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1:06:44

독일 국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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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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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군
Wehrmacht
파일:나치 독일 군기(1938–1945).svg
군기[1]
파일:발켄크로이츠.svg
국적 표지[2]
<colbgcolor=#000><colcolor=#FFF> 존속일 1935년 ~ 1945년
편성 육군(Heer)
해군(Kriegsmarine)
공군(Luftwaffe)
모토 Gott mit uns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병력규모 육군 누적 1560만
해군 누적 150만 명
공군 누적 340만 명

누적 2000만
장비전력 육상장비
전차 누적 4만 9777대
해상장비
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3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1척
항공장비
항공기 누적 11만 9871대
주요 지휘관 퓌러 (통수권자) 아돌프 히틀러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
육군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해군최고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최고사령관 헤르만 괴링
주요 참모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
육군최고사령부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공군최고사령부 총참모장 알베르트 케셀링
1. 개요2. 명칭
2.1. 명칭의 번역 문제
3. 수뇌부4. 구성
4.1. 육군4.2. 해군4.3. 공군4.4. 국방군 야전헌병
5. 행정 및 생활
5.1. 계급5.2. 입대 방식5.3. 총 복무 인원 수5.4. 군구5.5. 내무생활
6. 장구류
6.1. 군복6.2. 제식 병기
7. 비판
7.1.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7.2. 군사적 문제점
7.2.1. 부족한 전략적 식견
7.2.1.1. 보론
7.2.2. 빈약한 보급체계
7.3. 전후의 역사 왜곡
8. 전후 부활과 청산9. 출신 인물10.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1934년 힌덴부르크 사망 직후 히틀러에게 전군을 대표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베를린 근위연대[3]
"Ich schwöre bei Gott diesen heiligen Eid, daß ich dem Führer des Deutschen Reiches und Volkes Adolf Hitler, dem Oberbefehlshaber der Wehrmacht, unbedingten Gehorsam leisten und als tapferer Soldat bereit sein will, jederzeit für diesen Eid mein Leben einzusetzen."
'나는 하느님께 엄숙히 맹세하오니, 독일과 국민의 지도자이며 독일 국방군의 최고통수권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치며, 언제든지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군인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 독일 국방군의 복무신조[4]
국방군(, Wehrmacht)1935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하였던 나치 독일의 정규군이다.

2. 명칭

국방군이라는 명칭은 독일어 원어인 Wehrmacht(베어마흐트)를 번역한 것이다.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독일 원어인 Wehrmacht가 고유명사화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영미권에서도 German defense force라고 영어식으로 번역해서 표기하는 경우는 드물고 (German) Wehrmacht라고 독일어 원어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독일 국방군(Wehrmacht)은 육해공군을 아우른 독일 정규군 전체를 총칭한다. 일각에서는 독일 육군만 지칭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정보이다. 국방군국군이라는 단어와 동일어로써 육군(Heer)뿐만 아니라 해군(Kriegsmarine), 공군(Luftwaffe)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SS질서경찰 등은 국방군에 포함되지 않는다.

2.1. 명칭의 번역 문제

"⋯또한 그들은 일종의 도상학적 효과를 지니도록 자기 책의 본문에 –부대의, 전투 장면의, 여러 개인의– 사진을 많이 끼워넣는다. 용어, 즉 독일군 계급, 차량 명칭, 훈장도 마찬가지여서, 늘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며 토템적 가치도 지닌다.
― 로널드 스멜서,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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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뇌부

1939년 폴란드 침공 발발 기준이다.
파일:아돌프 히틀러 사진1.jpg
퓌러(통수권자)
아돌프 히틀러

파일:발터 폰 브라우히치.jpg
발터 폰 브라우히치

파일:페도어 폰 보크 (컬러).jpg
육군 북부집단군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파일:게르트 폰 룬트슈테트.jpg
육군 남부집단군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일:Wilhelm_Keitel.jpg
빌헬름 카이텔

파일:Alfred_Josef_Ferdinand_Jodl.jpg
알프레드 요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0-128-63%2C_Erich_Raeder.jpg
에리히 레더

파일:Hermann_Göring_-_Röhr.jpg
헤르만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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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성

파일:나치 독일 육군 엠블럼.svg 파일:나치 독일 공군 엠블럼.svg 파일:나치 독일 해군 엠블럼.svg
Heer
육군
Luftwaffe
공군
Kriegsmarine
전쟁해군

우선 독일 국방군에서 가장 높은 기관은 바로 국방군최고사령부(OKW)이다. 그 아래 각 군별로 육군총사령부(OKH), 공군총사령부(OKL)와 해군총사령부(OKM)로 구성되어 있다. 무장친위대 또한 OKW의 관할을 받았다. 자세한 편제는 독일 국방군/부대일람 문서 참조.

4.1. 육군

파일:external/1.bp.blogspot.com/A+column+of+German+forces+in+Pari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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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해군

파일:크릭스마리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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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공군

파일:나치 독일 공군 - 슈투카 편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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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국방군 야전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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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정 및 생활

5.1.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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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입대 방식

국방군 육군은 18세 이상의 남자부터 자원입대가 가능했으며 총 4주 간의 신병교육대 기간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여느 군대가 그렇듯이 국방군도 신교대에서 군종불문 사격, 수류탄 던지기, 각개전투 등 여러 가지 기초적인 보병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다보니 날이 갈수록 훈련의 강도가 빡세졌다. 독일의 심장부가 일선이 된 전쟁 후반기에는 신교대고 뭐고 그냥 바로 자대 배치 받고 일선에서 싸웠다고 한다. 신병 때는 훈련소의 병기들을 지급받았다 수료시 반납 후 자신의 부대에서 자기가 쓸 병기를 새로 지급받는 타국과 달리, 훈련병 때 받은 소총을 전출시에도 계속 지참해 전역시까지 함께하는 방식으로 병기를 지급했다. 방탄모탄띠, 수통 등 개인장구류도 부대피복이 아닌 개인피복으로 지급됐다. 당연히 훈련병 때 지급받은 것을 전역시까지 계속 썼고, 철모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전역하면서 반납하지 않고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육군 병의 의무 복무 기간은 2년이었으나, 개전 이후 만기전역 개념이 사실상 없어졌다. 징집병들은 극초반에는 폴란드 침공에 가담했고, 중반에는 대부분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프랑스 침공영국 본토 항공전을 거행했으며, 1941년 6월부터는 국방군 병력의 90% 이상이 죄다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애초에 친위대여서 다른 소속이긴 하지만, 한 친위대원은 16살에 입대해서 뮌헨 협정부터 베를린 전투까지 제3SS기갑사단에 있으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

같은 국방군이여도 육군은 아무나 입영통지서가 날아오면 입대 확정이였으나 해군이나 공군으로의 입대는 지원을 해야 했고 여러가지 시험에서 통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여느 군대가 그렇듯이 육군에선 Kar98k게베어 43를 사용하는 일반 소총수가 아닌, 기관단총수(MP40 사용), 기관총사수(MG34, MG42 사용), 저격수(초기: Kar98k 사용, 후기: 게베어 43 사용) 돌격소총수(MKb 42, MP43, StG44 사용) 등은 자대 배치 이전에 따로 훈련을 몇 주간 더 받아야 했었다. 해공군 역시 양성과정 외 특기교육이 신병 수료 후 바로 실시됐다.

장교의 경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임관과 동시에 소대장 경험 없이 바로 중대장으로 배치되었다.[5] 이로 인해 소위들이 실전지휘경험 부족으로 난항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은 전방에는 대위가 중대장, 상사가 소대장인 부대를, 후방에는 소위가 중대장, 하사가 소대장인 부대를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때의 군대 제한으로 인해 독일군은 전쟁 개시와 동시에 고질적인 장교 부족현상으로 고통받았다. 1941년 독소전쟁 개시 이후 전투가 격해지면서 장교들의 손실이 누적되었고 독일군의 장교 부족현상은 더 심화되어 갔다. 결국 전방이 궤멸되어가는 전쟁 후반에 이르러서는 소위 중대장도 전방에 마구 배치되었고 전쟁 말기엔 인력 부족이 심해 소령 여단장이 보직되기도 하는 등 엉망이었다.

5.3. 총 복무 인원 수

1935년부터 1945년까지 국방군이 존재했던 시절 동안 국방군에 복무했었던 군인의 총 숫자는 1820만여 명 정도라고 추정되고 있다.[6] 국방군 복무인원들 중 중 230만 명이 전사, 55만 명이 비전투 관련 원인으로 사망하였으며 200만 명이 작전 중 실종되고 전후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그리고 약 46만 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중 7만 7천 명이 미국, 영국, 프랑스 측에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 중 사망한 인원은 1945년 6월 이후의 전후 기간에 사망한 26만 6천 명도 포함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소련에 수감되어 있었다. 대략 1100만 명 정도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5.4. 군구

독일 국방군은 군의 보급과 편성 과정을 수월하게 하게 위해 군구(軍區, Wehrkreise)를 도입해서 전쟁 내내 이용했다.[7] 국방군 육군의 모든 사단은 각자 저마다 배정된 군구가 있었고, 해당 사단의 신병 모집(징집 등)과 보급은 모두 해당 군구가 담당하는 식으로. 다만 국방군 내에서 유일하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만큼은 최정예 사단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독일 내 15개 군구 전체에서 신병을 모집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어느 나라나 그렇듯 독일 국방군 주에서도 군구는 주로 육군이 많이 활용했다. 해공군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징집으로 뽑지 않은데다가 둘 다 활동 지역이 비행장과 항구 주변으로 제한되었으므로 굳이 독일 본토 전역에 군구를 설치해서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전술했듯이 독일 국방군은 총 15개 군구가 있었다. 원래는 13개였는데, 안슐루스를 거치며 오스트리아가 추가되어 두 지역이 늘어나 15개가 되었다. 이후 폴란드와의 병합 지역 등을 추가하면서 4개가 더 늘어나 대전 말 국방군의 군구는 19개까지 늘어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77px-Wehrkreise_Deutsches_Reich.jpg
1937년 기준 독일의 군구 지도.[8]
파일:독일군구지도(1944년1월).jpg
1944년 1월 기준 독일의 군구 지도.[9]

아래 두 군구는 안슐루스 이후 새롭게 추가된 군구들이다.

아래 네 군구는 폴란드 침공 이후 새롭게 추가된 군구들이다.
  • XXI 군구
    포젠 일대 관할. 군구 사령부는 포젠에 위치했다.
  • 폴란드 총독부 군구
    XX 군구와 XXI 군구에서 일대를 제외한, 폴란드 총독부 휘하의 나머지 폴란드 영토를 관할. 군구 사령부는 크라쿠프에 위치했다.

5.5. 내무생활

나치 독일이 벌인 잔학한 전쟁범죄의 원인을 병영부조리가 판치는 병영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우습게도 병영부조리 자체는 적었고 내무 생활도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국방군 뿐만 아니라 친위대도 장교는 사관학교 졸업했다고 바로 임관되는 게 아니라 후보생 계급으로 병들과 한동안 생활한 후에야 정식으로 임관할 수 있었다. 부사관은 당연히 전원 병 출신이었다.[14] 이러한 제도로 군 내 신분 간의 심리적 격차와 군 경험 격차를 줄였다. 다만 얼차려가 완전히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장비 검사에 탈락하거나 경비 소홀의 경우 일주일 동안 감자 껍질을 까는 벌 같은 것들도 있었다. 운전병들에겐 느리게 운전하는 차의 뒤를 따라 1시간가량 달리는 벌이 주어졌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은 법률 및 규칙에 따라 규정된 절차에 의해 선고, 집행된 것들로 말단 병들끼리 똥군기 잡는다고 시행된 것은 아니다.

영내 거주자들의 일과표 또한 합리적이었는데, 육군 기준으로 일과가 끝난 뒤에도 약간의 개인정비시간 외엔 청소 등 점호를 준비해야 해서 사실상 24시간 내내 일과 중인 타국군에 비해, 이들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생활관 청소와 병기 등 개인장비 정비를 마치고 점호를 받았다. 즉 점호를 퇴근 직후 바로 실시하여 좀 더 편히 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다만 당시의 인식과 문화로 비추어 보건대 국방군이 병영 문화의 선진성에서 딱히 특출난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간기 시기 서방 유럽 국가들의 경우 가혹한 체벌 등으로 통제를 해야 했던 전열보병 시기가 지나면서 병영문화가 상당히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독일군과 직접 대결했던 미군영국군의 경우 독일군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병영문화를 갖추고 있었으며,[15] 소련군은 정치장교의 존재 등으로 매우 심각했다. 그리고 병영부조리가 아예 없는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2차대전 당시의 국방군을 다룬 미디어 매체인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와 '잊혀진 병사',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도 국방군 내 병영부조리가 묘사된다.[16]

또한 이러한 선진적인 시스템을 지녔음에도 병영부조리의 정점이었던 일본군 못지 않게 점령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일삼고 다녔던 것을 보면 병영 수준과 전쟁 범죄 비율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결국 독일군의 전쟁범죄는 전쟁과 병영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에 대한 발산이 아닌 말 그대로 나치의 유대인, 슬라브인, 집시등 이른바 열등 인종에 대한 말살 이론을 받아들여서 저지른 것이니 더 악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6. 장구류

6.1. 군복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군복/독일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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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2. 제식 병기

  • 무전기
    • ()안의 숫자는 후기형(Later), Receiver는 수신기, Transmitter는 송신기다.
이름 장비 설명 부속물 주파수 대역(KHz) 안테나 길이 유효거리
FuG1 Pack receiver b 없음 100-6970 1.4m 미상
FuG2 & FuG4 USW receiver c1 EUa2 27200-33300 2m 40m
FuG5 10와트 transmitter c
USW receiver c1
SE 10u 27200-33300 2m 40m
FuG6 20와트 transmitter c
USW receiver c1, later e
SE 20u 27200-33300 2m 80m
FuG7 20와트 transmitter d
USW receiver d1
SE 20u 42100-47800 2m 500m
FuG8 30와트 transmitter a
MW receiver b, later c
SE 30 1130-300
580(835)-3000
8m 400m
500m
FuG10 30와트 transmitter
Pack receiver b, later 30와트 transmitter a
SE 30 950-1670
100-6970(1120-3000)
미상 400m
FuG11 100와트 transmitter
Pack receiver b
SE 100 200-1200
100-6970
9m 500m
FuG12 80와트 transmitter c
MW receiver c
SE 80 1120-3000
835-3000
2m 2km
FuG13 20와트 transmitter c
USW receiver e
SE 20u 27200-33300 2m 80m
FuG15 USW receiver h 미상 23000-24950 2m 40m
FuG16 10와트 transmitter h - USW receiver h 미상 23000-24950 2m 40m
FuG37(t) 10와트 transmitter/receiver 미상 미상 미상 미상
FuG Spr a~f & Fug Spr Ger a~f USW transmitter/receiver 미상 미상 1.4m 미상
RF 1 CA transmitter/receiver 미상 미상 1.8m 미상
RF 2 CA transmitter/receiver 미상 미상 1.8m 미상
RF 3M & RF M2 transmitter/receiver 미상 미상 3m 미상

7. 비판

7.1.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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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의 국방군 병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범죄에 연루되었습니다. 친위대와 비교하자면, 25만 명의 친위대원들이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죠. 독일에서는 모든 논의가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2600만 명 이상을 죽인 1000만 명의 국방군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꺼립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친지 중 서너 또는 너덧 명은 바로 이 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Millionen Wehrmachtssoldaten waren an den Verbrechen der Wehrmacht beteiligt - im Unterschied zu den etwa 250.000 SS-Leuten, die für den Holocaust verantwortlich waren. Mit dem Gedenken an den Holocaust hat es in Deutschland funktioniert. Aber mit den zehn Millionen Soldaten an der Ostfront, die mehr als 26 Millionen Sowjets umgebracht haben, war der Widerstand in der Gesellschaft sehr viel größer. Jeder hatte drei, vier, fünf Verwandte, die daran beteiligt waren.
-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 도이체 벨레와의 2020년 인터뷰에서.#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국방군은 친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그저 통념일 뿐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국방군 역시 많은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국방군 범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볼프람 베테(Wolfram Wette)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교수는 국방군 1700만명 중 구조적으로 나치에 저항한 사례는 단 100건인 것으로 파악한다. 주변의 보는 눈을 피해 민간인들과 유대인들을 몰래 도운 국방군 병사들은 이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소극적으로 방관하거나 나치당의 명령에 따랐다.

7.2. 군사적 문제점

7.2.1. 부족한 전략적 식견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 식견은 매우 부족했다. 총사령관인 아돌프 히틀러의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비효율적인 경제 운영,[17] 총력전 및 보급 체제에 대한 부족한 이해 등을 비롯하여 가히 신화적인 전술적 성과들에 비해 전략적 안목은 상당히 뒤떨어지는 군대였다.[18]

나치당 자체가 사실 기존 군사 엘리트들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였고, 히틀러 개인의 입김이 강했기에, 독일 국방군의 업무 처리는 때때로 놀랄정도로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수많은 사단들을 무의미하게 포위섬멸당하게 한 후퇴 금지 명령이나 명백한 전투기인 Me 262를 폭격기로 사용하라고 고집한 삽질이 대표적. 오히려 일반적인 독일군의 이미지인, 기계같은 관료제 아래서 칼같이 움직이는 군대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 제국군에 보다 가깝다.

결국 독일군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큰 성과를 여러 차례 거두지만 대전략적 식견에서 밀리면서 점점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인 무능함은 히틀러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2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독일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즉, 국방군 수뇌부들의 잘못이 매우 컸으나 그들은 자신의 잘못들도 히틀러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했다. 대표적으로 독소 전쟁의 경우 가장 냉정해야 할 국방군 참모부에서는 10월까지 소련을 밀어버릴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전략적 식견의 부족과 오만은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로 귀결되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더 나은 판단을 한 경우도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40년 최초 독일군 침공 계획은 비록 히틀러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참모부의 의지가 포함되었지만, 슐리펜 계획을 재탕한 것과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당시 만슈타인의 주장과 달리 히틀러의 생각대로 독일군의 전력이 보강될 때까지 작전 시기를 늦춘 것 등이 있다.

과거에는 냉전의 영향과 수뇌부들의 변명 등이 먹혀서 이런 이미지가 덜했으나 수많은 자료와 증언들을 통해 전략적인 안목에서 독일군의 수준은 연합국에 비해 열세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연합군에 비해 독일군의 정보력이 떨어졌기에 당연한 현상이긴 하지만. 즉, 싸우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잘하지만 큰 그림은 거의 못 그리는 조직에 가까웠다. 독일이 자랑하는 일반참모 교육과정조차 독일군의 전통적인 대전략의 무지, 혹은 고의적인 무시를 잘 보여 준다. 전간기 독일군 일반참모 과정을 이수한 미육군 주재무관 아서 콩거 대령은 전략 및 전쟁사의 과목이 매우 부족하거나 아예 없어서 전략적인 관점을 전혀 익히지 못한다고 평했다. 독일 제국 시기의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서 비롯된 군사 이론과 교리를 변화하는 시대에서도 그대로 써먹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프랑스를 6주만에 밀어버리고 독소전쟁 초기 남부전선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는 등 전술적인 능력으로는 천재적인 장군이었지만 큰 피해를 입어도 중앙집권화된 총력전체제로 금방 전력을 복구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고 전선안정화에만 급급해했고 전쟁 말기까지도 전략, 정치적 영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앞의 적을 막는데만 매달렸다. 한 번은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야심차게 성채 작전을 계획했지만, 막상 만슈타인의 생각과 달리 독일의 전차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질 못했다. 오히려 성채 작전을 연기한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있을 정도이다.[19]
7.2.1.1. 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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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빈약한 보급체계

또한 연합군에 비하면 보급 체계도 후진적이었는데, 보급의 대부분을 차량이 아닌 철도에 의존했다. 게다가 그나마 쓴 트럭들마저도 종류를 전혀 통일하지 않았는데, 일단 독일 회사들이 생산한 트럭만 해도 벤츠제, 헨셸제, 오펠제, MAN제, 크루프제, KHD제, 아들러제, 뷔싱-NAG제, 마기루스제 등 10종류가 넘었다. 심지어 이후 독일은 차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등에서 노획한 미국제[20]/프랑스제 트럭들을 닥치는 대로 전선에 배치했는데, 이는 일시적으로는 독일군의 차량난을 해소했지만 결국 트럭의 종류만 더 쓸데없이 다양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트럭이 일선 부대에서 한꺼번에 쓰이니 독일군은 표준화나 규모의 경제는 고사하고 일선 부대에서 심각한 정비난과 부품수급 문제를 겪어야 했다.
파일:독일트럭.jpg
동부전선에서 이동하는 한 독일군 부대. 사진속 트럭들의 종류가 전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자.[21]

변호를 해보자면, 이는 독일군이 그런 대규모 차량 전력을 운용할 연료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석유 부족은 당시 독일의 가장 큰 전략적 약점 중 하나였는데, 이는 독일 군부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 전 독일은 필요 석유량의 대부분을 미국소련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크릭스마리네보다 훨씬 강력한 영국 해군에 의해 해상이 봉쇄되어 미국과의 무역로가 막혀버렸고[22], 소련이 보내주는 전략 물자로 그러나 이마저도 독소전쟁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물주였던 바로 그 국가들과 적대하게 되면서 수입선도 끊겼고, 같은 추축국이면서 산유국인 루마니아에서 수입한 석유와 석탄을 통해 만든 합성 석유를 통해서 겨우겨우 버티는 신세가 된다.[23]

물론 제 3국과 거래해서 자원을 수입하는 방법도 있었고, 실제로 독일이 이 방법으로 중립국 스웨덴에서 막대한 양의 철광석을 수입하거나 포르투갈에서 텅스텐을 수입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미 저러한 자원을 실어나를 바다는 영국 해군이 장악한 지 오래였으니 결국 이것도 가까운 유럽 내 국가 상대로만 가능했다는 게 문제.

7.3. 전후의 역사 왜곡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군을 좋아하는 밀리터리 매니아들 중에서 독일을 과하게 옹호하는 입장이 강한 사람들은 제3제국 휘하 군대가 벌인 막장 전쟁범죄는 '사악한 나치당의 사병'인 슈츠슈타펠의 책임으로 전부 몰아가고, 국방군은 그저 나라를 위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인 '군대'였음을 강조하며 국방군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24] 하지만 슈츠슈타펠 만큼은 아니지만 국방군도 상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사실 군대자체가 위에서 통제를 하더라도 가끔가다가 장병 하나가 막나가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아예 야전장교가 병사들을 이용해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적잖은데 통제는 커녕 암묵적 승인을 한 나치 독일에서 국방군이 깨끗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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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후 부활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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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출신 인물

10.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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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군 공용으로 쓰인 군기인 '국가전쟁기(Reichskriegsflagge, National War Flag)'다. 당연하게도 현대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영화나 교육자료 관련 목적 외의 게양 시 처벌받는다.[2] 각종 전투차량, 항공기에 사용한 국적 표지인 막대 십자, '발켄크로이츠(Balkenkreuz)'다. 그나마 나치 십자가 형태가 아니기에 대다수의 게임에서는 해당 이미지로 독일 국방군을 표현한다. 또한 영상 제작자들 중 전범 상징으로 인한 노란딱지 등을 걱정하는 경우 대부분이 갈고리십자를 발켄크로이츠나 휘어진 제국군/연방군식 철십자로 대체한다. 대표적으로 많은 역사 컨트리볼 영상에서도 친위대는 하켄크로이츠를, 국방군은 막대 십자가로 그려 구분하거나 아예 철십자로만 그린다.[3] 국방군 최정예 부대로 알려져 있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전신이 바로 이 베를린 근위연대이다[4] 이 복무신조는 영화 작전명 발키리 도입부에서도 나온다.[5] 독일 국방군은 병장이 분대장, 부사관이 소대장, 위관급 장교가 중대장, 소령과 중령이 대대장, 대령이 연대장인 편제구조를 지녔다.[6] 이 숫자는 사학자 뤼디거 오베르만스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국방군에 복무'했었던' 사람들의 수를 모두 합친 것이지 어느 한 시점의 국방군의 병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7] 사실 이 군구 제도는 독일 제국의 군구 제도를 바이마르 공화국,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치 독일이 계승해서 사용한 것이다. 참고로 수는 4개로 줄어들었지만 현 독일연방공화국 역시 군구를 운용한다.[8] 폴란드 침공 이전 군구 지도라 XX, XXI, 총독부 군구와 보헤미아-모라비아 군구가 나타나있지 않다.[9] 위 지도와는 다르게 아래에 나열한 모든 군구들이 표기되어 있다.[10] 브란덴부르크 주의 동쪽 부분으로, 현재는 폴란드령이다.[11]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전이 XIII(13) 군구였으니 다음 군구는 XIV(14) 군구가 돼야 하나 이상하게 14와 XV(15), XVI(16)을 건너뛰고 XVII(17)군구로 명명되었다. 상당히 특이한 부분.[12] 위와 같은 경우로, 숫자가 XIX(19)를 스킵하고 바로 XX(20)으로 넘어간다.[13] 현 폴란드 그단스크.[14] 전 세계적으로 한국처럼 민간에서 바로 부사관을 뽑는 제도가 드물다. 한국은 병 출신들이 대부분 징병으로 온 사람들이다보니 평상시엔 직업으로서 병이 되어 군에 남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뽑지도 않고 있다. 한국은 과거 한국 전쟁 때 부랴부랴 부사관을 뽑아냈던 일 때문에 민간 부사관제도를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정석은 독일 국방군처럼 징집 혹은 직업으로서 병사로 입대하여 다년 간 복무한 뒤, 부사관 선발시험을 치르거나 영국군처럼 한 계급에 3~5년씩 지내면서 자동 진급하는 것이다.[15]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의 병영부조리는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시기가 아닌 베트남 전쟁 시기에 극심했다.[16] 하지만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주인공의 동생이 야간에 소련군과 신경전 중에 담배 불을 끄라는 명령을 어기다가 담배 때문에 위치가 발각 당해 소대전체에 폭격이 날아왔고, 계속 전쟁수행 동안 패배주의적 말을 해서 소대의 전체의 사기를 계속 하락시키는 등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는 인식도 많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그를 계속 변호해주던 장교(이자 그의 친형)의 행동인데, 계속된 사기 하락성 발언과 폭격 원인 제공으로 인해 병사들의 폭력을 묵인한다.[17]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P-51이 도입되고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주야간 전략폭격을 시작한 1944년 이전까지 독일의 전시경제는 규모 면에서는 소련을 능가하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생산력은 후달릴 정도로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이는 소련에서는 스탈린대숙청을 통해 비록 병폐도 있었지만, 어쨌든 고도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집중적인 전시체제를 돌릴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나치에 부역하는 기업들이 정경유착으로 뒤 방산비리를 밥 먹듯이 해가며 서로 부정부패를 해먹기 바빴다. 또한 에바 브라운 등의 사치품 생산에도 너무 많은 군수공장이 할당되어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 상당수를 그들이 지칭하는 열등인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차별받는 그들이 당연히 나치에 충성할 이유도 전혀 없는지라 군수품의 품질을 약화시키는 사보타주까지 저질렀다.[18] 이는 동맹국인 일본과도 공유하는 문제점인데 둘 다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19] 참고로 성채 작전발터 모델 등 다른 국방군의 장군들도 극구 반대한 사안이었다. 한마디로 만슈타인총통에게 잘 보이는 데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하인츠 구데리안 역시 회고록에서 만슈타인히틀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 보인다고 돌려까기식으로 비판하고 비난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히틀러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만슈타인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20] 독일군이 사용한 미국제 트럭은 절대다수가 프랑스가 면허생산한 트럭들이었고, 이후 동부전선에서도 무기대여법으로 공여된 미국제 트럭 소수를 노획하여 사용했다.[21] 사진에 등장한 트럭들은 앞에서부터 스튜드베이커 US6 6륜구동 2.5톤 트럭, 푸조 DMA 2.5톤 트럭, 포드 V3000S 3톤 트럭, 그리고 우니폼-디젤 6륜구동 경형 트럭이다.[22] 미국은 당시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독일에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23] 합성 석유가 가장 큰 석유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연합국이 합성 석유 공장을 폭격해 초토화시켜버리면서 상황은 매우 나빠지게 된다[24] 비슷한 것으로 일본제국의 전쟁범죄와 침략행위는 모두 육군이 저질렀고, 해군은 무관하다는 해군선옥론이 있다. 이 또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장에 카미카제부터가 해군 항공대가 주축으로 해댄 짓이다.[25] 대부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이나 오헝 제국군에 복무한 이들이라는게 인상적이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인류 최대의 전장에서 보낸 것이었다.[26] 하급 장교나 병.[27] 전범이자, 제4대 유엔 사무총장이다! 나름 과거를 숨겼지만, 뒤늦게 밝혀지는 바람에 외교관으로써의 인생이 끝장났다.[28] 영화 더 캡틴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막판에 보여주었던 범죄행각으로도 유명한데,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29] 무솔리니 구출 작전 때 공군 소속 공수부대원으로 위장했다. 실제 소속은 무장친위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