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76I는 3호 전차의 차체를 베이스로 하여, 새로운 전투실과 고정형 포를 장착한 소련의 자주포로, 1943년 4월부터 11월 도합 7개월 가량 201문만이 생산되었다.
해당 자주포는 비록 적국인 나치 독일제였으나, 기동성이 좋은 3호 전차의 차체를 이용하여 만들어졌기에 운용 인원들의 평가가 매우 높은 편에 속했으며, 전투시에도 강력한 화력을 지원 가능했기에 보병들 또한 이를 매우 선호하였다.
주 무장은 T-34-76 후기형부터 장착된 76mm F-34 전차포였으며, 해당 포는 ZiS-3 야포를 기반으로 하여 제작된 대전차포였기에 탄속과 명중률, 그리고 위력이 매우 뛰어난 편에 속하였으며, 이 덕에 보병지원 뿐만 아니라 제한적인 대전차전 임무도 수행이 가능하였다.
구동계통과 차체와 관련된 부분은 상술했듯, 3호 전차의 차체를 이용했기에 대부분의 부품이 3호 전차의 것을 사용하나, 에어필터만큼은 독일제의 성능이 좋지 않았기에 소련제로 교체하여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째서 자체개발이 아닌, 적국의 3호 전차를 이용했냐면 독소전 당시 수많은 3호 전차가 소련군에 의해 노획되었기 때문에 수리 부속 및 정비창 확보가 쉬웠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정형 전투실로 변경하면서 전투실 넓이가 더 커졌고, 상부 폐쇄형이기에 포격이나 보병 공격에 취약했던 SU-76과 달리 작전에 용이해졌다는 장점도 존재해 여러모로 본판 3호 전차보다 전투력이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SU-76의 변속기 및 구동계 결함으로 인해 자주포 수급에 큰 차질이 생기자, 소련 군부에서는 노획 차량들을 수리하여, 무장과 구동계를 변경해 붉은 군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을 각 공장에 하달하였다.
이 당시, 독일군의 3호 전차는 T-34-76과의 격차로 인해 다수의 단차가 격파되거나, 유기되는 일이 잦았는데, 제37번 공장에서는 해당 차량들을 수거하여, 여러 실험 끝에 1943년, T-34와 KV-1이 사용하는 76mm F-34를 장착하였으며, 기존의 포탑이 비좁기에 아예 포탑을 드러내는 대신, 고정형 전투실을 장착하여 자주포로 개수하였다.
성공적으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은 군부에게도 대호평을 받았으며, "SU-76I"라는 제식명을 하달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1943년 4월부터 11월까지 전역 각지에서 배송된 노획 3호 전차들을 본격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도 매우 고무되어 1,000문의 생산을 37번 공장에 의뢰하였으나, 동년 SU-76M이 개발에 성공하며 자주포 생산이 원활해지자 201문을 끝으로 생산을 종료하게 되었다.
강력한 화력 76mm F-34 포의 화력은 ZiS-3 야포와 동일하였기에 보병 지원 및 대전차 화력이 높은 편에 속하였으며, 적시적소에서 보병들을 지원기 안성맞춤이었다.
높은 기동성 3호 전차의 기동성은 가벼운 무게에 고회전형 가솔린 엔진을 얹은 차체에서 비롯되었기에, 3호 전차를 베이스로 제작된 SU-76I 또한 3호 전차의 기동성을 물려받아 높은 기동성을 자랑하였으며, 특히 좌우 선회가 매우 매끄러웠다는 조종수의 기록이 남아 있다.
높은 방호력과 거주성 SU-76 및 T-26에 비해 장갑 수치가 두꺼운 편에 속하였으며, 신형 전투실 또한 경사장갑으로 제작되어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방호력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이 덕에 거주성도 원본인 3호 전차보다 더 좋아져서 운용 인원들이 전투 시에도 무리 없이 원활하게 작전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솔린 엔진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다는 문제 때문에 절대 다수의 차량들이 경유를 사용하는 소련군 내에서 연료 보급에 차질을 겪었기에 혼성 편제 없이 오직 해당 자주포만을 사용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존재하였다.
수리 공정의 부재 및 낮은 수량 3호 전차는 독소전 초반에는 독일 국방군의 기갑 전력의 주력으로써 다수의 차량이 투입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3호 전차는 후방으로 돌려지고 그 대신 4호 전차, 5호 전차 판터, 6호 전차 티거 등의 후계 전차들이 투입되며 수리 부속이나, 공정을 확보하기 어려워져 201문만 생산되고 단종되는데에 영향을 끼쳤다.
드네프르 강 전투 당시의 독일 국방군 육군 제23기갑사단 제128대전차자주포대대 노획 야크트판처 SU-76I(r)
제2차 세계 대전 중, SU-76I가 유일하게 대규모로 사용된 전장은 바로 1943년 여름부터 동년 말까지 벌어진 드네프르 강 전투였다. 이 시기, 제5근위전차군 산하의 제1901자주포연대, 제1902자주포연대, 제1903자주포연대 소속으로 도합 90문이 투입되었으며, 해당 차량들은 1943년에서 1944년 초까지 각지에서 SU-76의 빈자리를 적절하게 매꿔주는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3호 전차의 차체를 유용한 특성상, 혹한에 약해 투입된 90문 중 절반이 고장으로 비전투손실을 기록하였으며, 나머지 차량들도 예비 부속의 문제로 쉽사리 사용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1943년 말에서 1944년 경, 드네프르 강 인근에서 독일군과 맞닥뜨린 1902자주포연대 산하의 SU-76I들이 적극적인 반격을 통해 독일 자주포 1문을 격파하고 격퇴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후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다수가 파괴되었으며, 남은 10~15문의 차량은 후방으로 편제되며 SU-76I의 실전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원조 사용국으로, 1943년부터 1944년 말까지 약 1년의 시간동안 사용하였으며, 43년 전투 중 다수의 차량을 망실하고, 이후에는 수리 부속의 부족으로 인해 퇴역 처분을 밟았다.
종전 이후 1문을 쿠빙카 인근에서 사용하였는데, 해당 단차도 1968년경 퇴역 처분을 밟고 스크랩되었다가, 후일 복원되어 모스크바 포클론나야 공원에 소장중에 있으며, 이를 포함한 현재 잔존한 개체는 원본 부품을 이용해 재생산한 지휘차형 1문과[2],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잔존한 원본 개체인 상단의 "3038번차" 1문까지 합쳐 도합 3문이 잔존해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