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3:12:58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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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스티븐슨 89명 (16.8%)
(83.2%) 442명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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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 ||
<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11월 4일 5시 ~ 11월 5일 6시[UTC]
선거인단 531명
투표율 63.3% (▲ 10.8%p)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미국)|
민주당
]]
[[공화당(미국)|
공화당
]]
홈스테이트 일리노이 뉴욕[2]
승리 주 9 39
선거인단
89명 442명
전국 득표
44.3%
27,375,090표
55.2%
34,075,529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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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52 RNC 지명자.jpg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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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당 별 상황
3.1. 민주당
3.1.1. 에스테스 키포버의 부상3.1.2. 대체 후보자 물색3.1.3.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
3.2. 공화당
4. 최종 후보5. 선거 진행
5.1. 공산주의와 매카시즘5.2. 스티븐슨과 민주당의 관계5.3. "나는 한국에 갈 것입니다"5.4. TV 광고와 "체커스 연설"
6. 선거 결과
6.1. 지역별 결과
7. 평가 및 탐구
7.1. 공화당의 백악관 탈환7.2. 뒤바뀌기 시작한 지역 구도7.3. 한국 전쟁에 미친 영향
8. 여담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52년 11월 4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부통령 후보 리처드 닉슨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애들레이 E. 스티븐슨과 부통령 존 스파크먼을 꺾고 미국의 제34대 대통령과 제36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20년이나 유지되었던 민주당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선거이다. 한국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선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확대 계승한 복지정책 "페어딜 정책"을 임기 1기에 이어 2기에도 야심차게 추진시켜나간다. 또 같은 날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의석을 9석 늘린 54석을 확보하고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무려 75석의 의석을 늘려 263석을 확보, 공화당으로부터 상하원을 모두 탈환하는 쾌거를 거둔다.

해리 S. 트루먼의 임기 2기 정책은 내부적으로 페어딜 정책을 보수연합에 맞서 추진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패배하여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도주하는 국부천대가 일어났으며, 이 외에도 동서독의 분단, 베를린 봉쇄 등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졌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남한을 침공하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며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북한은 단 3달만에 남한군을 낙동강까지 밀어내고 적화통일을 눈 앞에 두게 된다. 보다 못한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 한국전쟁 파병을 요청했으며 상하원은 압도적 표차로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파병을 승인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불과 5년만에 다시 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전황을 날짜별로 나타낸 영상
한국전쟁 초기, 공화당의 소극적인 반대를 제외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 여론은 낮지 않았다. 평화주의자 엘리너 루스벨트도 한국전쟁에 찬성했으며 만약 한국을 포기한다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한 네빌 체임벌린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중간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견하였다. 하지만 1949년 단기공황 이후 민주당의 지지 여론은 감소하고 있었다. 1949년 실업률은 7.9%로 최고조에 달했고 이 불황기 동안 국내총생산은 1.7% 감소했고 국내 소비는 22% 감소했다. 도매가격과 생활비 지수도 각각 12%p, 5%p 하락했는데, 이는 페어딜 정책의 명백한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2차대전 이후 불과 5년만에 다시 맞이한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은밀하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반공주의의 문제에 관해서도, 앨저 히스 사건으로 민주당이 엄청난 타격을 입은데다, 조지프 매카시, 리처드 닉슨 등으로 대표되는 공화당 내의 청년 반공파들이 "문트-닉슨법" 등을 제정하면서 매카시즘을 불러일으키며 반공주의의 인기 몰이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일:1950_United_States_Senate_elections_results_map.svg
1950년 중간선거의 상원의원 선거 결과[3]
그 결과, 1950년 중간선거는 트루먼의 예상과 정 반대로 공화당이 상당히 선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이 상원에서 5석을, 하원에서 28석을 늘리며 선전한다. 비록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트루먼의 민권 정책과 페어딜 정책에 반대하던 남부민주당원을 규합한 로버트 A. 태프트의 "보수연합" 의석으로는 이전보다도 넉넉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태프트는 상하원에서의 우위를 토대로 트루먼 대통령의 페어딜 정책을 대부분 저지하며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한다. 또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스콧 루카스(Scott Lucas)가 자신의 지역구인 일리노이에서 53% 대 44%로 대참패하고 뉴욕시장에서 민주당의 후원조직 "태머니 홀"의 심판을 내세운 무소속 후보 빈센트 임펠리테리가 승리하는 등[4] 상징적인 패배가 돋보였다.

또한 1950년부터 에스테스 키포버 상원의원이 주도한 조사를 통해 트루먼 행정부의 여러 부정부패 사건들이 드러난다. 이 조사에 의하면 국세청 직원 수백명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특혜를 배풀었고 이 대가로 모피 코트와 당시로서는 고급품이었던 냉장고를 선물받았는데 이 때문에 "트루먼 급속냉장고 스캔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스캔들로 166명의 국세청 직원이 사임하거나 해고되었다. 이듬해인 1951년에는 트루먼의 오랜 친구이자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의장을 지낸 윌리엄 보일(William M. Boyle)이 부정 대출 의혹으로 사임하는 등[5] 트루먼에게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파일:MacArthur 1951.jpg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쭉쭉 밀고 올라가면서 잘 될줄 알았던 한국전쟁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헛수고가 되었고 전쟁은 38도선 근처의 혹한기 전쟁으로 교착화된다. 이 때문에 트루먼은 외치와 내치, 정부 청렴성 등 그 어떤 분야에서도 강점을 보이지 못했고 지지율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1951년, 해리 S. 트루먼은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더글러스 맥아더를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시켰고 이는 트루먼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2차대전 직후 군인이 존중받던 시기 맥아더를 해고하면서 트루먼의 이미지가 크게 악화된데다, 맥아더가 귀국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면서 트루먼의 이미지는 두배로 떨어졌다. 맥아더 해임 직후 갤럽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이 22%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갤럽 역사상[6] 가장 낮은 수치의 현직 대통령 지지율이다.[7][8] 처음에는 한국전쟁에 찬성 내지 소극적 반대의 입장을 보였던 공화당도 한국전쟁을 "트루먼의 전쟁"이라고 부르며 비아냥댔다. 어떻게 보면 1968년의 린든 B. 존슨과 전개 구도가 똑같은 셈이다.

결국 해리 S. 트루먼은 너무나 낮은 지지율로 인해 대통령 3선을 포기하며, 공화당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을 매섭게 공격해 보수의 차기 대권주자로 올라선 로버트 A. 태프트를 비롯해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해럴드 스타센 등이 20년만의 정권 교체를 노린다.

3. 정당 별 상황

3.1. 민주당

3.1.1. 에스테스 키포버의 부상

파일:TIME 052452.jpg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에스테스 키포버 (1952년 3월 24일 호)
1932년 대선에서 집권한 민주당은 20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남북전쟁 이후의 공화당을 제외하면 유례가 없는 장기 집권이었다. 1950년 중간선거에서 이미 민주당 장기집권의 피로감이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데다 현직 대통령 트루먼의 인기는 땅바닥을 치고 있었다. 민주당 내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1951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아이젠하워는 43%를 기록해 18%에 불과했던 트루먼 대통령을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민주당의 장기집권과 공화당의 고립주의 정서를 막아야한다는 신념 때문에 공화당에 덜컥 입당해버렸다.

일단 1952년 연초까지 트루먼이 재선하지는 못할지언정 다시 민주당 후보로 나올 것임은 매우 유력해보였다. 트루먼의 강력한 반대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테네시 주 상원의원 에스테스 키포버가 거의 유일하게 트루먼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민 상태였다. 비록 트루먼 대통령 재임 도중 대통령 3선을 금지한 수정헌법 제22조가 통과되었으나 이 법은 소급적용되지 않아 트루먼은 적용 대상이 아니었고, 또 이전 대통령에게 남은 임기가 2년이 안 될 때 유고나 사임으로 임기를 계승한 대통령이 3선을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9] 트루먼은 루스벨트에 이은 3선 대통령에 도전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당 내 여론조사에서도 트루먼이 32%의 지지율을 기록, 21%의 키포버 의원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세부 수치는 달랐다. 에스테스 키포버 의원은 트루먼의 국세청 직원 급속냉장고 스캔들을 공개해 민주당의 양심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민주당의 장기집권에 혐오감을 느끼던 여러 대중에게 호감을 샀다. 이 여론조사에서 무당층으로 대상을 한정하면 트루먼 18%, 키포버 36%로 오히려 키포버가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트루먼이 현역 프리미엄을 업고 여유롭게 이길 것이라고 관측되었는데, 놀랍게도 예비선거 결과 에스테스 키포버가 19,800표를 확보해 트루먼의 15,927표를 4,000여표 차이로 크게 앞질렀다. 충격에 빠진 트루먼 대통령은 3월 29일 3선 도전을 포기하는 성명을 발표한다.[10] 이후에도 에스테스 키포버 의원은 여러 프라이머리와 코커스에서 승리하며 총 3,169,448표를 득표, 대중 득표의 64.6%를 차지한다.

3.1.2. 대체 후보자 물색

문제는 두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이 당시 정당의 예비선거는 단지 당원의 지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요깃거리에 불과했고 실질적으로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밀실에서"[11]당권을 쥔 소수 정치인에 의해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도 대선 예비선거는 오직 15개 주 및 D.C.에서만 실시되었고 절대다수의 대의원은 예비선거로 선출되지 않았다.[12]

두번째 문제는 에스테스 키포버 의원이 당권파와 민주당 고위 정치가 대부분에게 극도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키포버 의원은 "키포버 위원회"를 이끌면서 거침없이 상대 정치가의 비리를 폭로했는데 그 정치가의 소속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50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키포버 의원은 스콧 루카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관련된 비리 의혹을 터트렸다. 민주당 지도부는 제발 선거 뒤로 폭로를 미뤄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키포버는 들은채도 안했고 선거 직전 의혹을 폭로하였다. 결국 스콧 루카스는 53% 대 44%라는 엄청난 표차로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하고 만다.[13]

그 외에도 지나치게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에스테스 키포버가 출마하면 리처드 러셀, 스트롬 서먼드 등의 남부민주당원이 반발하여 1948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핵심 기반이었던 남부 주 여러곳이 독자 출마한 남부민주당원 후보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당 당권파는 키포버에 대항하는 대체 후보자를 찾아야했다.

주요 후보자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 W.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 주소련 미국대사, 상무부 장관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후보자는 트루먼 대통령이 지지한 외교관 W. 애버럴 해리먼이었다. 그는 과거 주소련 미국대사와 주영 미국대사 등을 지내 외교 전문가로 분류되고 있었으며, 트루먼은 그런 해리먼이 한국전쟁을 처리하기에 적합한 인사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떠한 선출직 공무원 자리도 맡지 않았는데 이는 경력 부족으로 해석되었고, 논란이 되어 결국 후보군에서 탈락한다. 이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으나, 1958년 넬슨 록펠러에게 패배한다.
  • 앨번 W. 바클리(Alben W. Barkley) - 현직 부통령
    그 다음으로 트루먼과 당권파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앨번 바클리 부통령이었다. 미국에서는 부통령 프리미엄이 현역 대통령 프리미엄 다음가는 선거의 이점이므로 바클리의 대통령 출마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바클리는 무려 74세나 되었고 이는 그가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있을지에 대한 의문점을 자아냈다.[14] 게다가 그는 시력 저하 등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었고 실제로 불과 4년 후인 1956년 사망한다. 이 이유 때문에 월터 로이터(Walter Reuter)와 같은 노동조합 간부들은 바클리의 출마를 지지하지 않았고 바클리도 대체 후보군에서 탈락한다.
  • 리처드 러셀 주니어(Richard Russell Jr.) - 조지아 주 연방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 역시 대체 후보자로 고려되었다. 그는 남부민주당원 사이에서 인기 있는 후보자였고 실제로 예비선거에서도 키포버 다음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보수연합에 소속되어있었기도 하고, 너무 인종주의적이라서 휴버트 험프리와 같은 북부 자유주의자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다.[15] 결정적으로 그는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 브라이언 맥마흔(Brien McMahon) - 코네티컷 주 연방상원의원
    브라이언 맥마흔은 상원 원자력 위원회에서 근무하며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억제력을 키울 것을 주장했다. 맥마흔은 예비경선 초기부터 뛰어들어 "맥마흔이 바로 그 남자다(The Man is McMahon)"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대통령직을 향한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예비경선이 막 시작될 시점 폐암을 진단받으면서 결국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당대회가 개최된뒤, 코네티컷 대표단 일부는 그에게 표를 던졌지만 대세를 뒤흔들 수는 없었다.
파일:1956_Estes-Kefauver-(left)_2.jpg
에스테스 키포버와 애들레이 스티븐슨
  • 애들레이 E.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 - 일리노이 주지사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당권파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애들레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였다.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할아버지가 클리블랜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을 정도로 19세기부터 민주당에서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문 출신으로, 일리노이 주지사를 지내면서 매카시즘에 반대하고 페어딜 정책의 영향을 받은 복지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자유주의적인 정치가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다. 또한 연설도 잘하고 유쾌한 성격 탓에 친구도 많았다. 트루먼 대통령과 민주당 당권파는 스티븐슨 정도라면 키포버를 이기고 본선에서도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스티븐슨을 대체 대통령 후보자로 밀어주기로 하고, "드래프트 스티븐슨"(Draft Stevenson; 스티븐슨 대선후보자 옹립) 운동을 벌인다.

이 외에도 대의원 확보만을 위해 자신의 홈스테이트에서 출마한 "가장 좋아하는 아들"(Favorite Son)도 다수 출마하였다. J. 윌리엄 풀브라이트, 휴버트 험프리 등이 대표적이었다.

3.1.3.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0044C9> 후보자 1차 투표 2차 투표 3차 투표
<rowcolor=#0044C9> 교대 전 교대 후 교대 전 교대 후 교대 전 교대 후
<colbgcolor=#f5f5f5><colcolor=#000> 애들레이
스티븐슨
248.5
(20.25%)
273
(22.20%)
329.5
(26.79%)
324.5
(26.38%)
613
(49.84%)
617.5
(50.20%)
에스테스
키포버
300.5
(24.49%)
340
(27.64%)
362.5
(29.47%)
362.5
(29.47%)
279.5
(22.72%)
275.5
(22.40%)
리처드
러셀
267.5
(21.80%)
268
(21.79%)
294
(23.90%)
294
(23.90%)
261.5
(21.26%)
261
(21.22%)
애버럴
해리먼
126
(10.27%)
123.5
(10.04%)
121
(9.84%)
121
(9.84%)
사퇴
앨번
바클리
49.5
(4.03%)
48.5
(3.94%)
78.5
(6.38%)
78.5
(6.38%)
67.5
(5.49%)
67.5
(5.49%)
기타 후보 235
(19.15%)
177
(14.39%)
44.5
(3.62%)
49.5
(4.02%)
8.5
(0.69%)
8.5
(0.69%)
1952년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스티븐슨은 일리노이 주 대표단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시사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대표단의 설득 끝에 대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3차 표결에서 대의원단 과반수의 표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에스테스 키포버는 대중득표에서 우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민주당 당권파가 인기 있는 후보 대신 주요 정치가들이 모두 만족할만한 보다 인기 없는 후보를 대선 후보로 선출한 셈인데, 이러한 관행은 1952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16] 또한, 이 선거는 전당대회에서 후보자가 1차 투표에서 결정되지 않은 마지막 선거이다.

리처드 러셀 의원은 보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 대부분의 대의원을 휩쓸면서 1차 투표 2위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를 의식하였는지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부통령 후보로 보수 민주당원인 존 스파크먼을 지명한다. 존 스파크먼 외에 고려된 후보로는 오클라호마 주 상원의원 마이크 먼로니, 조지아주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현직 부통령 앨번 바클리, 상원의원 에스테스 키포버 등이 있었다.[17] 모두 남부 주 출신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민주당 지도부는 북부 자유주의자인 스티븐슨의 출마와 트루먼의 민권 정책 추진 등으로 민주당에서 마음을 돌리고 있던 남부 주의 표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3.2. 공화당

3.2.1. 로버트 A. 태프트

공화당은 1950년 중간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하였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저조한 인기로 20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게 되었다. 그러나 공화당 내 상황은 매우 복잡미묘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공화당은 금본위제 옹호와 J.P. 모건 등 금융재벌의 지지로 보수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남은 일부의 진보주의자들을 이끌긴 하였으나 그마저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집단탈당을 감행한 후 세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1916년 대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이 있던 찰스 에번스 휴즈가 출마했으나 역시 예상을 깨고 근소하게 패배하고 만다. 결국,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공화당 당권은 조지프 캐넌 하원의장,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캘빈 쿨리지 대통령, 허버트 후버 대통령[18] 등 구보수파(Old Right)가 주도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공화당 내에서 자유방임적 경제를 지지했던 보수파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그 결과 1936년 대선에서는 1912년 진보당을 지지했던 알프 랜던이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또 1940년에는 민주당 출신 웬델 윌키, 1944년과 1948년에는 공산당 불법화에 반대했을 정도로 상당히 중도적인 성향을 보였던 토머스 E. 듀이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19] 당연히 공화당의 구 주류 세력이었던 보수파는 불만을 품었으며, 이들은 뉴딜연합공화당 내 중도파에 반대하는 보수연합을 만들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던 로버트 A. 태프트를 의회 내 지도자로 옹립한다.
파일:apiit2ii6__40005.jpg
보수의 태프트(왼쪽)[20]와 중도의 듀이(오른쪽)
당 내 보수주의 리더였던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urg) 상원의원이 1951년 사망한 후, 로버트 A. 태프트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비록 그의 엄격한 보수 성향과 고립주의적인 외교관 때문에 1940년에는 윌키에게, 1944년과 1948년에는 듀이에게 지명권을 빼앗겼지만, 듀이의 예상치 못한 대선 패배와 1950년 중간선거에서의 선전 이후 태프트의 대권은 그 어느때보다도 가까워져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머스 E. 듀이가 3번째 출마를 포기하며 태프트는 가장 유력한 프론트러너로 여겨지게 되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역시 태프트의 지지를 선언했다. 이 선거는 로버트 태프트 본인에게도 중요한 선거였는데, 이미 60대에 접어들었던데다가 건강도 악화되고 있던 태프트에게는 1952년 대선 출마가 사실상 인생 마지막 대선 출마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21]

하지만 로버트 태프트는 실제 출마할 시 당선되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우선 그는 너무 보수적이었고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중도표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이기더라도 압도적으로 이기기는 힘들다는 얘기가 공화당 내에서 돌았고 1932년 이후 계속되는 공화당의 참패 사슬을 끊어내고 싶었던 공화당 지도부는 더욱 강력한 후보를 원하게 되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로버트 태프트가 너무 좌파적이라고 생각해(...) 지지하지 않기도 했다. 일례로 같은 오하이오 주의 상원의원인 존 브리커(John Bricker)는 로버트 태프트가 뉴딜 정책에 타협적이게 된 것으로 보아 사회주의자들에게 설득당한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2] 또한 경선에서 일부 보수표는 더글러스 맥아더, 해럴드 스타센 등으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또, 태프트의 외교관이 논란이 되었다. 비록 공화당은 1940년 이전까지 당내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고립주의를 지지하는 여론이 주류이긴 하였으나, 2차 대전이 터지자 토머스 E. 듀이, 아서 반덴버그 등 고립주의를 옹호하였던 인사들마저 개입주의를 일부 옹호하는 상황이 되었다.[23] 그러나 태프트만큼은 일관되게 고립주의를 지지하였으며, UN 가입에 반대한 7명의 상원의원 중 하나였고, NATO 창설에도 반대했고,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도 반대했으며, 한국전쟁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태프트가 윌리엄 보라 마냥 답이 없는 고립주의자였던 것은 아니고 의외로 일부 외교 정책에서는 타협의 여지를 보이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코앞으로 다가왔던 미국에서 이러한 태프트의 관점은 너무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점 때문에 토머스 E. 듀이를 위시로 한 당내 중도파는 태프트의 지명을 막기 위해 그보다 더욱 인기가 많으면서도 중도적이고 일단 출마하면 압승이 확실한 후보를 옹립하기로 결정한다. 바로 2차 대전의 전쟁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였다.

3.2.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는 본래 정치에 입문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군인을 존경하고 또 그만큼 군대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국가이지만, 동시에 군대와 정치를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24] 총칼로부터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가장 강력한 대권 잠룡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48년 대선을 앞두고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를 포함한 많은 민주당 정치가들이 그에게 대권 출마를 권했고, 1951년에는 트루먼 대통령까지 출마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정치가들은 아이젠하워의 정계 입문을 꾸준히 권유했다. 1952년, 아이젠하워는 양당에서 모두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일단 출마만 하면 당선될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공화당에서는 후일 부통령 후보가 되는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과 토머스 E. 듀이 전 뉴욕주지사가 아이젠하워 영입에 공을 들였다. 둘의 공통점은 온건주의적인 북동부 록펠러 공화당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UN 가입에도 반대할 정도로 고립주의적 성향이 있는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모든 국제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해 전쟁 영웅이자 일찍이 유럽을 파시즘으로부터 구해낸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 국제주의의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Draft Eisenhower"(아이젠하워 대선 후보 옹립운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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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도 점차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민주당은 건국 초기 민주공화당의 장기집권기를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5연속 대선 승리를 통해 20년이나 장기집권하고 있었다. 만약 1952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이긴다면, 24년, 어쩌면 1960년까지 28년이나 민주당이 집권하게 될 것이고, 이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일이 될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런 배경 때문에, 만약 자기가 민주당에 입당해 출마한다면 더 쉽게 이기겠지만, 공화당으로 입당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이 양당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일이며 더 나아가 트루먼 행정부의 부정부패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적극적으로 대선 운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헨리 캐벗 로지와 같은 북동부 중도 공화당원들이 그를 대신해 열성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여줬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가 대권에 큰 뜻이 없어 당에서 오래 활동했던 로버트 태프트에 밀리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아이젠하워가 태프트를 12%p차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꺾으면서 이런 우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아이젠하워 대선 후보 옹립운동 지원 집회에서도 공화당의 예상을 훌쩍 상회하는 2만 5천명의 지지자들이 운집해, 많은 공화당 정치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후 아이젠하워는 감동을 받았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시작한다. 며칠 뒤 발표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아이젠하워와 트루먼의 대선 양자 대결 여론조사가 발표되었는데, 이 조사에 의하면 아이젠하워가 무려 25%p 차이로 트루먼을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뒤이은 중서부 지역의 예비선거에서는 태프트가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선거 구도는 급격하게 치고 올라오는 아이젠하워 대 당내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태프트의 양자 구도로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3.2.3.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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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전당대회장에 결집한 아이젠하워의 지지자들
아이젠하워와 태프트의 경쟁은 아주 치열했다. 아이젠하워는 북동부 공화당원들의 지지로 공화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북동부 지역에서 승리한 반면, 태프트는 홈스테이트 오하이오가 위치한 중서부 지역에서 승리했다. 또 얼 워런, 해럴드 스타센, 더글러스 맥아더 등의 다른 경쟁자도 있어서 어떤 경선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어떤 경선에서는 태프트가 승리하는 구도가 반복되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두 후보의 세력이 모두 막강하여 전당대회 날이 되어봐야 누가 이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남부 지역의 대의원단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남부 지역은 민주당이 너무 우세해서 공화당 조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미약한 남부 공화당 세력은 황갈색 파벌(Black-and-tan faction)[25]과 백합 파벌(Lily-white faction)[26]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황갈색 파벌로 이루어진 공화당 남부 대의원단은 미군인종 통합에 미온적이고 때로는 반대했던 아이젠하워보다 정치 경력 내내 린치 방지법 같은 시민권 법안을 일관적으로 지원한 태프트를 지지했다. 백합 파벌과 아이젠하워 캠프 측에서는 즉각 반발하였으며, 듀이와 로지는 태프트가 남부 주의 대의원단을 훔쳤다고 비난하고 이 표를 다시 아이젠하워 측으로 재분배는 "페어 플레이"를 요구했다. 태프트는 듀이와 로지의 제안을 거부하였으나, 표결 결과 658표 대 548표로 듀이와 로지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결국 총 42명의 대의원단이 태프트 측에서 아이젠하워 측으로 이동하였다.

최종적인 대의원단 표결 결과, 아이젠하워는 총 유효표수의 49%인 595표를 얻어, 42%의 태프트(500표)를 근소하게 앞질렀다. 그러나 이는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 표에서 9표 모자란 것이었다. 그러나 미네소타 주의 해럴드 스타센을 지지한 대표단이 아이젠하워를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아이젠하워는 재투표에서 과반수를 훌쩍 넘기는 845표를 얻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었다.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E81018> 후보자 1차 투표
<rowcolor=#E81018> 교대 전 교대 후
<colbgcolor=#f5f5f5><colcolor=#000>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595
(49.34%)
845
(70.07%)
로버트
태프트
500
(41.46%)
280
(23.22%)

워런
81
(6.72%)
77
(6.38%)
해럴드
스타센
20
(1.66%)
더글러스
맥아더
10
(0.83%)
4
(0.33%)
아이젠하워는 최종 후보자로 결정되긴 하였으나, 4수 대선 도전 끝에 외부인사에게 패배하고 만 태프트와 그의 측근들은 감정적으로 격양되어있었다. 태프트를 지지하는 일리노이 연방 상원의원 에버렛 더크슨 (Everett Dirksen)[27]은 흥분해 아이젠하워를 지지한 듀이를 패배의 후보라고 비난하여 듀이와 로지, 아이젠하워 지지자들에게는 비난을, 태프트 지지자들에게는 환호를 받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태프트를 개인적으로 만났으며, 태프트는 일단 아이젠하워를 지지하였으나, 그의 지지자들은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개인적으로 태프트를 보복하지 않을 것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는 대가로 태프트의 신임을 얻어낸다. 태프트도 아이젠하워의 꾸준한 설득과 인간미에 마음이 풀어졌는지, 선거전 막판에는 아이젠하워와 골프도 같이 치는 친구 관계로 발전한다. 아이젠하워는 그에 대한 대가로 1952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태프트가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젠하워는 리처드 닉슨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리처드 닉슨은 1946년 처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문트-닉슨법"을 제정하고 앨저 히스 청문회를 주도하는 등 불꽃같은 반공주의 행위로 유명해진 정치가였다. 무엇보다 토머스 듀이는 닉슨을 상당히 좋게 봐주었고 아이젠하워에게 닉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을 추천했다. 닉슨은 다소 보수적인 반공주의 행보를 보이면서도 어떤 정책에서는 중도적인 면을 보이기도 해 당 통합 차원에서도 좋았다. 아이젠하워는 그렇게 닉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게 되었다. 인기 많은 노령의 전쟁영웅과 젊은 초선 반공주의자 상원의원의 조합이었다.

한편,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이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할 기회를 받았는데, 너무 극단적이어서 대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조지프 매카시 역시 이 전당대회에서 기조 연설자로 참석했으며 그답게 극렬 반공주의적 수사가 가득 담긴 감정적인 연설을 했다.

4. 최종 후보

4.1. 민주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스티븐슨 스파크먼.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존 잭슨 스파크먼
앨라배마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Adlai_Stevenson_1952_campaign_poster.jpg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선거 포스터[번역]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후보직 수락 연설
Madly for Adlai
애들레이를 위해 미치도록

1952 스티븐슨-스파크먼 티켓 슬로건
1952년 7월 26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대의원단 유효표의 51%인 617.5표를 받고 다시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앨라배마 주 상원의원 존 스파크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스티븐슨-스파크먼 티켓은 지지부진한 한국전쟁의 성과, 경제 성장 둔화, 낮은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 남북으로 분열된 민주당의 상황 등으로 인하여 아이젠하워에 비해 엄청나게 뒤쳐진채 선거 운동을 시작한다.

4.2.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아이크 닉슨 1952.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캘리포니아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I_Like_Ike_button,_1952.svg
파일:Put_Real_Men_in_Government,_No_More_Clowns,_Cut-ups,_or_Characters_-_Wisconsin_Historical_Museum_-_DSC03240.jpg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리처드 닉슨의 선거 포스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의 후보직 수락 연설
I Like Ike!
나는 아이크가 좋아!

1952 아이젠하워-닉슨 티켓 슬로건
1952년 7월 11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후보로, 리처드 닉슨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대통령의 낮은 인기 속에서 스티븐슨과 큰 차이로 선거 운동을 시작한다.

4.3. 기타 후보자

5. 선거 진행

5.1. 공산주의와 매카시즘

지루한 선거전이 이어졌다.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에스테스 키포버가 전당대회에서 탈락하고 강성 우익파인 로버트 A. 태프트도 탈락하면서 두 중도성향의 후보자인 애들레이 E. 스티븐슨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맞붙게 되면서, 두 후보의 성향 차이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후보는 자신이 평소에 취하던 것보다 더 확고한 입장으로 각 의제에 대한 입장을 설정했고, 한국 전쟁매카시즘의 광풍 도중 치러졌던 선거였던만큼 특히 안보 의제가 선거의 쟁범으로 두드러졌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비록 토머스 듀이와 캐벗 로지와 같은 북동부 중도파 공화당원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 후보가 되긴 하였으나, 로버트 A. 태프트가 이끄는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군인 출신으로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야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강경한 반공주의적 수사를 이용해 태프트의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대표적으로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즘에는 내심 반대[30]했으나, 조지프 매카시의 과격한 언행에 반대한다면 공화당 보수파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매카시즘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도리어 그는 매카시 상원의원과 악수를 하는 사진을 찍으며 보수파에 구애하기도 했다. 해리 S. 트루먼은 아이젠하워에 실망했다며 다시는 그와 대화하지 않을거라고 화를 냈고, 스티븐슨도 매카시에 아이젠하워가 굴복했다며 비난했지만, 이는 한국 전쟁과 "앨저 히스 사건"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있던 미국에서 오히려 스티븐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파일:아이젠하워 매카시.jpg
악수하는 아이젠하워와 매카시
반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는 일리노이 주지사 시절 보여준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심각한 국익 손실이 우려된다면 노동조합의 파업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태프트-하틀리 법"(Taft-Hartley Act)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하였다. 또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그를 위선자라고 부르고 매카시즘의 광신적 멸공주의 풍조를 종식시키겠다고도 했다. 스티븐슨은 공산당원들을 색출하자는 매카시의 주장에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치밀한 스파이이기 때문에 충성서약 같은 종이쪼가리로는 막을 수 없고 합법적이고 유화적인 방법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야한다는 논지였다. 물론 스티븐슨도 매카시즘의 취지인 공산주의의 침투 방지에는 동의했지만, 방법론에 있어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스티븐슨의 이러한 입장이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재평가되긴 하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해 있던 당시의 미국인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소수의 지식인들은 스티븐슨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도리어 스티븐슨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스티븐슨은 19세기 버번 민주당 시절부터 민주당에서 정치 명문가로 불렸던 스티븐슨 가문 출신으로 정치계 귀족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또 미국 정치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시카고와 일리노이 주에서 활동하다보니 너무 기득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와 대조되게 아이젠하워는 무뚝뚝한 군인 이미지를 내세웠다가 예비선거에서 참패한 더글러스 맥아더를 반면교사로 삼아 친근한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내세웠다. 아이젠하워는 스티븐슨이 상남자답지 못하다고 조롱했고, 선거 3년 전 부인과 이혼해 독신이었던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가정사까지 엮여 당시에는 "애들레이"라는 이름이 "동성애자"의 별명이 될 정도까지 되었다. 스티븐슨은 먹물 이미지를 개선하고 매카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대머리를 희화화해 "만국의 달걀머리여, 단결하라! 그대가 잃을 것은 노른자고 얻을 것은 전 세계다!"(eggheads of the world unite, you have nothing to lose but your yolks!)라는 재치있는 연설을 했지만, 정작 미국인들에게는 "책 좀 읽었다고 잘난척 하는거냐"라는 반응을 들어 역효과를 불러왔다.[31]

또한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였던 리처드 닉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스티븐슨과 민주당에 있어 치명타였던 앨저 히스 사건을 알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 역시 이용해 닉슨과 함께 유세를 돌며 반공주의를 강조했고, 앨저 히스를 언급할때마다 "애들레이 히스"라고 부르면서 스티븐슨이 공산주의를 막는데 전혀 소용이 없는 후보라고 맹공하였다. 스티븐슨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반공주의가 선거 의제로 부각될때마다 스티븐슨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5.2. 스티븐슨과 민주당의 관계

스티븐슨이 겪는 또다른 어려움은 인기 없는 해리 S. 트루먼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트루먼 정부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애들레이 스티븐슨이 트루먼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설득력이 없었다. 부통령 후보 존 스파크먼도 트루먼 정부에서 일한 적이 없었고 트루먼의 민권 정책에 반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였지만, 이 당시 인종차별주의 이슈는 선거의 핵심 주제가 아니었다.

거기다 아이젠하워는 흑인 민권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취하며 트루먼의 흑백 인종차별 철폐 정책에 반발하던 남부의 민주당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현명한 선거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제임스 F. 번즈, 텍사스 주지사 앨런 시버스, 前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 존 C. 스테니스 등이 모두 아이젠하워를 지지했다. 결정적으로 남부 민주당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버지니아 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해리 F. 버드 상원의원이 스티븐슨의 지지를 거부하면서 남부 민주당원들은 스티븐슨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이는 아이젠하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나마 존 스파크먼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덕에 제임스 이스트랜드 등 다수의 남부민주당원들은 마지못해 스티븐슨을 지지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고 아이젠하워는 허버트 후버 이후 처음으로 남부에서 많은 지지를 얻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32]

그렇다고 해서 북동부 진보주의자들이 스티븐슨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듀이 뉴욕주지사를 비롯한 많은 공화당 북부 당원들이 아이젠하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데다 스파크먼 부통령 후보의 인종주의적인 입장 때문에 스티븐슨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스티븐슨은 트루먼과 자신의 관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공화당을 "후버의 정당" "대공황의 정당"으로 비난하는 네거티브전을 펼쳤으나, 20년도 더 전의 일인 후버와 대공황을 언급하는 것은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너무 비열한 네거티브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공화당의 보수-중도파 분열을 이용해 공화당을 "두 코끼리[33]의 정당"으로 비난하는 등 아이젠하워의 표를 깎으려고 필사적이었으나 이 역시 아이젠하워가 태프트와 거래를 한 이상 효과가 거의 없었다.

그 외에도 스티븐슨은 "나는 기질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대통령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34]라는 발언으로도 논란이 되는 등, 악재에 악재란 다 겪으며 선거기간 내내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5.3. "나는 한국에 갈 것입니다"

진전이 없는 한국전쟁의 전황을 보도하는 브리티시 파테의 기록 영상
트루먼 정부의 극단적으로 낮은 지지율과, 커져가고 있던 미국 내 반공주의 정서에 맞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가장 써먹기 좋은 소재는 교착 상태에 빠진 한국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은 초반 1년간은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이내 38도선 근처에서 교착화되었고 1차 대전의 참호전을 연상케하는 소모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있었다. 이미 7년 전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을 겪은 바 있는 미국인들은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전쟁에 끼어들어 막대한 피해를 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고, 거기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인기 있는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하며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했다.

이는 로버트 A. 태프트를 위시로 한 고립주의자들에게는 미국이 지나치게 외국의 사정에 얽혀있다는 비판을 받았고, 강경한 국제주의자들에게도 공산주의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트루먼은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이런 트루먼의 인기 없는 전쟁을 떠안아 어떻게든 한국 전쟁을 수습해야하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스티븐슨은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면 언급할수록 민주당의 표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해 매우 제한된 입장만을 표방했다.

이에 반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한국 전쟁은 표를 잃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고 이 점만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았다. 그는 고립주의자와 국제주의자의 주장을 뒤섞어, 트루먼의 대 동구권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이 당선되면 6.25를 조기종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952년 10월 24일,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을 담은 "나는 한국에 갈 것입니다" 연설을 발표했고 사실상 이 연설의 발표 이후 선거 판세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의 솔직하고 완전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새 행정부의 첫 번째 임무는 하나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 방침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 국민에 대한 저의 약속입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행정부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전 행정부가 할 수 없었던 것을, 그와 같은 당의 후계자가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행정부는 어디서 시작되어야할까요? 그것은 대통령이 간단하고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그 결심이란 한국 전쟁을 명예롭게 끝낼 때까지 정치의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한국에 갈 것입니다!(I shall go to Korea!)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52년 10월 24일 디트로이트 유세 中
이 연설은 너무 효과적이어서, 대선 직전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52%가 한국 전쟁을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답할 정도였으며, 결국 애들레이 E. 스티븐슨도 한국 전쟁에 대해 입장을 밝힐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워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며, 오로지 북한과 중국과의 협상만으로 전쟁을 점진적으로 끝내야한다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결국 "휴전"으로 결론내려질 수 밖에 없는 아이젠하워의 "조기 종식" 주장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종전"을 시킨다는 스티븐슨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2년이나 질질 끌고 있는 전쟁을 기약 없이 계속 하는 것은 남북한에게도, 미국에게도 전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도 단 30%의 응답자만이 스티븐슨의 협상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여긴다고 답했다.

결국 이미 기울어져있던 스티븐슨과 아이젠하워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아이젠하워는 선거 막판 표심 굳히기 작업에 들어가면서 아이젠하워의 압승이 예견된다.

5.4. TV 광고와 "체커스 연설"

전후 경제 호황과 더불어 미국 사회에 일어난 가장 큰 문화적 변화는 확산된 텔레비전 보급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TV를 집에 들인 미국인의 수는 20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52년에는 텔레비전을 소유한 가구 수가 1,530만 가구로 집계되었으며 이는 미국 전체 가구 수의 34.2%에 달했다. 텔레비전의 폭발적인 보급량 증가는 미국인의 일상에 큰 변화를 주었는데 정치 문화 역시 이에 따라 변화하였다. 1952년 대통령 선거는 양 후보가 처음으로 TV 광고를 포함해 텔리비전으로 방송되는 미디어 노출에 공을 들인 선거로 기록되고 있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광고
"Let's Not forget the Farmer"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광고
"I Like Ike"
양측 후보는 모두 전문 광고 대행사를 고용하였고, 중독적인 후크송을 처음으로 이용한 선거 광고를 제작하였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광고인 "I Like Ike!"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역대 최고의 포지티브 선거 광고로 평가받는다.[35] 아이젠하워의 선거팀은 TV를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아이젠하워 선거팀은 아이젠하워의 딱딱한 군인 이미지를 덜어내고 그를 편안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도록 분장과 조명을 사용했다.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광고팀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면서도 다소 못 미더워 했으나, 이게 제법 크게 먹혀들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선거팀은 포지티브 위주의 광고를 텔레비전으로 송출해 큰 효과를 봤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슈도 극복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체커스 연설"이었다.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였던 리처드 닉슨은 선거 운동 도중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18,000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논란이 거세지자 아이젠하워는 부통령 후보자를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윌리엄 노랜드로 교체하는 것도 고려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선거팀은 오히려 이 이슈를 정면돌파하기로 결정했고, 리처드 닉슨을 TV에 출연시켜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을 반박하게 했는데 이를 체커스 연설이라고 한다.

이 체커스 연설에서 리처드 닉슨은 자신이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은 맞지만, 절대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고 불법적으로 받은 것이라면 모두 반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적으로 받은 유일한 대가는 강아지 "체커스" 밖에 없는데, 자기 딸들이[36] 너무 강아지를 귀여워한다면서 돌려주기 싫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는 닉슨 정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 중 하나였다. 닉슨은 그동안 맹렬하게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투사의 이미지로 비추어졌지만, 이 연설로 자신의 딸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제기된 정치자금 논란도 극복해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닉슨이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같은 형편 없는 언론 대응으로 온갖 욕은 다 먹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이젠하워 선거팀의 대 미디어 전략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스티븐슨 역시 TV 광고를 사용하긴 했으나, 아이젠하워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히려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워가 치약이나 자동차 광고하듯 자신을 홍보한다며 정치인 답지 못하다는 엘리트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37] 이 때문에 선거 홍보에 있어서도 아이젠하워가 스티븐슨을 계속 앞서나가게 된다.

6. 선거 결과

<rowcolor=#000>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득표수 비고
부통령 후보 득표율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27,375,090 2위
존 스파크먼
(John Sparkman)
44.33%


89명 낙선
파일:공화당(미국) 엠블럼.sv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34,075,529 1위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55.18%


442명 당선
- 그 외 후보 301,323 낙선


[[무소속(정치)|
무소속
]]
0.48%
총 투표수 61,751,942


탈환
전국 득표 선거인단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rowcolor=#000,#fff> 44.33% 55.18% 16.76% 83.24%
선거 결과, 큰 이변 없이 공화당 아이젠하워가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젠하워는 전체 유효 득표의 55.18%3,407만 5,529표를 득표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를 약 10.85%p, 6,700,439표차로 앞질렀다. 아이젠하워는 북부, 동부, 서부에 속하는 모든 주에서 승리하였고 기존 공화당의 열세 지역이었던 남부에서도 해리 S. 트루먼의 민권법 여파로 인한 공화당 지지에 힘입어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테네시, 버지니아주, 메릴랜드, 델라웨어 등 7개 주에서 승리하고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등에서는 경합을 벌였다.

반대로 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는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남부에서만 아이젠하워를 겨우 앞질렀을 뿐, 동부, 서부, 중부의 모든 주에서 패배했고 심지어 스티븐슨의 고향이었던 일리노이 주에서도 약 40만표차, 54.84% 대 44.94%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38] 마찬가지로 민주당이 참패한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나마 앨 스미스 후보가 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에서는 승리했지만 스티븐슨은 패배했고, 인구 25만명 이상의 도시 39개 중 무려 21곳을 아이젠하워에게 내어주는 등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또한, 남부의 16개 주 중에서도 오직 9개 주만 승리하고 나머지 7개 주는 공화당에게 내어주며 완패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가장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냈으며, 세계대공황 이후의 장기 침체기를 딛어내고 20년만에 백악관을 되찾게 된다. 스티븐슨은 오로지 9개 주에서만 승리하는 부끄러운 패배를 당했지만, 해리 S. 트루먼의 매우 낮은 인기를 감안하면 이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당의 중진들은 그를 여전히 지지했으므로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재기를 노린다.

6.1. 지역별 결과

파일:1952년 대선 지역별 결과.svg
권역별 후보 득표[39]
<colcolor=#000,#000> 지역 구분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기타 후보
<rowcolor=#000,#fff> 서부[West]
9,350,914
3,897,043
(41.68%)
5,383,343
(57.57%)
301,323
(0.49%)
<rowcolor=#000,#fff> 중부[Midwest]
21,153,657
8,886,923
(42.01%)
12,190,270
(57.63%)
76,464
(0.36%)
<rowcolor=#000,#fff> 남부[South]
12,445,507
6,287,061
(50.52%)
6,136,070
(49.30%)
22,376
(0.18%)
<rowcolor=#000,#fff> 동부[Northeast]
18,801,864
8,304,063
(44.17%)
10,365,846
(55.13%)
131,955
(0.70%)
<rowcolor=#000,#fff> 전국
61,751,942
27,375,090
(44.33%)
34,075,520
(55.18%)
301,323
(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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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rowcolor=#000,#fff> 태평양[Pacific]
7,139,370
3,021,070
(42.32%)
4,055,509
(56.80%)
62,791
(0.88%)
<rowcolor=#000,#fff> 대평원[Prairies]
6,255,462
2,409,467
(38.52%)
3,820,032
(61.07%)
25,963
(0.42%)
<rowcolor=#000,#fff> 딥사우스[DeepSouth]
2,360,493
1,422,495
(60.26%)
936,183
(39.66%)
1,815
(0.08%)
<rowcolor=#000,#fff> 뉴잉글랜드[NewEngland]
4,824,622
2,037,291
(43.60%)
2,622,629
(56.12%)
13,180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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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colbgcolor=#EEE><colcolor=#000>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켄터키 495,729
(49.91%)
495,029
(49.87%)
◀ 700 (0.07%p) ▷
테네시 443,710
(49.71%)
446,147
(49.99%)
◁ 2,437 (0.27%p) ▶
사우스캐롤라이나 173,004
(50.72%)
168,082
(49.28%)
◀ 4,922 (1.44%p) ▷
미주리 929,830
(49.14%)
959,429
(50.71%)
◁ 29,599 (1.56%p) ▶
로드아일랜드 203,293
(49.05%)
210,935
(50.89%)
◁ 7,642 (1.84%p) ▶
웨스트버지니아 453,578
(51.92%)
419,970
(48.08%)
◀ 33,608 (3.85%p) ▷
델라웨어 83,315
(47.88%)
90,059
(51.75%)
◁ 6,744 (3.88%p) ▶
}}}}}}}}} ||

7. 평가 및 탐구

7.1. 공화당의 백악관 탈환

1933년 후버 대통령의 퇴임 이후 20년동안이나 민주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공화당은 거의 멸망 일보 직전에 도달했다. 1936년 알프 랜던이 버몬트와 메인 단 2개 주에서만 승리하는 대참패를 당한 후 공화당은 그 옛날의 휘그당이나 영국의 자유당처럼 새로운 제3의 정당에게 대부분의 기반을 내어주고 뉴잉글랜드 지역의 군소정당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조롱도 당했다. 193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공화당은 전열 재정비에 나섰음에도, 1940년, 1944년, 1948년 대선에서 다시 3연속 공화당이 패배하며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꺾으면서 이러한 우려는 불식되었고 공화당은 다시 민주당과 함께 미국 정치의 축을 이루는 양당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다만 대통령 이전의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아이젠하워였기에, 자신의 각료들 또한 거의 대부분 공화당 정치인들이 아닌 비정치인 출신들로 구성했다. 특히 군, 기업, 법률, 학계와 같이 정치 이외의 분야들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재들을 대거 발탁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제너럴 모터스 CEO 출신의 국방부 장관 찰스 E. 윌슨이 있는데, 아이젠하워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GM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윌슨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미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갖추게끔 했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윌슨은 비대해진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감축했다.[48]

이들은 거의 대부분 부유했기 때문에, 당시 리버럴들과 민주당에서는 "8명의 백만장자와 1명의 배관공[49] 으로 채워진 내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데이비드 스테벤(David Stebenne)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만약 성공한 기업인들을 입각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사업 실패자, 정치꾼, 뉴딜 변호사[50]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각료로 임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초래할 것이다(If the leaders of successful business were excluded from consideration, the result would be an inability to get anybody to take jobs in Washington except business failures, political hacks, and New Deal lawyers)라고 일기에 작성하며 이러한 비난들에 대해 크게 불쾌해 했다고 한다. #

7.2. 뒤바뀌기 시작한 지역 구도

지역별 구도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 지역 교대 현상이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공화당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북동부를 사수하였고 민주당도 남부 지역을 사수하였으나, 두 지역에서 양당의 득표율 격차는 크게 줄었다. 우선 민주당 스티븐슨 후보는 남부에서 겨우 1%p(아이젠하워 49.3% 대 스티븐슨 50.5%) 차이로 아이젠하워에 우위를 점했으며, 버지니아,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테네시 등 민주당의 텃밭이라고 여겨졌던 많은 남부 주에서는 아예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하였다. 딥사우스 지역에서도 스티븐슨은 60%대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20년 전인 1932년 대선에서 루스벨트 후보는 이 지역에서 91.55%의 득표를 올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민주당의 참패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북동부 지역 역시 아이젠하워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중도 성향 공화당원들의 근거지였으나, 스티븐슨은 이 지역에서 44.17%나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1932년 대선에서, 북동부 지역은 약 50% 대 46%로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이 가장 선전한 지역이었고, 뉴 잉글랜드에서는 격차가 49.2% 대 48.4%로 0.8%p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이 선거에서는 1932년 대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당이 크게 패배했지만, 스티븐슨은 북동부에서 44.17%라는 득표를 올려 전국 득표율과 거의 유사한 표를 얻었고,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한정하더라도 43.60%에 달하는 득표를 얻었다. 한편,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매사추세츠주에서 공화당 현역 중진 헨리 캐벗 로지가 민주당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는 이변이 발생하기도 했다.[51]

물론, 지역 정계에서는 여전히 양당의 우세 구도가 확연하게 유지되었으나, 민주당의 진보화와 이후 20년동안이나 미국을 뜨겁게 달구게 될 흑인 민권 문제로 196~80년대에 대대적으로 양당의 기반 지역이 뒤바뀌는데, 1952년 대선은 그런 현상의 전초가 된 선거로 평가받는다.

7.3. 한국 전쟁에 미친 영향

이 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된 문제는 한국 전쟁이었기 때문에, 미국사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선은 아니나, 한국사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 당시 두 후보 모두 한국전쟁의 낮은 지지율 때문에 전쟁을 일찍 종료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인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점진적으로 중국, 북한 측과 협정을 맺어 명예롭게 종전을 가져오는 것을 지지한 반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하루빨리 전쟁이 종료되어야한다면서 휴전의 형태로 전쟁을 일찍이 종결하는 방안을 지지했다. 스티븐슨의 협상 종전안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전쟁의 장기화를 의미했으므로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남북한에게나 미국에게나 좋을 것이 전혀 없는 방안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승리하면서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의 형태로 매듭지어졌다.
한국에 방문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5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한국에 가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며, 1952년 12월 4일 당선되자마자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찾아 제임스 밴 플리트, 마크 클라크 등을 대동해 빠른 전쟁의 종결을 선언했다. 1953년 7월 27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단 6달만에 한국전쟁은 휴전되었으며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솟구쳤다.[53] 이후에도 아이크는 1960년 퇴임 직전에도 한국을 찾아 한국인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8. 여담

9. 관련 문서


[UTC] [2] 출생지는 텍사스, 성장지이자 실질적인 고향은 캔자스였지만 직업 특성상 이사를 다닐 일이 매우 많아 대선 당시 등록 주는 뉴욕이었다.[3] 옅은 색은 기존 의석을, 짙은 색은 새로 획득한 의석을 나타낸다.[4] 빈센트 임펠리테리는 전임자 윌리엄 오드와이어가 경찰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직을 사임하자 뉴욕시장 대행직을 맡고 있었다. 뉴욕 민주당 지도부는 아일랜드계 정치 사조직인 태머니 홀과 임펠리테리 시장대행의 불화 때문에 임펠리테리를 재공천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임펠리테리는 제3지대 정당을 창당해 시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110만표를 얻어 90만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페르디난트 페코라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5] 물론 공식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했다.[6] 1937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차 행정부 때부터 여론조사를 시작했다.[7] 이는 갤럽 통계 기준 사임 직전의 리처드 닉슨(23%), 리먼사태 직후의 조지 W. 부시(25%)보다도 낮다. 부정평가 최고치 역시 67%로 국회의사당 폭동 당시 도널드 트럼프(62%), 사임 직전의 리처드 닉슨(66%)보다도 높고 리먼사태 직후의 조지 W. 부시(71%)를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최고치다. 심지어 앞의 셋은 인기가 바닥을 뚫었던 당시 경제위기 상황이었지만(닉슨: 오일쇼크, 부시: 대침체, 트럼프: 대봉쇄) 트루먼의 인기가 바닥을 뚫었을 당시 미국은 8%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역사상 최고 호황기였다. 참고로 일각에서는 대공황을 겪은 허버트 후버의 지지율을 여론조사했다면 그 트루먼보다도 낮은 미국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8] 다만 해리 S.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킨 것은 2차 대전 이후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 정계에 개입하려던 여러 군인들의 야망을 꺾어 미국의 엄격한 3권분립 원칙을 보여준 것으로 후대에 재평가받기도 하였다.[9] 이 때문에 후일 린든 B. 존슨도 재선 임기를 마쳤음에도 1968년 3선에 도전하려고 했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얼마 안가 뜻을 접었지만.[10] 트루먼도 이 패배가 좀 쪽팔렸는지 자기 회고록에서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키포버한테 패배하기 훨씬 이전부터 3선을 할 생각은 없었다"라며 정신승리를 시전했다.[11] Smoke-Filled Room, 워런 G. 하딩이 선출된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나온 말이다. 요약하자면 높으신 분들이 맘대로 하는 상황을 일컫는다.[12] 이런 관행은 1972년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 출범으로 전당대회 룰이 바뀌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뀐다.[13] 원래 미국은 상대 당 상원 원내대표의 선거구에서는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관례가 있어서 현직 원내대표가 재선에 실패하는 경우는 톰 대슐 등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국한된다. 심지어 대슐은 당시 급격하게 우경화되어가고있던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이었으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는등 최대한 출혈을 줄이기라도 했다.[14] 만약 바클리가 이때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면, 조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까지 양당 소속으로 출마한 가장 늙은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것이다.[15] 험프리와 러셀의 악연은 깊은데, 인종차별 철폐를 촉구한 험프리의 1948년 전당대회 연설에 빡친 러셀이 동료 상원의원과 험프리 뒷담을 깠는데 그걸 엿들은 험프리가 상처를 받아 집으로 가던 도중 차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을 정도이다.[16] 19세기에는 이런 관행이 흔했고, 20세기에도 워런 G. 하딩이 이런 관행에 따라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17] 그 외에도 윌리엄 풀브라이트, 휴버트 험프리, 애버럴 해리먼, 로버트 커 등도 잠재적인 후보군에 있었다.[18] 후버는 대중에게 알려진것만큼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고 도리어 중도개혁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구보수파에 속했다.[19] 물론 이때도 찰스 L. 맥내리, 하이럼 존슨, 윌리엄 보라, 밥 라폴레트 주니어 등의 공화당 진보파가 주류가 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중도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뜻.[20] 사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아버지와 매우 닮지 않았다. 초고도비만인 아버지와 달리 정상체형인데다, 탈모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면 어느정도는 닮은 편이긴 하다.[21] 실제로 태프트는 이 선거 후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가 되었지만 1년만에 암으로 사망한다. 로버트 태프트가 이때 출마했다면 대통령 당선은 고사하고, 1872년 대선 마냥 고된 선거 운동 도중에 급사했을지도 모를 일.[22] 수십년 후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극우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로부터 RINO스럽다는 얘기를 듣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3] 특히 반덴버그는 엄격한 고립주의자였지만 2차 대전이 터지자 180도 변신해서 국제주의적 보수주의자로 거듭났다. 그는 진주만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은 진주만에서 죽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24] 더글러스 맥아더가 해임된 것도 한반도 핵폭격 제안 보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를 직접 해임한 트루먼이 회고록에서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25] 흑인과 친민권 백인으로 이루어진 공화당원 파벌[26] 백인으로만 이루어졌으며, 남부의 "인종 질서"를 지지하거나 매우 소극적으로 반대했다. 백합 파벌 공화당원들은 남부 공화당에서 흑인의 영향력을 축출해서 남부 민주당원과 경쟁하고자 하였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허버트 후버 대통령도 남부 진출을 위해 백합 파벌을 지원했다.[27] 이후 공화당 연방상원 원내대표[번역] 어떤 정당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십니까?
언젯적<1932: 후버의 정당> 빵 배급줄, 넘치는 노숙자, 은행 파산
<1952: 루스벨트의 정당> 고임금, 더 나은 거주환경, 사회보장제도
스티븐슨에 투표하세요!
[29] 1990년대 창당된 헌법당과는 완전히 다른 정당이니 주의. 물론 극우 성향인 것은 비슷했다. 대통령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부통령으로 해리 F. 버드 상원의원을 올리려 했으나, 당사자들에게는 동의를 얻지 못했고 도리어 버드 의원은 이에 불쾌해하며 헌법당의 입후보를 방해하였다.[30] 아이젠하워는 조지 C. 마셜을 군인으로서나, 선배로서나 존경하고 있었는데, 매카시는 중국이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것이 마셜 때문이라며 마셜을 공산주의의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마셜을 높게 봤던 트루먼은 아이젠하워가 마셜을 변호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이젠하워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셜은 지인들에게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보수파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며 그를 용서하자며 대인배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마셜을 백악관으로 불러 그를 매카시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마셜이 이를 받아들이며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31] 현재까지도 "달걀머리"는 미국에서 "지식인"을 조롱하는 어휘로 가끔 사용되는데 그 어원이 애들레이 스티븐슨이다.[32] 허버트 후버 역시 1928년 대선 당시 앨 스미스 민주당 후보의 민권에 대한 입장을 공격하며 많은 남부 주에서 승리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역사가들은 후버와 아이젠하워가 닉슨의 "남부전략"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가한다.[33] 공화당의 마스코트[34]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는 민주당 당권파의 등떠밀기에 소극적으로 반대하며 한 말이었다.[35] 이와 비슷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광고로는 존 F. 케네디"It's Kennedy for Me"(1960년), 리처드 닉슨"Nixon Now!"(1972년), 로널드 레이건"It's Morning Again in America"(1984년), 버락 오바마"Yes We Can"(2008년, 에미상 수상) 등이 있다. 한편 네거티브 광고 중에서는 린든 B. 존슨의 "데이지 걸"(1964년), 조지 H. W. 부시"회전문 감옥" "윌리 호튼" "탱크" 광고(1988년), 조지 W. 부시"Windsurfing"(2004년) 등이 고평가받는다.[36] 참고로 이 딸 중 둘째인 줄리 닉슨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결혼한다.[37] 비슷하게 토머스 E. 듀이도 1948년 대선 당시 광고에 출연하자는 참모들의 제안에 자기가 장사꾼이냐며 그런 천박한 짓은 안한다는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38] 심지어 시카고가 위치해있는 쿡 카운티에서도 아이젠하워가 앞섰다![39] 미국 상무부 휘하 연방 인구조사국 지정 권역에 따른 구분#[West]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뉴멕시코, 오레건,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Midwest]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South] 앨라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Northeast] 코네티컷, 워싱턴 D.C., 매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Pacific]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하와이[Prairies] 콜로라도,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몬태나,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Deep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NewEngland]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48] 여담으로 이 사람이 한 가장 유명한 발언이 바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What's good for General Motors is good for the country)로, 이 발언은 1950년대 당시 GM이 가진 미국 자동차 산업, 나아가 미국 경제 전체에 가진 막강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미국에서 GM의 포지션은 오늘날 한국에서 삼성의 포지션에 근접했다. GM공화국[49] 배관공은 배관공 노조 위원장을 역임했던 노동부 장관 마틴 패트릭 더킨을 가리킨다[50] 뉴딜 변호사란 1930 ~ 40년대에 민주당 행정부들에서 기용되어 뉴딜 정책을 구성하고 변호하던 변호사들을 일컫는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남부보수파 등 당시 미국 보수 진영에서의 뉴딜 변호사들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한국 보수 진영에서의 운동권 출신 시민단체 인사들이나 민변우리법연구회 출신 진보 성향 법조인들에 대한 인식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51] 로지가 자신의 재선 캠페인에는 시간 투자를 안하기도 했으나, 보스턴 브라민의 쇠퇴와 매사추세츠주의 인구 구성 변화가 더 크게 작용했다.[52] 브리티시 파테의 기록 영상. 영상 후반부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국군 장병을 사열하고 태극기를 흔드는 아이젠하워의 모습을 볼 수 있다.[53] 그의 부통령 닉슨이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으면서 전쟁을 5년이나 질질 끌고 또 남베트남이 결국 멸망하고 만 것과는 상반된다.[54] 다만 스티븐슨은 여론조사에서도 키포버에 밀렸지만, 험프리는 일단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밖에서 유진 매카시를 앞질렀다.