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구역이 주데텐란트. |
주데텐 독일인들의 기. 단명했던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주데텐란트 자치주의 주기로 쓰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주데텐란트를 대표하는 기로 쓰였다.[1] |
1. 개요
체코의 지명. 체코 및 슬로바키아어 발음은 Sudety(수데티)이지만 독일어로 읽은 Sudetenland(주데텐란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로마자 스펠링을 그대로 읽은 수데텐이라는 표기도 통용된다.이 지역은 중세 시절부터 독일인이 다수 거주했고, 이들은 독일-체코 국경 지대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체코의 역사적 국가인 보헤미아 공국과 보헤미아 왕국 내에서도 정치적, 지리적으로 핵심인 구역이었다.
1945년 체코의 민족 구성 지도. 붉게 칠해진 지역이 독일계이고 오른쪽 끝 보라색 지역은 폴란드계이다.
주데텐란트, 주데텐 독일인(Deutschböhmen)이라는 단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개념이 잡혔다.[2] 당시 유행하던 범게르만주의로 인해 1938년 주데텐란트 위기가 발생하여, 이후 뮌헨 협정으로 독일에 합병당했고, 일부는 폴란드에게 점령됐다. 덕분에 주데텐란드는 '단치히'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가 '내놔'라고 떼를 쓴 동네로 잘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전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재건될 때 독일인이 대거 추방되면서 현재는 대부분 체코인이 거주중이다.
어원으로는 체코 북부와 실레시아 지방 사이의 수데티 산맥. 하지만 주데텐란트는 수데티 산맥[3]보다 넓은 지역으로 사용했다.
2. 역사
훗날 주데텐란트라고 알려진 지역은 민족주의 대두 이전에 따로 구별되었던 적이 없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체코의 역사와 비슷하다.역사적으로는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였으나 독일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였다. 보헤미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이래 동방식민운동 등등으로 독일인이 대거 이주해 왔는데, 특히 30년 전쟁으로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완전히 예속되면서 이주의 물결이 가속화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성립 당시에는 독일인이 전체 인구의 23%를 차지하면서 숫적으로 슬로바키아인까지 누르고 체코인의 뒤를 이은 제2민족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독일인들이 특히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이 주데텐란트였다. 여기에만 대략 3백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살았다.[4] 주데텐란트 대부분의 마을들은 독일인 비율이 80%를 넘어갈 정도 일정한지역에 상당부분 다수를 차지하였고 갈등의 주 원인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다른 지역과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지역이었지만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전까지는 민족 갈등은 없었고 주데텐란트 지역이 보헤미아 다른 지역과 분리되었다는 정서도 없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체코 민족문화 부흥운동과 나폴레옹 전쟁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립 이후 민족주의가 체코 전역에서 발흥하면서 보헤미아 왕국의 주도권을 놓고 체코인과 독일인 사이의 갈등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프라하 대학교가 독일어 대학과 체코어 대학으로 분리된 것도 이 당시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망 후 이 지역의 독일인들은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오스트리아와 같은 독일인으로서 오스트리아 잔류를 선포하였고, 주데텐란트를 포함한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독일계 지역 전부가 독일과 통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인정받지 못하여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고, 독일인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전간기간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에 의해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연정을 통해 독일인들을 권력 집단의 주요 축으로 끌어들이면서 민족적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체코인과 주데텐 독일인의 갈등은 끝이 없었고 서로간 불신은 존재하였으나 안정적인 경제와 전술한 독일계 정당들의 연정 참여와 큰 동화 노력 같은 건 없었기에 불신으로 그쳤다.
허나 세계 대공황 후 1930년부터 갈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주데텐란트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공업화 비율이 높았고 경제에서 수출산업의 비율이 높았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서 타격을 더 크게 받았다.
거기다, 당시 주데텐란트에서의 동화 노력이 거세지며 체코어 교육과 체코어 사용이 의무화되자 독일인들의 불만은 점점 쌓이게 된다. 거기에다 1933년 독일 본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이에 따른 체코 내 독일국가사회노동당의[5] 불법화와 더불어 주데텐 독일인들의 독일 귀속 요구가 빗발쳤다. 1935년 체코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주데텐 독일당은 의회의 의석 300석중 44석(전체의석 대비15.2%)을 얻음으로서 원내 1당으로까지 등극하였으며 당원수가 무려 130만명에 달했고,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인의 40%가 가입되어 있었다.
또한 히틀러의 야심도 한몫 했다. 1938년 3월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독일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 뽕이 매우 크게 올랐다. 이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위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 퍼져 있는 독일계는 히틀러의 하나의 독일이라는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노리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간의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해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또한 군사 동맹국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9월 13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데테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군부의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다.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영국 또한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주데텐란트의 독일로의 귀속 이후 독일 국방군이 주데텐란트에 입성하며 찍힌 사진. 나치식 경례를 하면서도 왼쪽 2명과 다르게 오열하는 오른쪽 여인의 모습이 이색적.[6]
주데텐란트의 독일 귀속에 관한 주민투표에서 사용되었던 주민투표지. 안슐루스때처럼 '아니오'(Nein)를 구석으로 박아버리고 '예'(Ja)를 노골적으로 강조시킨 투표용지가 인상깊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는 영토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나치 독일로부터 체코를 막을 힘이 빠졌다. 일단 주요한 이유로 주데텐란트의 막대한 산업시설과 더불어 독일 방어를 위해 체코가 건설한 요새선, 주데텐란트의 300만 인구까지 모조리 독일 손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까지 일사천리로 일어났다.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망 후 체코슬로바키아에 환원되었고, 독일계 주민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추방되며 주데텐란트라는 지명도 사라졌다. 이 때 수공업자나 사업가 등으로 지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던 독일인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는 다른 지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체코인이 이주하였다. 오늘날도 이 지역은 실업률이나 빈곤율이 체코 타 지역보다 높다.
3. 같이 보기
-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1938년 9월 뮌헨 협정
-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완전병합
[1] 물론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러한 용례를 인정하지 않았다.[2] 그 이전에는 그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헤미아 왕국/모라비아 변경백국/슐레지엔 공국에 살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독일계 주민이었다.[3] 체코어 수데티 산맥은 독일어로 주데텐(Sudeten)이다. 주데텐란트(Sudetenland), 주데텐의 땅이 원래보다 크게 사용된 것이다.[4] 체코슬로바키아의 전체 인구는 1천 3백만 명 정도였다.[5] 나치당과는 다르지만 체코 내 독일계 파시즘 정당이었다.[6] 이를 두고 기쁨에 감격해서 우는 것이라는 해석(게다가 주데텐란트 주민은 대다수가 독일계일 것이니)도 있지만, 나치의 눈총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경례를 하는 상황에서 슬퍼하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판단은 알아서.사실 나치가 무서우면 굳이 경례 하지말고 그냥 집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