔은 그대 가슴에>가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터너의 최고 수익 출연작이 되기도 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하락세를 보였고 1970-80년대 초에는 거의 은퇴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50년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1982년에서 83년 사이 CBS에서 황금시간대에 방영한 TV 드라마 "Falcon Crest"(1981-1990)에 고정 출연하면서 다시 잠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 와인 재벌 내부의 반목과 암투가 소재로, 제인 와이먼이 주연이었다.

1991년의 TV 출연이 마지막 활동이었다.

1994년 산 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5년 인후암으로 인해 향년 7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1. 딸의 자니 스탐파나토 살인 사건

1958년 4월 4일, 14살이었던 딸 쉐럴 크레인이 당시 터너의 애인이였던 조직폭력배 자니 스탐파나토(Johnny Stompanato)를 터너의 침실에서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검 과정에서 언론이 엄청난 관심을 보였는데, 폭력으로부터 엄마를 지키려던 정당방위라는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스탐파나토는 터너와 런던 여행 중에 터너를 너무 심하게 폭행해 영국에서 추방 당한 적도 있었다.

터너는 스탐파나토가 가명으로 정체를 속이고 접근해 조폭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터너도 스탐파나토의 본명 자체는 익히 들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스탐파나토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조폭이었다. 스탐파나토는 다름 아닌 미키 코언의 경호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실은 정당방위 부분보다 이쪽을 더 못 믿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딸 쉐럴 크레인에 따르면 터너는 스탐파나토가 조폭이란 사실을 정말 몰랐다고 한다.

딸 쉐럴 크레인은 이 사건 이후 음주, 난폭운전, 음란행위 등으로 10대에 긴 방황을 이어나갔다. 훗날 부동산 중개업자로 상당히 성공했다.

3. 주요 출연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작품 원제
1937 데이 원트 포겟 They Won't Forget
1938 마르코 폴로의 모험 The Adventures of Marco Polo
러브 파인즈 앤디 하디 Love Finds Andy Hardy
1940 투 걸즈 온 브로드웨이 Two Girls on Broadway
1941 지그펠드 걸 Ziegfeld Girl
지킬 박사와 하이드
Honky Tonk
자니 이거 Johnny Eager
1942 너를 찾을 거야 Somewhere I'll Find You
1944 Marriage is a Private Affair
1945 Keep Your Powder Dry
위크-엔드 앳 더 발도르프 Week-End at the Waldorf
1946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47 파도 Green Dolphin Street
1948 귀향 Homecoming
삼총사 The Three Musketeers
1950 A Life of Her Own
1952 메리 위도우 The Merry Widow
미녀와 건달 The Bad and the Beautiful
1953 Latin Lovers
1954 사랑의 불꽃 Flame and the Flesh
반역자 Betrayed
1955 비는 오다 The Rains of Ranchipur
The Prodigal
애혼 The Sea Chase
1956 디안 Diane
1957 페이튼 플레이스 Peyton Place
1958 다른 시간 다른 장소 Another Time, Another Place
1959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
1961 사랑이 머무르는 계절 By Love Possessed
Bachelor in Paradise
1966 마담 X Madame X
1969 The Big Cube
1974 공포의 시바 Persecution

4. 사생활

4.1. 결혼

8번 결혼하고 7번 이혼했다.

이중 두 번은 한 남성과 한 것이다. 터너는 "한 남자와 결혼해 일곱 명을 낳는 게 꿈이었는데 실제론 그 반대가 되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남자 쪽의 열렬한 구애에 넘어가 결혼을 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변해버리곤 했다며, 남편들 쪽의 빠른 태도 변화를 대개의 이혼 사유로 꼽았다.

섹스심벌로 명성을 떨쳤지만 본인은 이 점을 매우 싫어했고 성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져있다. 잠자리를 내켜하지 않은 것이 모순되게도 잦은 이혼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나 마흔 전엔 성관계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연애를 많이 한 건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남성들의 외모에 약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더 구체적으론 "구리빛 피부에 라틴 계열의 인상"이 터너의 취향이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매우 순진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무턱대고 믿고 잘 속았다고 하며, 이는 남자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첫 번째 결혼은 1940년 아티 쇼와 했다. 그해에 바로 헤어졌다. 쇼와는 나중에 다시 잠시 만남을 갖다가 낙태한 적이 있다.

두 번째 결혼은 1942년 도박사 조지프 스티븐 크레인과 했으나 크레인이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은 탓에 다음 해인 1943년 무효가 되었다. 같은 해 크레인과 첫 번째 아내의 이혼이 성립됐다. 터너는 임신 사실을 알고 3월 크레인과 바로 다시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당시 미국 법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생아는 거의 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7월 딸 쉐럴 크레인을 낳고 1944년 이혼했다.

네 번째 결혼은 1948년 양철 재벌 후계자 밥 타핑과 했다. 도박 및 알코올 중독 문제로 1952년 이혼했다.

다섯 번째 결혼은 1953년 렉스 바커와 했다. 타잔 역으로 유명한 배우다. 바커와 만나기 직전에 터너는 데이트폭력을 당하면서 페르난도 라마스와 사귀고 있었다. 아직 라마스와 교제 중일 때 터너가 바커와 춤추는 모습을 보고 질투한 라마스가 터너를 심하게 폭행한 사건이 유명한데, MGM은 나중에 폭행 사실을 알고 라마스와의 계약을 중단하기도 했다. 바커는 결혼생활 중 터너의 딸 쉐럴 크레인에게 3년 동안 성폭력을 저질렀다. 쉐럴 크레인이 이 사실을 터너에게 털어놓자마 터너는 바커와 이혼했다.

여섯 번째 결혼은 1960년 목장주 프레더릭 "프레드" 메이와 했다. 1962년 이혼했다.

일곱 번째 결혼은 1965년 10살 연하의 영화 제작자 라버트 이튼과 했다. 1969년 이혼했다.

여덟 번째 결혼은 1969년 8살 연하의 사기꾼 라널드 펠러와 했다. 닥터 단테이(Dr. Dante)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최면술사로, 방송 출연을 했고 다큐멘터리도 나와있다. 터너는 펠러가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보석들을 훔쳐온 걸 적발하고 1972년 이혼했다.

4.2. 그 외

4편의 작품에 함께 출연한 클라크 게이블과는 한 번도 엮인 적이 없다. 둘의 불륜 때문에 게이블의 아내 캐롤 롬바드가 질투로 몸이 달아 다급히 게이블의 곁으로 돌아오려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는 악의적인 풍설이다.

<자니 이거>(1941)를 찍으면서 바버라 스탠윅과 결혼생활 중이던 로버트 테일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은 터너 본인도 인정했다. 당시 터너에게 빠져있던 테일러가 터너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요구하자 스탠윅이 손목을 긋고 병원에 실려갔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스탠윅은 붕대로 감싼 팔을 팔걸이에 걸고 다녔다. 스탠윅 본인은 창문을 억지로 열다가 유리조각에 찔렸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 직후 터너는 테일러와의 관계를 소강시키고 평생 친구로만 지냈다.

터너가 가장 사랑한 남자라고 공인한 타이론 파워와는 40년대 후반에 2년 가량 교제했다. 파워의 소속 영화사 폭스와 터너가 속한 MGM이 동시에 이별을 종용해대 타의로 헤어졌다. 파워의 당시 아내가 이혼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워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해야만 했다. 유부남의 아이를 가진 여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 당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터너는 사회 분위기가 좀 완화된 말년에 그 아이를 그냥 낳아 멀리 섬으로 도망이라도 가서 혼자서 키웠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종종 상상할 정도로 큰 미련을 가졌다.
파일:Tyrone_Power_Lana_Turner.jpg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에바 가드너와 관계한 남성들이 많이 겹친다. 터너와 가드너 모두 아티 쇼와 결혼한 적이 있다. 터너는 프랭크 시나트러와 그가 낸시 시나트러와 결혼생활 중일 때부터 관계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 시나트러가 낸시 시나트러와 헤어지고 에바 가드너와 결혼한 뒤에도, 그리고 가드너와 이혼 이후로도 만났다고 한다. 가드너의 남자친구였던 하워드 휴즈와도 잠시 만난 적이 있다. 터너는 몇 번 만나봤을 뿐이지 사귀거나 사랑에 빠졌던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터너는 휴즈가 수줍음이 많고, 따분했으며, 청력에 문제가 있어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고 회상했다.

그외에 빅터 마투어, 타미 돌시 등과도 만났다.

5. 여담

  • 가수 라나 델 레이는 자신의 활동명이 라나 터너에게서 영감을 받아 지은 것이라고 밝혔다.
파일:Lana_Turner_Stage_door_canteen.jpg}}} ||
  • 할리우드 황금기 체제를 강력히 옹호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젠 배우들을 강력히 보호하고 관리하던 과거 영화사 같은 주체가 없고 언론이 스타를 쥐고 흔드는 시대가 됐다며 후배 스타들을 안타까워했다.
  • 당대의 연예 칼럼니스트들은 터너의 어머니를 다른 미성년자 배우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싸잡아 오랫동안 악마화했다. 길거리 캐스팅 당한 게 전부인 터너의 실제 데뷔 일화를 묵살하고 어머니가 억지로 할리우드에 밀어넣은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터너의 어머니는 전술했듯이 그 당시로서는 매우 큰일이었던 개종까지도 겨우 7살이었던 터너의 뜻대로 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 어머니가 다른 연예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사람들은 그 애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른다"고 말한 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전해듣고 감격했다. 터너는 보통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일주일에 6일을 꼬박 일했다.
  • 제시카 랭잭 니컬슨이 주연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1981년 개작 완성도가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 평소 애정 장면을 찍을 때 구취 관리를 위해서 씹던 을 그대로 어금니 뒤쪽에 넣어두곤 했는데 하루는 클라크 게이블과 키스신을 찍다가 쭉 늘어난 껌이 두 사람 혀 사이를 오가는 사고가 벌어졌다. 놀란 게이블은 그대로 연기를 이어나가면서도 대체 이게 뭐냐며 강렬한 눈짓으로 물어봤다고 한다. 감독은 그 뒤로 "말 건강을 점검하는 마냥" 꼼꼼히 터너의 입안 검사를 해댔고, 터너는 결국 이 방법을 쓰는 걸 단념했다.
  • 달리기가 미용상 여성에겐 좋지 않다고 했다. 가슴이 흔들리기 때문에. 실제로 달리기 대신 걷기와 스트레칭으로 관리했다.
  • 붉은색 육류, 설탕, 커피를 전부 끊고 닭고기, 생선, 야채, 꿀을 넣은 허브차를 섭취하며 말년까지도 늘씬한 몸매를 유지했다.
  • 마돈나Vogue 가사 속에 캐서린 헵번 등 쟁쟁한 황금기 탑스타들과 함께 호명된다. 터너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는 부분.
  • 버지니어 메이요는 1977년 조 프랭클린과의 TV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가장 동경했던 여배우가 터너였다고 밝혔다.
  • 데이비드 니븐자서전에서 할리우드 여배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몸매를 지녔지만 할리우드 남자들 사이에서 장난감처럼 굴려지고 업계에선 섹스심벌로 이용 당하며 정신이 망가진 끝에 약물 중독이 됐으며 노화로 인해 외모가 빛을 바래면서 경력이 하강한 한 여배우를 익명으로 묘사했는데, 니븐과 절친했던 터너로 추정되고 있다.

[1] John Virgil Madison Turner.[2] Mildred Frances Cowan.[3] 탄산수, 밀크쉐이크, 아이스크림 등을 팔던 카페.[4] William R. Wilkerson. 1890 - 1962.[5] 헨리 윌슨에 관해선 록 허드슨 항목 참조.[6] 동료들과 친하고 의지하면서도 경쟁하는 분위기가 심했다.[7] Stage Door Cant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